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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사단 지휘차량 피탈사건 잇단 증거 나와… 시위대 우발 공격 주장과 거리 멀어
[단독: 5·18 진실 찾기⑦] ‘군분교 습격’은 외부세력 개입한 군사작전
무장 괴한들, 광주 진입 길목 3곳 일찌감치 차단… 軍 유인
서울서 급파한 계엄군·전교사와 합류 미리 알고 조직적 기습
허겸 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3-07-26 00:10:01
 
 
 
▲ 복면을 쓴 무장 괴한들이 장교우의를 입고 전남 도청을 경계하고 있다. 습격받은 군의 피탈품목에 다수의 장교용 우의가 포함된 것은 1980년 5월21일 20사단 지휘차량 탈취가 유일해 동일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관심을 끈다(왼쪽). 지금까지는 칼빈총의 총구를 아래 방향으로 메는 것은 북한군의 특징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끈 바 있다. 그러나 도청을 사수하는 정체불명의 무장 괴한들이 사병용 판초우의 대신 장교용 우의를 착용했다는 지적이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5·18기념자료집
 
5·18 당시 시위대에 의한 우발적 소행으로 알려져 있던 ‘군분교 20사단 지휘차량 피탈’ 사건은 군 전술에 능한 세력이 개입한 고도의 차단 작전 성격이 뚜렷했으며 5·18이 악화일로로 전환되는 군사적 변곡점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지금까지는 계엄군에게 반발하며 맞서려 한 시위대가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비전문적인 수법을 동원해 우발적으로 군대를 기습 공격한 사건으로만 인식됐다.  
 
그러나 이 사건은 전날 발생한 대대적인 광주역 공격과 피탈 직후 벌어진 군수품 공장 기습 및 군용차량 탈취와 무기고 습격·계엄군의 교전·전남도청 점령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사건들과 맞물려 완벽한 군사전술이 적용된 가운데 선제적으로 감행된 일종의 신호탄 격 작전인 것으로 분석됐다.  
 
특히 전날 광주역의 시위 양상은 이전과 달리, 투입된 제3공수여단이 수많은 시위대에 포위된 데다 차량 돌진 공격 등으로 계엄군 사상자가 발생하는 형태로 변질됐다. 이로써 부대가 정상적인 임무 수행을 할 수 없을 만큼 사정이 악화됐다고 판단한 계엄사는 20사단의 광주 추가 투입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20사단은 고속도로를 이용해 지휘관이 인솔하는 지프차 14대를 광주로 보냈지만 21일 오전 8시10분 광주 농성동에서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일부 지프차는 불에 타 전소되고 일부는 총기류와 함께 강탈당했다.  
 
군은 이 사건으로 △지프차 14대 △M60 기관총 2정 △M16 소총 4정 △45구경 권총 1정 △M60탄약 200발 △M16 탄창 91개 △M60 차량장치대 2개 △무전기 16대 △전투복 35착 △우의 18장 △방독면 18개 등을 빼앗겼고 8·14호(헌병)와 13호(보안대) 지프차는 전소됐다. 또 △중상 2명 △경상 5명 △실종 1명의 병력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군은 집계했다. 
 
25일 본지가 단독 입수한 분석자료와 증언들에 따르면 시민군이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있었다고 주장해 온 당일인 21일 군은 일반열차로 병력을 수송하는 상례와 달리 사단장 지프차를 비롯한 사령부 차량과 62연대 지휘부 차들은 화물열차가 아니면 수송할 수 없다고 판단해 상급부대와 협의한 뒤 고속도로를 통해 광주로 이동하도록 결정했다.  
 
