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청주 
)
행인국은 동부여와 고구려 사이에 있는 작은 나라였다. 국왕 엽려는 오만방자한 자로 강국인 동부여 태자 대소와 가깝게 지내면서 이웃의 약소국을 업신여겼다. 걸핏하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가서 약탈을 자행한 탓에 주변국의 원성이 자자했다.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엽려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고구려가 점점 강성해지니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주몽을 시험해 볼 요량으로 군사를 동원했다.
행인국의 군사가 고구려 북쪽 국경을 넘어 약탈을 자행했다는 보고를 받은 주몽은 신하들을 소집했다.
“행인의 엽려가 우리 북변을 침입했다 하니 어쩌면 좋겠소?”
“이런 방자한 놈을 어찌 두고 보겠습니까. 당장 군사를 보내 그자의 목을 베어야 마땅합니다.”
분개한 오이가 나서자 재사가 만류한다.
“우선 사신을 보내 준절히 꾸짖으십시오. 그런 연후에도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그때 군사를 일으켜도 됩니다.”
이번에는 무골이 튀어나왔다.
“그래서야 폐하의 권위가 서겠습니까. 일벌백계하셔야 합니다. 이번 기회에 그동안 성장한 우리 군사의 무서운 힘을 만방에 보여 줘야 합니다.”
재사는 다시 손사래를 쳤다.
“동부여의 대소가 개입하면 전면전으로 치달을 수 있습니다.”
잠자코 있던 묵거마저 재사의 반대편에 섰다.
“금와왕께서 건재하신데 대소 태자가 어찌 마음대로 군사를 움직이겠소.”
신하들의 의견은 군사를 일으키는 쪽으로 기울었다. 주몽은 숙고 끝에 결정을 내렸다.
주몽은 손을 들어 오이에게 명한다.
“기병 2천을 거느리고 행인의 도성을 치시오.”
오이는 부장 부분노(扶芬奴)와 함께 행인국으로 호호탕탕 쳐들어갔다. 국경에 주둔한 행인군이 방심한 틈을 타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고구려 기병이 무섭게 달려들자 행인의 군사들은 전의를 상실하여 무기를 버리고 도망가기 바빴다. 고구려군은 기세를 몰아 곧장 행인국의 도성을 향해 달렸다.
고구려군이 도성 앞까지 다다르자 엽려는 급히 백성을 징발하려 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나서는 이가 없었다. 폭정에 지친 그들은 오히려 고구려군을 환영했다. 고구려왕이 백성을 제 몸처럼 아낀다는 소문이 퍼진 탓이었다.
엽려는 신하들을 불러 앞일을 의논했다. 항복하자는 의견과 끝까지 싸우자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도무지 결론이 나지 않자 잠자코 있던 장군 매로(梅老)가 나섰다.
“고구려군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이리 왈가왈부만 하고 있으면 되겠소!”
엽려가 매로를 보고 묻는다.
“장군의 생각은 어떠한가?”
“겁 없이 고구려를 공격한 것부터가 잘못입니다.”
모든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구려 변방을 공격한 게 엽려였다. 매로는 기회가 오자 국왕의 오만을 질타했다. 엽려의 안색이 더욱더 어두워졌다.
매로가 말을 이어갔다.
“고구려는 떠오르는 태양과 같은 나라입니다. 대항해 봤자 아까운 목숨만 잃게 될 겁니다. 살고자 한다면 성문을 열고 항복해야 합니다.”
“동부여에 사람을 보내 구원군을 요청하는 방법도 있지 않소.”
그에게 믿을 구석이라곤 대소 태자뿐이었다.
“대소에게 사람을 보내 봤자 구원군이 오지는 않을 겁니다. 금와왕이 고구려와의 전쟁을 허락할 리 없습니다.”
“내가 주몽, 그 애송이 녀석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단 말이오! 정녕 그대가 원하는 게 그런 거요?”
엽려가 치를 떨며 부르짖었다.
장내의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재상 부력(扶力)이 눈치를 보며 끼어들었다.
“매로 장군이 대소 태자의 영향력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일단 동부여에 원병을 요청하고, 따로 태자에게 사람을 보내 힘을 써 달라고 청해 보시죠. 그 사이 백성을 그러모아 총력을 다해 성을 지킨다면 얼마 동안은 적군을 막아낼 수 있을 겁니다.”
엽려는 화를 가라앉히고 말한다.
“날랜 자를 뽑아 동부여로 보내시오. 지금 성에 남은 군사가 얼마나 되오?”
“고작 천여 명뿐입니다. 하지만 너무 염려치 마십시오. 고구려군이 용맹하다고는 하나 수성전은 지키는 쪽이 절대 유리합니다.”
