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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제의 손자이자, 고구려의 왕 주몽이라 하오. 내 비류국왕의 명성을 듣고 친교를 맺고 싶어 실례를 무릅쓰고 이리 찾아왔소이다.
송양은 서찰을 읽고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도 고구려의 주몽이 천제의 손자로서 신력(神力)을 발휘한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모름지기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었기에 이를 믿지 않았다. 비록 주몽이 나라를 일신하고 기세를 떨치고 있긴 하지만 아직 풋내기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송양은 연타발이 죽고 주몽이 자리 잡지 못한 이때가 졸본 땅을 차지하고 비류수 일대를 장악할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그런데 주몽이 제 발로 찾아온 것이다.
송양이 수하에게 분부한다.
“안으로 들이라.”
주몽이 신하들과 함께 편전으로 들어섰다. 송양은 거만하게 옥좌에 앉아 이들을 맞이했다. 이는 신하를 대하는 주군의 태도였다.
“내 궁벽한 곳에 살다 보니 고구려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네. 그대는 누구인가?”
송양의 거만한 태도에 주몽은 그와 친해 보려던 마음이 싹 달아났다.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고구려는 부여의 뒤를 이어 졸본 땅에 선 나라요. 나는 그곳의 왕 주몽이라 하오. 내 그대가 궁술에 능하다는 소문을 듣고 한번 겨뤄 보고 싶어 찾아왔소.”
주몽은 고개를 바짝 치켜세웠다.
송양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친다.
“정 소원이라면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지. 하지만 그냥 대결하면 너무 싱겁지 않은가. 이렇게 해 보면 어떻겠나. 이번 승부에서 지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의 수하가 되는 걸세.”
이들은 한 나라를 상징하는 존재였기에 상대의 수하가 된다는 것은 나라를 들어 바친다는 의미였다.
“좋소이다.”
주몽은 주저 없이 동의했다. 흔쾌한 답변에 송양은 속으로 놀랐다. 배포만은 인정해줄 만했다.
“미리 말해 두지만 난 이제껏 궁술을 겨뤄서 져 본 일이 없네. 나중에 물러 달라고 떼쓰지나 말게.”
송양은 자신감이 넘쳤다. 주몽도 느긋했다.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아는 것 아니겠소.”
송양은 주몽을 데리고 연무장으로 나갔다. 양국의 신하들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백 보 떨어진 곳에 과녁이 세워졌다. 표면에는 사슴이 그려져 있었다. 송양이 먼저 나섰다.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와 흙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송양은 정신을 가다듬고 활을 쐈다. 바람에 밀려난 화살이 사슴 그림에서 벗어나 과녁의 언저리에 맞았다. 이어서 쏜 두 발의 화살 역시 사슴을 맞히지 못했다.
“이처럼 바람이 불면 아무리 신궁이라 해도 제대로 맞추기 어렵다.”
송양은 낭패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물러났다.
이번엔 주몽이 나설 차례였다. 그는 자신이 차고 있던 옥가락지를 빼더니 무골에게 건넸다.
“이 가락지를 과녁에 걸어 놓아라.”
무골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옥가락지를 받아들고 과녁으로 향했다. 가락지는 사슴 그림의 몸통 한가운데 걸렸다. 멀리서 보니 마치 하나의 점처럼 보였다.
주몽은 활을 들고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가늠했다. 측정이 끝나자마자 한 호흡에 연거푸 세 대의 화살을 날렸다. 흙먼지를 뚫고 날아간 화살이 가락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세 번째 날린 화살이 가락지를 산산이 조각냈다.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이를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송양 역시 충격을 받았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송양은 활쏘기 내기를 크게 후회했지만 이젠 별 도리가 없었다. 염치 불고하고 변명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오늘은 내가 몸이 좋지 않아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네. 후일 다시 날을 정해 맞붙어 보세나.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게. 내 잠시 쉬어야겠네.”
송양이 참담한 표정으로 돌아서자 주위에 서 있던 호위 무사들이 주몽 일행을 에워쌌다. 여차하면 달려들 기세였다. 무골을 비롯한 고구려 무사들도 칼을 빼 들고 맞섰다. 금방이라도 한바탕 싸움이 벌어질 듯했다.
송양이 돌아서 수하들을 꾸짖었다.
“배웅해 드리지 않고 뭐 하느냐!”
