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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한 유공자 관리… 당시 검시조서·검안서 보니
[단독: 5·18 진실 찾기⑥] 빨치산·진압軍 살해범까지 유공자로 ‘둔갑’
시위 구경하다, 총알 갖고 놀다가 다쳐도 버젓이 등재
김대중·이해찬·설훈 가짜 유공 논란… 재선별 불가피
허겸 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3-07-19 00:05:01
 
 
 
 
▲ 광주 북구 민주로에 자리한 국립5·18민주묘지 내 유영봉안소의 영정. 이곳은 시신을 찾지 못한 희생자들과 다른 묘역에 묻힌 고인들의 영정이 있는 곳이다. 남충수 기자
 
5·18 유공자는 공훈과 기초적인 피해 사실조차 구분하지 않은 채로 오랫동안 등록·관리돼 온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시위대 총에 맞거나 시위대 트럭에 치였을 개연성이 큰 사람들이 유공자가 되거나 실수로 감전 또는 총성에 놀라 계단에서 떨어져 다친 사람, 총알을 가지고 놀다 다친 청소년도 유공자로 등록된 것으로 확인됐다. 
 
18일 본지가 단독 입수한 현직 의료진의 5·18 검시조서·검안서 재분석 자료와 5·18 증언 문건들에 따르면 시위대에 휩쓸리지 말라는 정부의 경고를 듣지 않고 호기심에 시위 구경을 나갔다가 총에 맞거나 폭도로 오인돼 잡혀가 고초를 겪은 이들이 모두 유공자로 등록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차량 돌진 공격으로 경찰을 4명이나 깔아 죽였거나 계엄군을 트럭으로 깔아 죽인 가해자도 버젓이 유공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으로 밝혀졌다. 
 
김대중·이해찬·설훈 등은 5·18 기간 내내 도피 중이었거나 구금돼 있었지만 역시 유공자로 선정돼 유공자 등록자 모두에 대한 엄정한 재선별 작업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전남대병원 의사가 지켜본 5·18 광주항쟁’ 156쪽에는 위성완(당시 16세·이하 1980년 연령 기준) 군은 5월29일 집 앞에서 총알을 가지고 놀다 폭발해 파편이 눈과 몸에 박힌 것으로 기록됐다. 위군은 6월2일 구토와 경련을 동반한 파상풍 증세로 치료를 받았다. 
 
당시 계엄군의 도청 수복은 5월27일 오전 6시에 종료됐다. 이틀 뒤 집 앞에서 총알을 가지고 놀다 폭발 사고로 다친 미성년자도 유공자가 된 것이다. 위군의 이름은 5·18 기념재단이 만든 유공자 명패 4296개 중에 발견된다.
 
시민군 차에 치여 죽었어도 유공자 등록돼 
 
침구류 도소매업을 하던 조영복(36) 씨는 시민군 차에 치여 유공자가 됐다. 조씨는 5월22일 월산동 파출소 앞에서 친구를 구하려다 중심을 잃고 인도로 돌진해 오던 시민군 차에 치여 척추를 다쳤다. 조씨의 이름도 역시 유공자 돌판에 새겨져 있다. 
 
재봉사 안병복(20) 씨는 계엄군 차량에 치여 숨졌을 가능성 때문에 유공자가 됐다. 전남대 5·18 증언집에 따르면 어머니 김금난 씨는 “1980년 5월21일 10시경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고 한다 (중략) 작은집은 계림동에 있었는데 그곳으로 갔다가 계엄군의 차량에 치여서 사망한 것 같다”고 증언했다. 
 
21일 오전 10시 무렵은 계엄군이 도청과 전남대에 포위돼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갇혀 있을 때였다. 차량을 운행할 수 없었다. 21일 아시아자동차 회사에서 탈취한 군용트럭이 시 외곽을 돌며 시민들을 도청 앞과 전남대 앞으로 실어 날랐다. 
 
봇짐장수 전황금(52) 씨도 21일 트럭에 치여놓고 유공자가 됐다. 전씨는 “5월21일에는 장사를 나가지 않았다 (중략) 길을 건너는데 앞으로 달려가던 군용 트럭이 갑자기 후진하다가 내 다리를 치어놓고 가버렸다”며 “길거리에 쓰러져 있으니까 어디서 나타났는지 지프차를 탄 학생들이 나를 태워 요한병원에 내려놓고 갔다”고 밝혔다. 
 
역시 식료품가게를 하던 임수춘(38) 씨도 21일 오후 5시쯤 학운동 식품 가게 앞에서 군 트럭에 치여 죽은 것으로 기록됐다. 임씨의 아내는 “5월21일 오후 5시경 남편이 가게를 보면서 집에 나가 앉아 있을 때, 군 차량이 무섭게 돌진해 왔고 순식간에 남편이 차에 치이였다”고 증언했다. 
 
