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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주몽은 모든 신하를 불러 모았다. 태자 책봉 문제를 의논하기 위함이었다. 주몽은 왕후인 소서노와의 사이에 비류와 온조 두 왕자를 두고 있었다. 다들 둘 중 하나가 왕위를 이을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유리라는 강력한 대항마가 나타난 것이다. 소서노로서는 열불이 날 만한 일이 아닌가.
동부여 출신인 오이가 강력히 주장했다.
“예 씨 부인이 폐하의 정실이므로, 그 소생인 유리는 당연히 적장자가 됩니다. 게다가 지난날 후계자로 삼겠다는 약조까지 하지 않으셨습니까. 마땅히 유리가 태자가 돼야 합니다.”
이에 외척인 소노가의 수장 소노리가 맞받아쳤다.
“선왕께서 폐하께 나라를 양위하신 뜻을 잊지 마십시오. 소서노 왕후님은 현재 폐하의 유일무이한 정실이십니다. 그 소생인 비류와 온조, 두 왕자를 외면하려 하십니까? 근 이십 년 만에 처음 본 자식을 어찌 믿고 나라를 맡긴다는 말입니까!”
태사 을음도 왕에게 하소연한다.
“폐하께서 소신에게 비류와 온조 두 왕자의 교육을 맡기시면서 훌륭한 군왕(君王)으로 키우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저 역시 두 분이 왕재(王才)라 여겼기에 신명을 다해 모셨습니다.”
신하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치했기에 주몽은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고민이 길어지니 머리가 아팠다.
주몽은 정사를 일찍 파하고 예 씨 부인의 처소를 찾았다. 술을 청해 연거푸 석 잔을 비우고는 침상에 벌렁 누웠다. 예 씨는 근심스러운 얼굴로 침상에 걸터앉아 왕을 바라보았다. 태자 책봉 때문에 조정이 시끄러워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주몽이 벌떡 일어나더니 예 씨 부인을 침상에 쓰러뜨렸다. 예 씨는 못 이기는 척하고 누웠다. 주몽의 손이 저고리 고름에 닿았다.
예 씨는 주몽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오늘도 결론을 내지 못하셨습니까?”
“내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주몽은 거칠게 예 씨 부인의 옷고름을 풀었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대답을 회피하자 예 씨는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이참에 다짐을 받아두지 않으면 유리의 신세가 처량해질 것 같았다.
예 씨는 주몽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나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지난 세월 동안 당신은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어 즐거운 나날을 보냈겠지만, 저는 부여에 남아 대소의 감시를 받으며 아비 없는 자식을 키웠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자식들이 고귀한 신분으로 대우받을 때, 저와 유리는 대소가 우리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당신들이 호화로운 궁궐에서 호의호식할 때 저는 친정에서마저 쫓겨나 남의 집 허드렛일로 연명하며 혼자서 유리를 키워야 했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게 자그마치 20년입니다. 이팔청춘 꽃 같았던 처녀가 당신을 만나 과부 아닌 과부로 아까운 청춘을 보내고 지금은 반백이 되었습니다.”
예 씨는 설움이 복받치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까 봐 울음을 참아 내고 있었다.
예 씨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옷소매로 훔쳐 내고 냉정을 되찾았다.
“내 지금껏 구차한 목숨을 연명해 온 것은 오직 유리 때문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우리 아이가 상처받는 건 볼 수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으면 말씀하세요. 우리 모자는 조용히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부인의 구구절절한 얘기를 듣고 나니 주몽은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동안 모자가 감당했을 모진 풍파를 생각하니 남편으로서, 아비로서 죄책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소서노와 두 아들을 내칠 수도 없었다. 연타발의 지원이 없었다면 지금의 고구려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어느 쪽이든 결정을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형제 간에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고민이 깊어지자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주몽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바닥에 뒹굴었다. 얼굴이 하얘지다가 파래졌다. 그 모습을 보고 예 씨는 가슴이 철렁했다. 자신이 너무 다그쳐서 그런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예 씨가 온몸을 주무르고 찬 수건으로 닦아 주자 증상이 조금씩 완화되더니 정신이 돌아왔다. 부인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주몽을 원망스럽게 쳐다봤다.
며칠 후 주몽은 재사와 묵거를 침전으로 불렀다. 태자 책봉에 관한 둘의 의견을 들어보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았기에 나라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이 이리 복잡해질 줄은 몰랐소. 어찌하면 좋겠소?”
한참을 생각하던 재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소신의 생각으로는 유리 왕자를 태자로 책봉하는 게 옳습니다. 그는 두 왕자보다 나이가 많고, 그간의 사정을 잘 알기에 두 동생을 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류나 온조 왕자가 태자로 낙점된다면 유리 왕자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유리가 태자가 되면 비류와 온조가 가만히 있겠소. 특히 온조는 자부심이 강하고 지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 아니오.”
주몽은 아들들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재사가 대답을 못 하자 왕의 마음은 더욱 심란해졌다.
주몽은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묵거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찌 아무 말도 없으시오?”
“소신이 보기에는 세 분 왕자 모두 군왕의 기운을 갖고 태어나셨습니다. 누가 되든 이 나라에는 홍복일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것이오?”
묵거가 자꾸 뜸을 들이니 주몽은 안달이 났다.
“서로 무예를 겨루게 해서 이기는 쪽에게 태자 자리를 주는 겁니다.”
고구려는 무(武)를 숭상하는 나라였다. 탁월한 무예 실력을 보여 준다면 누구도 감히 반발하지 못할 것이었다.
주몽으로서는 양쪽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아도 되니 공정한 방법이었다. 재사도 묵거의 의견에 흔쾌히 동의했다.
주몽은 즉시 세 왕자와 모든 신하를 불러들였다. 모두가 모이자 주몽은 세 아들에게 일렀다.
“무예 시합을 열어 가장 뛰어난 기량을 보이는 왕자에게 내 자리를 물려주겠다. 다들 성심을 다하도록 해라.”
세 왕자는 모두 무예에 일가견이 있다 자부했기에 부왕의 뜻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세 왕자는 왕과 대신들이 참관하는 가운데 연무장에 섰다. 먼저 금팔찌를 버드나무 가지에 묶어 놓고 백 보 밖에서 활을 쏘는 대결이었다. 화살이 흔들리는 팔찌의 동그라미 안을 통과해야 합격이었다. 세 왕자에게는 어렵지 않은 과제였다. 차례로 쏜 화살이 모두 동그라미를 관통했다.
두 번째로는 세 마리 비둘기를 화살 한 대로 꿰는 대결이었다. 누구 하나 실수 없이 비둘기 세 마리를 꼬치처럼 꿰었다. 신기에 가까운 솜씨에 군신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새어 나왔다.
활쏘기로 결판이 안 나자 칼솜씨를 겨루기로 했다. 연무장에 12개의 나무 기둥을 일 보 간격으로 줄지어 세워 두고 말을 달리며 하나씩 차례로 베는 고난도의 시험이었다.
유리가 먼저 말을 타고 질풍같이 달려 나갔다. 이번 과제는 말을 달리는 속도와 칼을 휘두르는 각도가 절묘하게 어우러져야 성공할 수 있었다. 칼을 휘두르자 섬광이 번쩍하면서 나무 기둥이 차례로 하나씩, 12개 전부 베였다. 이어서 비류가 나섰다. 12개 중 9개에 성공했다. 온조는 11개를 벴다. 이로써 승부는 갈렸다. 유리가 무예 시합에서 당당히 우승한 것이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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