비류국 무사들은 마지못해 길을 열었다. 이리하여 주몽 일행은 무사히 비류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도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무골이 주몽에게 묻는다.
“비류국에는 무엇 때문에 가신 겁니까?”
“송양이 대단한 인물이라 하기에 확인하러 간 것이오.”
“소신이 보기에는 소문이 과장된 듯합니다. 그리 대단한 인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비류국에서 겪은 일을 떠올리면 그런 생각을 할 만했다.
“내 보기엔 그릇이 큰 인물이오.”
“자신의 입으로 뱉은 약조조차 지키지 않았습니다. 내기에 졌으니 마땅히 주군 앞에 무릎을 꿇었어야죠.”
주몽은 소리 없이 웃으며 태연히 말한다.
“그렇지 않소. 송양은 한 나라를 책임지고 있는 왕이오. 왕이 아무 때나 무릎을 꿇는다면 그 백성은 어찌 되겠소. 일국의 왕이라면 때로는 자신의 명예보다 나라와 백성을 먼저 생각해야 할 때가 있는 거요. 두고 보시오! 때가 되면 송양이 나를 찾아올 것이오.”
비류국에서 벌어진 주몽과 송양의 궁술 대결은 곧 입소문을 타고 사방에 널리 퍼졌다. 세상 사람들은 주몽의 활 솜씨를 침이 마르게 칭찬하는 한편, 송양의 졸렬함을 비웃었다. 민심은 차츰 주몽에게로 기울어 갔다.
이듬해 여름, 장마가 시작되자 비류수 유역에 폭우가 쏟아졌다. 주몽이 치수(治水)에 힘을 쓴 덕에 고구려는 별 피해가 없었지만, 비류국은 심각한 물난리를 겪었다. 농작물이 물에 잠겼고 소·돼지 등 가축이 급류에 떠내려갔다.
수해가 갈수록 커지자 백성은 송양을 원망했다. 왕이 천제의 손자인 주몽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하늘이 벌을 내리는 것이라 수군댔다.
난처해진 송양은 신하들과 대책을 논의했지만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많은 백성이 강물의 범람을 피해 고구려로 떠났고, 나라의 창고조차 바닥을 드러냈다. 궁지에 몰린 송양은 어쩔 수 없이 고구려에 원조를 요청했다.
고구려의 신하들은 이 틈에 비류국을 점령해야 한다고 떠들었다.
주몽이 신하들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남의 불행을 이용해 이익을 취한다면 어찌 떳떳할 수 있겠는가. 비류국의 백성 역시 우리와 같은 조선의 후예다. 도리로 볼 때 돕는 것이 마땅하다.”
주몽은 곡식과 의복 등의 구호물자를 수레에 가득 실어 비류국에 보낸 후, 신하들을 이끌고 뒤를 따랐다.
비류국에 도착한 주몽은 곧바로 수해 현장으로 달려갔다. 수마(水魔)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농작물은 물론이고 변변한 집 한 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무심한 하늘은 연신 사나운 비를 뿌려 댔다.
주몽은 비류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산으로 올라갔다. 산봉우리에서 내려다보니 물길이 막힌 곳을 알 수 있었다. 산에서 내려온 주몽은 군사들을 시켜 땅을 파서 호수처럼 고인 물이 빠지도록 물길을 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민가의 지붕까지 찼던 물이 빠졌다. 그제야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가 봐도 믿기지 않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주몽은 데려간 군사들을 동원하여 무너진 집을 다시 세우고, 쓸려 간 농토를 일구었다. 수레에 싣고 간 곡식으로 밥을 짓고, 끌고 간 돼지와 소를 잡아 기진맥진한 비류국 백성을 배불리 먹였다. 이에 감격한 비류국 사람들은 주몽 대하기를 어버이 대하듯 했다.
송양도 주몽의 도량에 감복해서 말했다.
“소인이 불민하여 미처 천손을 몰라뵈었습니다. 이제 이 나라를 폐하께 바치려 하니 거두어 주십시오.”
비류국 왕은 홀가분하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예전의 약속을 지켰다.
주몽은 비류 땅에 다물도(多勿都)란 이름을 내렸다. 다시 찾은 옛 땅이란 뜻이었다. 그리고 송양을 다물후로 봉한 후 이곳을 식읍으로 하사한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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