이날 오후 5시는 계엄군이 전남 도청을 빠져나와 조선대 방면으로 걸어서 철수를 시작할 시점이다. 피해자는 계엄군 트럭이 아니라 무장 시위대 트럭에 치였을 가능성이 크지만, 광주시청은 가해자를 계엄군으로 단정하고 유공자 명단에 추가했다. 
 
전화국직원 이은형(44) 씨는 총성을 듣고 놀라 4층 계단에서 2층으로 떨어져 유공자가 됐다. 이씨는 “4층 거의 다 올라가서 갑자기 학생들이 뛰어 들어오고 계엄군이 쫓아오면서 총을 쏘는 소리를 들었다”며 “깜짝 놀라 2층 옥상으로 떨어지고 말았고 의식을 잃고 말았다”고 증언했다. 
 
고교생 윤정귀(16) 군은 검문을 무시하고 걸어가다 총격을 당했다. 윤 군은 “나는 호기심에서 거리를 돌아다녔다 (중략) 22일은 아침부터 어머니께 꾸중을 들어 그냥 집을 나왔다”고 했다. 이어 “당시에 교도소 쪽에 작은집이 있었는데 무심히 걷다 보니 동일실고 앞까지 가게 됐다”며 “군인들이 뒤로 돌아가라고 소리를 질러댔는데 계속 앞을 향해 한 50m쯤 걸었을까.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고 순간 몸이 화끈 달아올랐다”고 증언했다. 
 
계엄군 죽인 가해자들도 버젓이 유공자 혜택 
 
김은환 씨는 한일은행 사거리에서 건물 옥상의 무장 괴한이 쏜 총에 맞고 유공자가 됐다. 김씨는 “한일은행사거리 주위에는 공수대원들이 전혀 없었는데, 아마 관광호텔 옥상이나 전일빌딩 옥상에서 쏘았던 것 같다”며 “총소리가 들리자 사람들과 함께 도망치기 시작했는데 뒤에서 몽둥이로 내 허리를 때린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고 피격 당시 체험을 증언했다. 
 
그러면서 “다친 지 8년이 지나도록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을 보면 상처가 잘 치료됐다고 생각한다”며 “보상금도 준다면 사양하지 않고 받겠지만 보상금을 받기 위해 앞에 나서서 설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총에 맞게 된 것은 내가 그곳에 갔었기 때문”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내 잘못도 조금은 있고 또 운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계엄군들도 총을 쏘고 싶어서 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먼저 공격을 하지 않으면 데모하는 시민, 학생들에게 오히려 당하기 때문에 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증언했다. 
 
당시 한일은행 사거리에는 공수부대가 배치되지 않았다. <본지 7월5일자 [단독][5·18 진실 찾기③] 7개 건물 옥상서 집단 발포… 軍 소행 아니었다 보도 참조> 근처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쏜 자들은 국군과 시민을 이간질하려던 신원미상의 무장 괴한들로 파악된다. 
 
김영봉(19) 씨는 5월21일 오후 늦게 계엄군이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날 밤 경계를 서려고 옥상에 올라갔다가 고압선에 감전돼 유공자가 됐다. 김씨는 “옷을 갈아입지 못하고 보초를 서기 위해 그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광주 시내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며 “나는 카빈총을 들고 보초를 서기 위해 총을 비스듬히 드는 순간 뜨끔했다. 총구가 고압선에 닿아 감전된 것이다”라고 증언했다. ‘전남대병원 의사가 지켜본 5·18 광주항쟁’ 155쪽에는 ‘5월21일 낮 아파트 옥상으로 피신 중 고압전선(3300V)에 감전됨’이라고 기술됐다. 
 
이금영 씨는 5월20일 계엄군 첫 사망자인 3공수여단 정관철 중사를 죽게 한 가해자인데도 유공자로 등록됐다. ‘집단 발포’가 있었다고 시민군이 의혹을 제기한 21일보다 하루 빠른 20일 저녁 6시30분쯤 이씨는 전남대 사거리에서 대형트럭으로 계엄군 지프차를 고의로 들이받아 정 중사를 죽게 만든 공적으로 유공자가 됐다. 운전기사 김승철(22) 씨는 전남대 앞에서 붙잡혀 교도소를 거쳐 상무대에서 풀려났다. 김씨는 “그곳에 있을 때 ‘이금영’이라는 사람이 가장 많이 맞았다”며 “그는 대형트럭 운전기사인데 지프차에 타고 있던 공수부대 중위와 운전병을 트럭으로 깔아버렸기 때문에 많이 맞았다고 했다”고 증언했다. 
 
