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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봄이었다. 부위염이 동해에서 잡은 고래를 왕에게 진상했다.
주몽은 신하들과 함께 고래 고기를 먹으면서 앞일을 의논했다.
“부위염이 북옥저를 다시 일으켜 세웠구려. 가을 추수가 끝나면 거병하려 했지만 앞당기는 게 좋겠소. 우리가 가야 할 말갈 땅이 겨울에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추우니까.”
주몽은 말갈 정벌을 위해 출병하겠다고 선언했다.
무골이 나선다.
“이번에는 소장도 꼭 데려가 주십시오. 도성 안에만 있으려니 좀이 쑤셔 죽겠습니다.”
무골이 조르자 주몽은 흔쾌히 허락했다. 전장에서 무골만큼 믿을 만한 장수도 없었다.
주몽이 군사를 이끌고 북옥저에 닿으니 백성이 마중을 나와 환호했다. 말갈족 때문에 전전긍긍하던 시절을 떠올리면 주몽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샘솟는 듯했다.
주몽은 마중 나온 부위염을 자신의 수레에 태웠다. 함께 가면서 그간의 경과를 듣기 위함이었다.
“지금은 말갈족이 우리의 위용에 겁을 먹고 잠잠하지만 언제든 틈이 보이면 다시 쳐내려올 겁니다.”
“그래서 그 화근을 뽑으려 한다. 이번에는 대군을 움직여 말갈의 본거지를 치겠다.”
“그럴 때를 대비해 귀화한 말갈인들에게서 본거지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 두었습니다.”
“말갈의 본거지까지는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천여 리는 족히 됩니다. 험한 산을 넘어야 하니 말로 달려도 5~6일은 족히 걸립니다.”
보병까지 포함해 전군이 움직인다면 열흘에서 보름은 잡아야 했다.
주몽이 정청 앞에 도착하자 병사들이 사열을 시작했다. 대오가 정연하고, 동작에 절도가 있는 게 고구려의 병사로서 손색이 없었다. 이들과 함께라면 어떤 적을 만나든 승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디어 주몽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출정했다. 이들은 두만강을 넘어 말갈족의 근거지로 진격했다. 엄선해서 뽑은 귀화한 말갈인이 길잡이를 했기 때문에 지체하지 않고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었다.
고구려군이 쳐들어온다는 첩보를 받은 말갈족은 우왕좌왕했다. 무작정 쳐들어가 약탈할 줄만 알았지, 본격적인 전쟁을 치러 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추장끼리도 의견이 분분했다. 싸우자는 쪽과 항복하자는 쪽의 의견이 팽팽한 가운데, 도망치자는 자까지 나왔다.
결론이 나지 않자 말갈 추장 하나가 타하루에게 물었다. 타하루는 형세가 불리해지자 북옥저에서 도망쳐 말갈족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고구려 왕은 어떤 자요?”
“그는 본디 동부여의 왕자로 십수 년 전에 졸본에 내려와 고구려를 건국했소. 그 후 비류국·행인국을 차례로 정복했고, 북옥저와 같이 약한 나라는 싸워 보지도 않고 귀부했소. 주몽왕은 화살 한 대로 세 마리의 새를 꿸 수 있는 신궁이라 하오.”
타하루의 얘기에 무리의 의견이 항복하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주몽왕은 사람이 어질다 하더이다. 귀순한 말갈인을 고구려 백성과 다름없이 대접한다고 하오. 살길이 있는데 굳이 피를 흘릴 필요가 있겠소. 고구려에 복속합시다.”
여기저기서 술렁거렸다. 이때 젊은 추장 하나가 나섰다. 그의 이름은 만리하치(万里下治)라 했다.
“고구려군이 강하다고는 하나 초원에서의 전투는 우리 말갈족을 따르지 못하오. 숫자로 보아도 우리가 그들에 비해 배는 더 많소. 그런데 한번 싸워 보지도 않고 항복한다면 두고두고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거요.”
그의 말엔 설득력이 있었다. 추장들은 격론 끝에 싸우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만리하치의 열변에 넘어간 추장들이 고구려군과 일전을 펼치기로 했지만 정작 말갈족 전사들은 싸울 마음이 없었다. 마을을 노략질하면 재물과 식량에 노비까지 생기지만 전쟁에 이겨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생기는 것도 없이 목숨을 잃을 위험이 큰 싸움에 뛰어드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고구려군이 대오를 갖추고 눈앞에 나타나자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거나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말갈인이 속출했다. 주몽은 이들을 위로하고 고구려군에 편입시켜 후방에서 지원하게 했다.
그러다 보니 고구려군이 책성(柵城) 인근에 도착했을 때는 말갈족의 전력이 절반 넘게 줄어들었다.
만리하치는 그런 전황을 전해 들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휘하의 기병으로 하여금 초원에 진용을 갖춰 포진하게 하고 고구려군을 기다렸다. 멀리서 고구려군의 모습이 보였다. 말갈 전사들은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전의를 불살랐다. 그 위세에 고구려군도 적지 않게 당황했다.
