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단과 팬 믿음에 화답한 아스널의 고공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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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벵거 이후 혼돈의 시간 극복
아무도 예상 못 한 EPL 선두 질주 중
젊은 감독 아르테타의 내 탓 리더십

박병헌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1-18 09:48:42

지난해 9월 출범 30년을 맞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는 유럽 축구의 심장이라고 할 만하다. EPL의 독보적 위상은 지난여름 2022~23시즌 이적시장의 지출 규모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EPL 20개 구단이 여름 이적시장에서 선수 영입을 위해 쏟아부은 이적료는 약 19억 파운드, 한화로 무려 3조 원이 넘는다고 한다.

유럽 프로 축구는 EPL이 주도한다

이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이탈리아 세리에A, 독일 분데스리가의 모든 구단이 쓴 이적료를 합한 액수보다도 많고, 두 번째로 많은 이적료를 쓴 세리에A 전체의 약 3배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다. EPL 구단은 좋은 선수 영입을 위해서라면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EPL은 해가 갈수록 유럽과 남미 등 세계 각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최고 수준의 선수와 유망주들을 마구 끌어오고 있다. 지금 추세라면 EPL의 위상은 더욱 압도적으로 강화되고 공고해질 것이다. 비록 유럽 클럽 축구 국가대항전에서 스페인의 프리메라리가, 독일의 분데스리가 등에 비해 경기력에서는 뒤질지 모르겠지만 관중 동원 능력이나 흥행면에서는 가히 최고라고 할 만하다. 좋은 선수가 영입되면서 관중은 당연히 경기장을 찾기 마련이고, TV 중계권료가 인상되는 등 선순환 구도를 이루는 게 현재의 EPL이다.

UCL 밟아 본 지가 벌써 6년 넘어

비교적 잘사는 지역인 영국의 북런던을 연고로 하는 EPL의 강자 아스널 FC는 팬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구단이다. 축구 종가인 잉글랜드의 자존심이라고 불리며 최근 오랜 슬럼프를 벗어나 강자다운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아스널은 EPL 4위까지의 팀에게 주어지는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UCL) 티켓을 잡아 본 지도 오래다. ‘별들의 전쟁’이라는 UCL의 단골손님이던 아스널이 UCL을 밟아본 지가 벌써 6년이 넘었다.

프랑스 출신으로 ‘그라운드의 프로페서’라고 불린 경제학 박사 출신의 아르센 벵거가 20년 넘게 잡은 지휘봉을 내려 놓은 뒤 UCL의 문이 닫혔다. EPL에서 리그 4위와 5위는 비록 한 단계 차이지만 혜택은 천양지차다. 4위 안에 들어 ‘꿈의 무대’라고 불리는 UCL에 출전하면 수백억 원에 달하는 출전비를 지원받기 때문이다.

벵거 감독이 지휘하던 시절이 아스널의 전성기였다. 아스널은 세계 축구의 변방 중에 변방인 일본 프로축구 J리그 나고야 그램퍼스에서 은둔 중이던 벵거 감독을 최초의 외국인 감독으로 전격 영입해 지휘봉을 맡겼다. 벵거는 네덜란드 출신의 마르크 오버르마르스를 800만 파운드에 영입해서 FC 바르셀로나에 3200만 파운드에 팔았고, 프랑스 출신의 니콜라 아넬카를 50만 파운드에 영입해 2230만 파운드에 레알 마드리드 CF에 이적시키는 등 유망주 육성 정책으로 이름을 날렸다. 게다가 유벤투스의 벤치에서 무능한 공격수라 평가 받던 티에리 앙리를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 키운 주인공이 바로 벵거 감독이었다. 2018년 5월 벵거가 떠난 뒤 아스널이 혼돈의 시간을 극복하고자 영입한 인물이 30대의 미켈 아르테타 감독이었다.

30대의 아르테타에게 지휘봉 맡겨

스페인 출신의 아르테타가 아스널에서 선수로 은퇴한 지 3년 만에 사령탑에 오른 것은 파격 그 자체였다. 선수 시절 훌륭한 기량을 갖고 있음에도 로망이던 바르셀로나와 스페인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한 번도 입지 못한 불운을 겪은 아르테타에게는 한이 남아 있다. 세계 축구 정상에 올라 그 한을 풀 기회가 명문클럽 아스널의 감독 자리다.

아르테타는 2019년 12월 아스널에 부임했지만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다른 팀 같았으면 이미 감독이 경질되고도 남았을 일이다. EPL의 명문인 첼시와 손흥민이 속한 토트넘 훗스퍼 등이 성적 부진을 이유로 그간 사령탑을 몇 차례 내친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일단 맡겼으면 끝까지 믿는 경영 철학

아르테타가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음에도 3년 넘도록 롱런할 수 있게 된 데에는 ‘믿지 못하면 아예 맡기지 말고, 일단 맡겼으면 끝까지 믿는다’는 구단의 경영 철학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의인부용 용인물의(擬人不用用人勿疑)라는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인재 경영’과도 상통한다고나 할까. 올해 불혹의 40세인 아르테타는 성적이 좋으면 선수들 덕분, 패했을 때는 내탓으로 돌리는 리더십을 발휘하며 선수들의 투지를 자극하고 있다고 한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지도자의 소통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아스널은 EPL에서 부동의 선두주자(15승2무1패.승점 47)로 질주 중이다. 2위인 갑부구단 맨체스터 시티와는 무려 승점 8점 차이다. 16일엔 원정경기에서 북런던의 라이벌인 토트넘마저 꺾었다. 20대 초·중반의 영건들로 구성된 아스널이 쾌속 질주를 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 못 했다. 비결은 구단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한 특유의 리더십으로 선수단을 탄탄한 조직력으로 묶은 아르테타의 능력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아직 시즌 중반이지만 19년 만에 우승을 넘보려는 아스널의 기세는 무섭다. 아르테타 감독이 그간의 부진에도 침묵을 지켰던 구단과 팬들에게 과연 리그 우승으로 화답할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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