20일 오후 광주역에 고립돼 있던 3여단에 저녁 식사를 운반하려던 급식 차량 2대가 2000여 명의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무기가 없던 병사들이 차를 버리고 도망가자 시위대는 급식 차량을 뒤집어 엎었다. 전남대 앞을 지키던 3여단 16대대가 이를 도우려 나섰는데 이때 이씨가 대형트럭을 전속력으로 몰아 정관철 중사가 모는 지프차를 들이받았다. 정관철 중사의 임신한 아내는 한 달 뒤면 제대할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됐다. 
 
운전기사 김갑진(30) 씨는 경찰 4명을 죽인 차량 동승자였다는 기록 외에는 공적이 없는데도 유공자가 됐다. 김씨 아내는 “그날 밤 그는 버스를 타고 도청을 지나 노동청으로 가던 길이었는데 버스에는 동료기사인 운전수 배용주 씨 외에 몇 사람이 더 타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배용주 씨는 가해 차량 운전사였다. 이어 “그들이 탄 차가 노동청에 가까워질 무렵 최루탄을 쏘며 경찰들이 쫓아왔다”며 “그러자 그들은 모두 차에서 내려 정신없이 도망갔는데 유난히 큰 체구(80kg 178cm)를 가진 남편은 잡히고 말았다”고 증언했다. 
 
김씨는 배씨와 함께 광주고속버스에 타고 대치 중이던 경찰을 향해 빠른 속도로 돌진해 미처 피하지 못한 경찰관 4명을 깔아 죽이고 도망치다 붙잡혔다. 
 
술 먹고 트럭서 떨어져 숨졌는데... ‘총상 유공자’ 요지경 
 
시위대 트럭에 치이고도 軍트럭에 의한 사고로 조작 
경찰 4명 죽인 트럭동승자, 기록 뿐인데도 유공자 선정 
대학생 데모대에 밀려 넘어져 5개월 뒤 숨지고도 혜택 
 
▲ 스카이데일리 취재진이 올해 5월 광주 5·18기념공원 내 지하 추모승화공간 돌판에 새겨진 5·18 유공자 명단을 살펴보고 있다. 남충수 기자
 
 
5·18 당시 광주에 없던 정치인들도 이름 올려 
 
이해찬(28)은 5·18 기간 광주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도 이 기간 내내 도피 생활을 하다가 6월18일 체포됐다. 설훈(27)도 고려대 학생운동권으로서 이해찬·심재철과 함께 학생 시위를 기획·지휘했다. 5·18 기간 내내 도피하다가 6월18일 붙잡혔다. 
 
광주제일고교 출신의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22)은 5·18 기간 내내 검거를 피해 다니다 6월 자진 출두 형식으로 검거됐어도 정작 본인은 유공자로 신청하지 않았다. 그러나 함께 운동한 설훈은 유공자로 등재됐다. 
 
소년 빨치산 출신의 장두석(개명 전 장질석) 씨도 유공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장씨는 6·25 전쟁 당시 소년 빨치산 출신으로 체포됐다가 당시 15세로 나이가 어려 한 달 만에 풀려났다. 5·18 때 전남도청을 출입하며 도청 밖 광주 운동권과 도청 내 무장세력을 잇는 연락책으로 활동한 의혹을 받아왔다. 계엄군법회의에선 징역 7년이 구형됐고 3년을 선고받아 형이 확정됐다. 
 
백주년기념교회 권사 A씨는 2003년 지인의 소개로 장두석이 자연의학으로 사람을 치유한다는 ‘민족생활학교’에서 들은 내용을 전했다. A씨는 “강사라는 사람(장두석)이 6·25 민족해방전쟁을 실패한 이유가 십자가 씨앗을 다 안 말려서 그렇다며 이번에는 모두 죽이고 태워서 통일을 이루자고 선동해 놀랐다”고 증언했다. 민족생활학교는 장두석이 1989년에 세운 단식학교다. 1975년에 세운 ‘자연건강대학’의 후신으로 알려졌다.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 홈페이지는 장두석을 ‘통일애국열사’로 소개한다. 
 
가정주부 홍란(30) 씨는 자녀를 찾기 위해 집 밖으로 나왔다가 총격을 받았다. 홍씨는 “막 시댁 대문 앞에 왔는데 총소리가 났다. 총알이 빗발치듯 나에게 쏟아졌다”고 증언했다. 남현애(24) 씨는 곗돈을 갖다주기 위해 외출했다가 노동청 부근에서 총격을 당했다. 남씨는 “공수부대가 갑자기 총을 난사했다”며 “내 다리가 좀 이상했다. 감각이 없었다. 팔도 그랬다. 총에 맞은 것이다”라고 진술했다. 홍씨와 남씨는 모두 유공자로 등록됐다. 
 