주몽은 장수들을 불러 이른다.
“적이 비록 수는 적으나 기세가 남다르다. 수적 우위만 믿고 방심해서는 안 될 것이다. 부분노 장군은 장창병을 이끌고 나가 말갈의 기마병이 전진하지 못하게 막아라. 그들의 발이 묶이면 마리 장군은 후위의 궁수부대를 거느리고 앞으로 나아가서 적진 한가운데로 화살을 날려라. 화살촉은 빼놓도록 해라. 말갈군의 대오가 흐트러지면 짐이 기병을 이끌고 나가 그들을 북쪽 산으로 몰아갈 것이다. 무골 장군은 3천의 군사를 이끌고 산속에 매복하고 있다가 적군이 나타나면 포위 공격하라. 투항하는 자는 절대 죽이지 마라.”
마리가 의아한 듯 묻는다.
“화살촉을 빼라는 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들도 우리와 같은 조선의 사람들이다. 되도록 목숨을 빼앗지 않고 승리할 수 있다면 좋지 않겠는가.”
마리는 그제야 이해가 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구려 진영에서 개전을 알리는 북이 울렸다. 함성과 함께 장창병이 앞으로 나섰다. 그 뒤로 궁수가 따랐다. 언제든 화살을 날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말갈군은 고구려군의 진세(陣勢)를 본 후 기가 꺾였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긴 창은 상대에게 압박감을 줄 만했다. 장창은 기동력으로 싸우는 말갈 기마병에게는 치명적이다. 북소리에 맞춰 전진하던 고구려군이 말갈군의 본진에서 이백 보쯤 떨어진 지점에서 멈춰 섰다.
부분노가 창병을 헤치고 앞으로 나왔다.
“나는 고구려 장군 부분노다. 말갈인은 고구려인과 다르지 않다. 투항하면 절대 죽이지 않겠다.”
말갈 전사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항복만 받아 준다면 굳이 싸울 이유가 없었다. 고구려인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창과 칼을 버렸다.
만리하치가 놀라서 말갈군을 향해 소리쳤다.
“저들에게 속지 마라! 항복하면 죽은 목숨이다!”
만리하치는 전열을 가다듬고 본격적인 공격에 나섰다. 말갈의 기마병이 정면으로 부딪쳐 오자 부분노는 장창병에게 명을 내렸다. 병사들이 장창의 밑동을 땅에 박고, 정면을 향해 기울였다. 마치 고슴도치가 가시를 한껏 세운 듯한 모양이 되었다.
달려들던 말갈 기마병이 이를 보고 매우 놀라 말을 멈춰 세웠다. 흥분한 말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땅을 차며 서성였다. 말갈군이 어쩔 줄을 모르고 있을 때 마리가 이끄는 궁수대가 앞으로 나섰다. 날아오른 화살이 시꺼멓게 하늘을 뒤덮었다. 말갈 진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피하려 했지만 그럴 새가 없었다. 화살이 몸 위로 떨어질 때만 해도 이젠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살이 몸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놀라서 살펴보니 화살에 촉이 없었다.
화살 공격이 멈추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기병이 좌우에서 밀어닥쳤다. 이미 반쯤 얼이 빠진 말갈군은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항복하거나 도망쳤다. 만리하치가 동분서주하며 전사들을 독려했지만 이미 대세는 판가름 났다. 말갈군들은 줄행랑치기 바빴다.
만리하치는 끝까지 맞서 싸웠지만 몰아치는 고구려 군사들의 공격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는 기병 수백 기만 거느리고 북쪽 산 방향으로 후퇴했다. 고구려군이 뒤를 쫓았다. 도망을 치다 보니 어느새 백여 리를 훌쩍 달려 북쪽 산기슭에 이르렀다. 뒤에는 고구려군이 보이지 않았다.
만리하치는 그 자리에 진을 치고, 뒤따라올 말갈 전사들을 기다렸다. 어두워질 때까지 합류한 병력은 고작 1천여 명에 불과했다.
만리하치가 패전의 아픔을 곱씹고 있을 때 타하루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고구려와의 일전을 주장한 만리하치를 따르고 있었다.
만리하치가 타하루를 바라보며 물었다.
“고구려군이 화살촉이 없는 화살을 쏜 이유가 뭐겠소?”
“상대를 회유하려는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항복하면 살려 준다는 뜻이오?”
추장의 마음이 흔들리는 듯하자 타하루는 경계심이 발동했다.
“그거야 알 수 없지요. 아무리 고구려왕이 관용을 베풀 뜻이 있다 해도 군사들의 뜻을 무시하지는 못할 겁니다. 고구려군 중 상당수는 북옥저 출신으로 말갈에 대한 원한이 깊습니다. 일단 북쪽 삼림 지대로 몸을 피했다가 후일을 도모하는 게 좋겠습니다.”
북옥저 출신의 타하루는 은근히 걱정했다. 이대로 만리하치가 항복한다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북옥저로 끌려가면 어떤 처분이 내려질지 불 보듯 뻔했다.
밤이 깊을수록 두 사람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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