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섬 오페라하우스’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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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식의 청담유감(有感)

‘노들섬 오페라하우스’를 위하여

서울 랜드마크로 최적지인데 ‘죽은 땅’ 방치
K컬처로 달라진 문화인식에 맞게 재추진을
프랑스 등 예시로 국익 위해 필수적인 과제

홍찬식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1-18 09:53:28

한강에 있는 노들섬에 다녀왔다. 면적 3만6000평의 작지 않은 땅. 섬의 외곽 산책로를 여유롭게 한 바퀴 돌았다. 여의도의 빌딩 숲과 이촌동, 흑석동, 멀리 반포까지 시야에 들어왔다. ‘한강 결빙 관측 지점’이라는 표석도 보인다. 서울 지도를 놓고 보면 노들섬은 거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는데, 밖에서 보는 것과는 또 다르게 훌륭한 입지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외곽 산책로에서 섬 위쪽으로 올라가 보니 공연과 전시를 위한 낮은 건물들이 있었다. 박원순 전임 시장이 만들었다는 시설이다. 내부는 텅 비었고 인적은 없었다. 그 사이에 서울시장이 바뀐 탓도 있겠지만 한강에서도 ‘최고의 자리’가 ‘죽은 땅’이 되어버린 극심한 부조화가 당혹스러웠다.

한강의 가치를 누구보다 높게 평가한 사람이 2016년 작고한 김석철 씨다. 그는 건축가이기 이전에, 스케일 큰 도시계획가였다. 여의도 도시설계와 한강마스터플랜 등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시공을 넘나들며 대한민국과 도시의 미래에 대해 설파하는 그를 보면 넓은 시야와 통찰이 놀랍고 부러웠다.

그에게 한국에서 가장 유망한 지역이 어디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조금 짓궂고 약간의 ‘속물적’ 의도도 들어간 질문이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한강과 서해가 만나는 곳이라고 답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김포나 강화도 일대였다. 지금은 한반도 분단으로 막혀 있다시피 되어 있지만 통일이 되면 남북한을 동시에 아우를 수 있는 김포와 개성 사이가 행정수도의 최적지라고 했다. 김포에서 한강을 건너면 바로 개성이다. 그는 강과 바다가 만나는 입지에 있는 뉴욕과 상하이 사례를 비유하기도 했다.

김석철 씨 말고도 한강과 그 중심의 노들섬을 중요하게 바라본 사람들은 많았다. 노들섬의 역사성은 옛 기록에 다수 나와 있다. 한강 최고의 석양 조망 장소,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 능에 갈 때 건넜던 곳, 영조의 군대 사열 장소 등이 그것이다.

현대에 들어서는 2008년 건국6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구상한 ‘국가상징거리’가 있었다. 광화문과 남대문, 용산을 거쳐 한강까지 이어지는 큰길을 워싱턴DC의 내셔널 몰이나 파리의 그랑프로제처럼 만들자는 아이디어였다. 광화문이 거리의 시작점이라면 노들섬은 종착점이었다. 계획 자체는 흐지부지됐으나 광화문광장, 서울광장, 용산공원, 국립중앙박물관 등이 들어서면서 서서히 현실화되어가는 과정에 있다. 국가상징거리 문제를 떠나 서울에서 랜드마크를 세우기 위한 자리로 노들섬 만한 곳이 없다는 것은 전문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노들섬 활용 계획은 이명박 서울시장 때 처음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조순 시장 시절인 1997년에도 이곳에 문화예술 공간을 세운다는 방침이 정해진 바 있다. 이명박·오세훈 시장을 거치면서 ‘오페라하우스’라는 그림이 그려졌다가 박원순 시장 때인 2012년 ‘텃밭’으로 바뀐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박 시장이 생각을 바꿔 2019년 만든 현재의 문화시설은 박 시장 스스로 실패를 인정한 꼴이었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복귀로 노들섬의 미래는 다시 전환점을 맞았다. 오 시장은 노들섬을 ‘아픈 손가락’이라고 했다. 오페라하우스가 무산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일 것이다.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오 시장이 소속된 국민의 힘은 서울시의회 다수당이 됐다. 올해는 강한 추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서울시장 임기 초반이어서 노들섬 계획 실현을 위해서는 최적의 시기다.

하지만 오 시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꽤 많은 서울시의 과제들을 거론하면서도 노들섬 얘기는 빼놓았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깜짝 놀랄 만한 변화가 있을 것” “글로벌예술섬을 만들겠다”며 추진 의지를 내비쳤는데 의아스럽다. 이유는 둘 중 하나다. 더 야심 찬 계획을 준비 중이거나, 아니면 과거의 트라우마로 머뭇거리고 있거나.

2010년대 초 노들섬에 오페라하우스를 만드는데 필요한 예산은 6000억 원 정도였다. 당시 민주당은 오세훈의 오페라하우스를 ‘부유층의 전유물’로 몰아세웠다. 부자들이나 찾는 오페라극장에 왜 막대한 시민 세금을 쓰느냐는 주장이었다. ‘전시성 토건 사업’이라는 꼬리표도 붙였다. 이 늪에 잘못 끌려 들어갔다가는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 10년이 경과한 지금은 훨씬 많은 돈이 들 것이다. 오페라하우스를 재추진하게 되면 상대방은 같은 프레임으로 공격할 게 뻔하다.

하지만 그 사이 세상이 달라졌다. K-컬처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무엇보다 국민들 사이에 문화인식이 변했다.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오페라를 공연하고 있으나 누구도 이곳을 ‘부자들의 놀이터’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입장권 한 장이 10만 원을 훌쩍 넘는 뮤지컬에 광클릭을 해서 맨 앞자리를 선점하는 관객들은 대개 20,30대 직장인이다. 오페라하우스라고 해도 다른 예술 장르에도 얼마든지 열려 있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명물인 오페라하우스를 덴마크 해운기업인 머스크가 건립해 기증한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프랑스의 첫 좌파 대통령인 미테랑은 1980년대 오르셰미술관, 바스티유오페라극장 등을 지은 업적만으로 지금까지 평가받고 있다. 해외 관광객 유치와 프랑스의 국가이미지 구축에 큰 힘을 보태고 있는 문화인프라다. 당시 프랑스 좌파들은 그 돈으로 서민주택이나 빨리 지으라고 야유를 보냈었다. 그 시대에 꼭 필요한 일을 하는 게 지도자의 역할이다. 노들섬 활성화 계획은 서울과 한강의 부가가치 확대라는 국익을 위해 필수적인 과제다.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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