도청 앞 계엄군은 차량 돌진 공격을 받았을 때 돌진 차량을 향해서만 대응사격했다. 당시 전일빌딩 등 주변 고층 건물 옥상의 무장 괴한이 노동청 주위에 몰려든 시위대에 무차별 총격을 가한 사실이 드러난 바 있다. 
 
채소 장사 김동진(49) 씨는 술을 마신 뒤 차를 타고 가다 낙상해 대퇴부가 뭉개졌다. 고인의 유족은 “주위 사람들 말에 의하면 아버지는 21일 동네 친구 세 분과 함께 동네(월산부락) 골목 어귀에 있는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며 그런데 그날 밤이 지나도록 돌아오시질 않아 식구들이 찾아다니던 중 전남대병원 영안실에서 아버지를 찾았다고 한다고 했다. 
 
이어 “부검을 할 때 얼핏 보니 아버지는 대퇴부가 거의 뭉개져 있었다. 총상으로 인한 상처인지는 잘 모르겠다”며 “나중에 들은 소문에 의하면 아버지는 술을 드신 상태로 차를 타고 가다 떨어져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확인할 길이 없다”고 진술했다. 
 
시민군끼리 오인사격 가능성도 재검토 대상 
 
의학적 소견으로는 총상으로 대퇴부가 뭉개질 수는 없다. 달리는 차에서 떨어지며 다쳐 유공자가 된 것으로 간주된다. 
 
오인 사격 희생자로 보이는 방위병이자 자동차부품공장 직공인 김형관(22) 씨도 유공자로 등록됐다. 고인의 어머니는 “이웃이 뛰어오더니 글쎄 형관이가 백운동 근처 철둑에서 총에 맞았다고 합디다”라며 “얼굴이 푹 팬 시체가 형관이의 옷을 입고 있었다”고 말했다. 
 
역시 양희영(20)·양희태(17) 형제도 백운동 철길 주변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5·18 당시 백운동 철둑에는 계엄군이 배치된 적이 없다. 무장 시위대끼리의 오인사격 가능성이 제기된다. 
 
21일 오후 5시 계엄군은 전남도청을 빠져나와 걸어서 조선대로 퇴각하기 시작했고 6시쯤 식사를 하고 7시부터 조선대에서 탈출해 무등산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 5시 백운동 철길 지점에서는 무장 시위대들끼리 오인 사격을 벌여 여러 명이 숨진 정황이 있다. 
 
양동시장에서 야채 장사를 하던 김명철(66) 씨는 22일 실종됐다가 도청 안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검시 결과 얼굴 반쪽이 없고 복부에 시퍼렇게 멍든 자국이 발견됐다. 검시조서는 좌전두부 좌상, 타박사로 기록했다. 교통사고로 배를 들이받힌 뒤 숨졌을 가능성이 크다. 
 
고령의 박갑수(84) 씨는 집 앞에서 전남대생 손녀를 기다리며 시위를 구경하다가 계엄군에게 쫓겨 도망치는 시위대에 밀려 넘어져 부상을 당했고 5개월 뒤 사망했다.
 
손녀는 “할아버지는 집 앞에 있는 현대예식장 앞에서 학생들이 데모하는 것을 보고 내가 걱정이 되어 기다렸다”며 “그러다가 계엄군에게 밀리는 시민, 학생들과 부딪혀 쓰러지고 말았다”고 증언했다. 
 
5·18 기념재단이 만든 유공자 명패에는 48년 7월14일생 김영철 씨의 이름이 있다. 5·18 관련 의료기록에는 YWCA 신용협동조합 직원 김영철(32) 씨가 스스로 자기 머리를 콘크리트 기둥 모서리에 박아 다친 뒤 정신 이상증세를 겪었고 9년 뒤 1989년 8월17일 숨진 기록이 있다. 
 
명패에는 또 문기현이라는 이름이 있다. 의료기록에 따르면 사레지오고 2학년생 문기현(18) 씨가 전남대병원에서 37일간 뇌막염 치료를 받았다. 
 
의학박사 A씨는 본지에 “이들은 유공자가 아니라 억울한 피해자이거나 운 나쁜 피해자일 뿐”이라며 “5·18 기간에 죽은 사람이라면 사망 원인을 몰라도 유공자가 된 경우도 있다”고 밝혔다. 
 
광주=허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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