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제국의 꽃’ [18] 지난 겨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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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도 미국처럼 자유롭고 힘이 있으며 또 행복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1-31 09:20:12

“우리는 전장을 방문했는데 그곳은 온통 중국군의 시체로 뒤덮여 있었오. 아직 묻지 않은 시체도 있었고 나머지는 고작 몇 인치 두께의 흙으로만 덮여 있었다오. 악취가 지독한 가운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상이었오.... 평양은 거의 죽은 도시 같구려. 한국인들이 막 돌아오기 시작했소. 그들 모두가 이곳에서 우리를 발견하고 기뻐하고 있으며 우리는 사역에 큰 결과를 기대하고 있다오,...”

1894년 10월 8일에 로제타에게 보낸 윌리엄 홀의 마지막 편지였다. 로제타는 닳은 편지지에 볼을 대었다. 윌리엄 홀은 청일전쟁이 끝난 평양을 떠나 서울에 오는 도중 발진티프스에 걸렸고, 11월 17일 겨우 서울에 도착했지만 일주일 후 소천했다.

“맘! 뭐하세요?”

문을 훽 열어젖히고 들어오는 보민의 음성에 로제타는 고개를 들었다.

“엄마, 또 그 편지,... 우는 거 아녜요, 또?”

“아니야. 엄마 괜찮아, 보민. 오늘 학교에선 어땠니?”

“엄마, 저요, 학교에서 자랑 많이 했어요. 지난 겨울에 우리 궐에 가서 스케이트 탔잖아요?”

보민은 들떠 있었다. 작은 몸을 폴짝거리며 이야기했다. 기분 좋을 때 보민의 버릇이다.

“그랬었지.”

“국왕전하와 왕비마마와 다른 선교사님 가족들이 함께요. 그 얘기 하니까 다들 부러워했어요.”

로제타 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을 묻고 겨울이 깊어갔고 강물이 얼 듯 로제타의 마음도 식어가고 굳어갔다. 그 때 릴리아스 선생의 초대가 있었다. 국왕 부처가 선교사들을 초대했다는 것이다. 로제타 선생은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릴리아스 선생이 강권하여 함께했다. 세심한 국왕은 스케이트란 게 어떻게 생겼는지 미리 물었고 기술자를 불러 만들게 했다.

일행이 궐에 도착하니 여자·남자·아이들의 발 사이즈에 맞추어 스케이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건청궁 앞 향원정 연지에 스케이트 무대가 갖춰졌다. 내관과 궁인들을 대동한 국왕부처는 외국인들이 겨울을 즐기는 것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랬었구나. 보민. 넌 그 때 엉덩방아를 많이 찧었지. 잡아주기도 전에 네가 오뚜기처럼 일어나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웠던지,...”

“엄마, 생각나요? 궁궐에서의 지난 크리스마스요!”

보민이 공중 제비돌기를 했다.

“그럼, 생각나고말고. 릴리아스 선생님과 트리를 장식하러 갔었지.”

로제타 선생은 가까이에서 왕비와 시간을 보냈다. 왕비는 호박 단추를 채운 노란 비단 저고리에 푸른 비단치마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말아올려 보석이 박힌 금비녀로 고정했다. 장식이라곤 비단술 달린 금세공 장신구를 허리에 찬 것이 전부였다. 왕비는 단순하고 세련되게 자신을 꾸몄다. 그것은 창백하고 가냘픈 얼굴과 조화되었다.

평소 왕비에게서는 지성과 힘이 느껴졌는데 이야기를 시작하면 순수함과 쾌활함과 기지가 돋보였다. 릴리아스와 로제타 선생이 트리를 꾸미는 동안 왕비는 성탄절에 대해 묻고 또 미국에 대해서도 많은 질문을 했다. 이야기를 듣고는 이렇게 말했다.

“아! 조선도 미국처럼 자유롭고 힘이 있으며 또 행복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말을 하는 왕비는 어쩐지 서글퍼 보였다.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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