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제국의 꽃’ [9]해주 청계동에서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연재소설

최문형 연재소설

미우라와 이토를 당장에 처단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1-16 14:02:24

시월이 익어가는 오후, 황해도 해주목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에 자리한 안태훈의 집 산채에는 두 집안의 부자가 술상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 집의 주인 안태훈과 아들 중근, 그리고 청년 김창수와 그의 부친 순영이었다. 중근과 창수는 또래 청년으로 중근은 17세, 창수는 20세였다.

집주인 안태훈은 해주에서 이름난 부자였다. 대대로 향리 집안이었는데 5대조 때 아들 4형제가 모두 무과에 급제하는 경사가 있었다. 그렇게 집안이 일어서면서 안태훈의 아버지 안인수는 통훈대부와 진해현감까지 지냈다. 안인수는 거부이기도 했다. 400석 토지의 자산가였으며 성공한 미곡상으로 단단한 부를 축적했다. 안태훈 또한 증광시에 급제한 진사였다.

“한 잔 드시지요. 김석사처럼 든든한 아들을 두신 형님이 참 부럽습니다.”

안인수가 잔을 권했다.

“무슨 말씀을요. 제가 진사 어른께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 창수를 거둬주시고 지켜주시는 은혜는 결초보은 해도 모자랍니다.”

잔을 받는 김순영의 손이 살짝 떨린다. 몇 년 전에는 뇌졸중으로 몸을 쓸 수 없었는데 아내의 지극한 정성으로 많이 회복되었다. 그의 집안은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 본관은 안동이다. 명문가였으나 방계조상인 김자점의 난 때 멸문의 화를 목전에 두고 11대 조상인 김대충이 해주로 피신해 몸을 숨겼다. 이후로 양반 신분으로 살 수는 없었고, 대대로 생계를 위해 군역전을 하고 지역 양반들의 학대에 시달리며 살았다.

“김석사도 한 잔 받으시게.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근심이 있으신가?”

창수는 두 손을 조아려 잔을 받았다. 키는 아주 크지만 이목구비는 아담한 단정한 외모다. 얼굴에는 어려서 마마를 앓은 자국이 있다. 그는 한 때 동학군을 호령한 접주였지만 은인 안태훈 앞에서는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진사어른, 대궐이야기를 들으셨지요? 미우라와 이토를 당장에 처단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창수가 울먹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아버님! 하늘을 이고 사는 이 땅의 백성이라면 이 수욕을 어찌 참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춘추대의에 따라 국모님의 원수를 갚아야 하옵니다.”

중근이 거들었다.

“게다가 요 며칠 전에는 놈들이 전하를 겁박해서 중전마마를 폐위하라고 까지 하였다지요.”

김순영의 말에 안태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허락하셨을 리가 없지요. 중전마마가 어떤 분입니까! 종묘사직을 빛낼 현숙한 분이지 않습니까. 작년 갑오년에도 왜놈들이 궁궐로 쳐들어가 주상 전하 내외를 가두어 협박하고는 왜당정부를 세워 개혁인가 뭣인가 하면서 침략질을 은폐했지요. 작년에 서울사람들이 피난을 가서 도성이 텅 비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현명하신 중전마마께서 러시아를 끌어들여 독일, 프랑스와 함께 힘을 모아 왜놈의 세력을 물리치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안태훈의 목소리에 울분이 가득했다.

“바로 그것입니다. 진사어른! 그래서 중전마마를 노린 겁니다. 전하께서는 왜군이 우리 땅에서 모두 철수하기를 원하셨지요. 왕실을 지키는 훈련대도 왜놈들이 훈련시킨 것이라 믿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중전께서 일을 당하시던 바로 그 날이 훈련대가 해산하기로 예정되었던 날이었습니다.”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필진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