부력은 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국경에 나간 군사들은 어찌 되었소? 그들과 협공하면 고구려군을 제압할 수 있지 않겠소.”
국왕의 물음에 매로가 다시 튀어나왔다.
“이미 고구려군에게 패해 반수가 죽고, 나머지는 모두 투항했다 합니다. 헛된 희망은 버리시는 게 좋겠습니다.”
엽려의 분노가 드디어 폭발한다.
“내 지금껏 너에게 섭섭하게 한 적이 없거늘 어찌 사사건건 딴지를 건단 말이냐? 너를 먼저 베고, 고구려 놈들과 싸우겠다.”
엽려가 칼을 뽑아 들자 좌우의 신하들이 급히 나서서 말렸다.
“매로는 나라에 공이 많은 신하입니다. 게다가 적을 앞에 두고 장수를 베어서야 되겠습니까. 부디 고정하소서.”
부력까지 나서서 만류하자 엽려는 할 수 없이 칼을 거뒀다.
“내 고구려군을 물리친 후 너의 죄를 물을 것이다. 단단히 각오해라.”
매로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고는 궁궐을 빠져나갔다.
오이가 이끄는 고구려군이 행인국 도성에 다다랐다. 성이 견고하고 높아 공략하기 쉽지 않아 보였다. 오이가 대열 앞으로 나가 성을 향해 외쳤다.
“행인국 왕은 들어라! 당장 성문을 열고 항복하면 고구려를 침략한 죄는 묻지 않겠다!”
성안에서 대답 대신 수많은 화살이 날아왔다. 오이는 할 수 없이 군사를 물려야 했다.
고구려군은 십여 리쯤 물러나서 진을 쳤다. 오이는 장수들과 함께 작전 회의를 열었다.
“저들이 성문을 굳게 닫아 걸고 수비에만 집중한다면 우리 병력만으로는 단시일 내에 성을 함락시키기 어렵소. 무슨 뾰족한 수가 없겠소?”
부장 부분노가 계책을 내어놓는다.
“위장계를 쓰는 게 좋겠습니다. 내일 일제히 성을 공격하다가 못 이기는 척하고 군사를 물리면 저들은 안심할 겁니다. 이때, 투항한 행인국의 군사를 패잔병으로 위장시켜 성으로 들여보내는 겁니다. 이들이 한밤중에 기회를 보아 성문을 열어 주면 어렵지 않게 성안으로 진입할 수 있을 겁니다.”
기막힌 한 수였다. 오이는 투항한 군사 중 믿을 만한 자를 백 명 정도 선발해 은밀한 지시를 내렸다.
이튿날, 동이 트기 무섭게 고구려군은 성을 향해 돌진했다. 궁수가 활을 쏘아 엄호하는 사이 선봉대가 성벽에 사다리를 걸쳐 놓고 기어 올라갔다. 성안 군사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활을 쏘고, 끓는 물을 붓고, 돌을 던져 고구려군이 성벽에 오르는 걸 필사적으로 막았다.
고구려 군사가 쳐들어갔다가 다시 물러나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마침내 본영에서 후퇴를 알리는 징이 울렸다. 고구려군은 일제히 전투를 멈추고 허겁지겁 진영으로 돌아갔다.
성 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엽려는 금세 기가 살아나 고구려군을 비웃었다.
“용감무쌍하다고 소문난 고구려군도 별수 없구나.”
군민들은 한 시름 덜긴 했지만, 여전히 불안한 모습이었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 긴 그림자를 끌며 성으로 다가오는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어느새 성벽 아래 이르러 있었다. 성벽 위에 있던 군사 몇이 무리를 보며 아는 척을 했다. 그들은 고구려로 출정했던 행인국의 군사가 분명했다. 엽려는 아무 의심 없이 그들을 성안으로 들이게 했다. 군민들은 돌아온 군사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한밤중이었다. 묵직한 성문이 조용히 열렸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부분노가 딱따기를 쳐 신호를 보냈다. 성문 옆에 대기하고 있던 고구려군이 성안으로 밀려들었다. 자다 깬 행인국 군사들이 갑자기 들이닥친 고구려 군사를 당해낼 수 없었다. 잔뜩 겁을 먹었는지 병장기를 잡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엎드려 투항했다. 고구려 군사들이 행인국 왕을 포박하여 끌고 왔다. 오이 앞에 내동댕이쳐진 엽려는 살려만 달라고 애원했다.
오이는 왕을 뇌옥에 가두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모든 군사에게 명을 내려 약탈과 방화를 금지했다.
승전을 보고받은 주몽은 오이와 부분노의 전공을 높이 치하했다. 압송된 엽려는 꾸짖은 후, 멀리 쫓아 버렸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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