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제국의 꽃’ [17] 군사작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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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군사작전 지역이니 즉시 이곳을 떠나줄 것을 요청합니다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1-30 11:42:19

헐버트 선생과 아펜젤러 목사는 권총을 쥐고서 밤새 자지 않았다. 잘 수 없었다는 게 맞다.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선량한 조선의 백성들과 인자한 국왕, 총명하고 사려 깊은 왕비와 함께였다. 새벽햇살이 비칠 무렵 인기척이 났다. 국왕이 깨어난 것이다.

“전하, 잘 주무신 겁니까?”

“헐버트 선생, 줄곧 깨어 있었나요? 나는 두 분 덕분에 좀 잤습니다. 중전은 지금 어디 있을까요? 어제 나와 헤어질 때 했던 말이 들리는 듯 합니다.”

“왕비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아펜젤러 목사가 물었다.

“‘전하, 종묘사직을 지키십시오!’ 이 말이었지요. 의화군이 와서 중전에게 피신하자고 했어요. 허나 중전은 연로하신 대왕대비마마를 남겨두고 갈 수 없다고 했지요. 그 때 내가 강제로라도 내보냈어야 했어요. 헐버트 선생! 지어미 하나 지키지 못한 사내가 나라는 어찌 지킬 수 있겠소?”

두 사람은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동지이자 연인인 아내를 잃고 새벽이슬에 젖은 새처럼 떨고 있는 남자에게 어떤 위로를 할 수 있겠는가.

그 시간 러시아공사 베베르는 을미왜변의 목격자 사바틴을 마주하고 있었다. 건축가 사바틴은 퀭한 눈에 부스스한 모습으로 베베르를 찾았다. 손에는 커다란 종이 한 장을 들고서.

“그건 뭔가?”

베베르의 물음에 사바틴은 조심스레 종이를 탁자 위에 놓았다. 도면이 그려진 종이였다. 건청궁 내부 구조와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그린 종이였다.

“임무를 다하지 못해 송구합니다. 제가 할 수 있었던 건 이것뿐이었습니다.”

사바틴이 침울하게 말했다. 베베르가 종이를 들어 살폈다.

“알렌공사한테 이야기를 들었네. 다이장군조차도 속수무책이었는데 자네가 뭘 할 수 있었겠나?”

“이 그림도 일본군에게 뺏길 뻔 했습니다. 우리도 폭행을 당했구요.”

“저런! 자네는 왕비가 살해되는 걸 직접 보았나?”

“그렇습니다. 참혹한 장면이 자꾸 떠올라서 정신이 돌아버릴 것 같습니다.”

“흠,... 일본인들이 야만적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베베르가 탁자 위에 손가락을 올리고 굽혔다 폈다 했다. 분노를 삭일 때 하는 버릇이다.

“그런데, 희한한 말을 들었습니다. 일본 외교관으로 보이는 자가 저를 내쫓으려고 협박하면서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데? 어서 말해 보게.”

“‘여기는 군사작전 지역이니 즉시 이곳을 떠나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런 말이었습니다.”

“군사작전 지역이라? 그래서 어찌 했나?”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여기는 군사작전 지역이라서 매우 위험하고, 우리 정부에서 허락하지 않은 외국인은 그 누구라도 이곳에 있을 수 없다’ 고 했습니다.”

“흠,... 그래서?”

“‘우리 정부’가 대체 어느 나라 정부냐고 했더니 ‘일본 정부’라고 하더군요. 제가 ‘여기는 조선의 궁궐이니 일본 정부가 그런 명령을 내리는 건 국제법상 어긋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다이장군과 저는 일본군이 지키고 있는 건청궁 안에 그대로 머물면서 그 끔찍한 장면을 모두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라도 증인이 되어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놈들이 조선을 집어 삼키려고 한 짓이 분명하군.”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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