이 사실을 육군본부로부터 접수한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CAC)는 그에 따른 적합한 조처에 나서지 않았고 몇 시간을 달려 광주에 도착한 지프차 14대로 이뤄진 62연대 지휘부 차량은 복면을 한 정체불명의 괴한들로부터 차량과 무기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길목에 장애물 사전 적층… 철저한 차단·매복작전 양상 뚜렷 
 
군분교 20사단 지휘차량 피탈 사건에서 괴한들은 일찌감치 중장비를 동원해 서울~광주 시내에 이르는 농성동 일대 길목 3곳을 차단한 뒤 군부대를 유인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같은 분석은 군 차량이 시민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이동하다 우연히 서로 마주치게 됐고 계엄군에 반감을 품은 광주시민들이 우발적으로 군차량을 공격해 무기를 탈취했다고 알려진 그동안의 관점들과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 20사단 지휘차량 피탈 현장 요도
 
당시 군검찰과 안기부 상황일지 등에 따르면 군을 공격한 “수백 명”의 괴한들은 최소 하루 전부터 도로에 다중의 장애물을 적층하는 등 군 전술상 차단작전에 버금가는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매복한 정황이 드러났다.  
 
장애물 설치 시점은 20일 오후부터 밤까지로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군사전문가들은 시점에 주목한다. 고속도로에 장애물 설치하던 시기는 시위대가 광주역에서 파상 공격을 감행하던 시기다. 다른 두 곳에서 같은 시각에 벌어진 시위의 공통점은 병력 또는 군수품 조달 통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군사전문가 A씨의 분석에 따르면 괴한들은 차량 돌진으로 계엄군을 죽이던 시각에 서울 쪽 방면(광천동)에서 광주로 이르는 주요 길목 3곳에 다중의 장애물을 설치하고 도로를 절개(끊어 통행을 막음)했다. 차량이 빠질 정도의 함정도 팠다. 장애물의 길이와 두께를 고려하면 지게차와 페이로더 등 중장비가 동원돼야 가능한 규모라고 군사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구체적으로 서울에서 오며 광천동 사거리를 지나 농성동 공단입구 사거리를 앞둔 군 지휘차량의 관점에서 오른쪽(지도상 왼쪽) 송정리 방면(군분교)과 왼쪽 돌고개 방면, 정면의 월산동 방면을 모두 다중의 장애물로 막았다.  
 
이곳을 통과하지 않고선 군은 광주 시내에 진입할 수 없었다. A씨는 “모여있던 시위대와 조우한 지프차를 성난 시위대가 공격했다는 시민군 측 증언과 군사 전략상 요충지인 길목 전부를 일제히 절개·차단한 당시 현장 상황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특히 군분교는 장애물을 겹겹이 적층했다. 송정리 방면에는 전교사가 있다. 군 전문가들은 본지에 “괴한들은 서울에서 온 병력이 전교사로 합류할 것으로 내다봤을 것”으로 추정했다. 실제 피해 당사자인 62연대 병력이 습격받자 미리 도착한 61연대는 전교사가 있는 서쪽 송정리 방면에서 동쪽의 군분교 방면으로 접근했다. 같은 이치로 새로 진입하는 추가 병력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해 전교사에 집결할 것으로 봤다는 예측이다.  
 
군 지휘부 간 무전을 도·감청해 이동 경로가 사전에 노출된 정황도 포착됐다. 무장세력은 전날 CBS 경계병을 공격해 이미 무전기를 확보했고 아군끼리 오인 교전을 유도하는 등 군 지휘부의 무전을 적극 도청했다는 시민들의 증언이 공개된 바 있다. <7월13일자 ⑤‘송암동 오인 사격’은 게릴라 전술에 軍이 당한 것 보도 참조> 
 
계엄사와 20사단 작전처 상황 일지에 따르면 기습공격은 62연대와 사령부 지휘차량을 상대로 감행됐다. 20사단 화학대장 김이영 소령이 인솔하는 부대는 서울 쪽 방면에서 광천동을 지나 농성동 공단 입구에서 우회전한 뒤 서쪽 송정리 방면으로 진행하다 군분교에서 예상치 못한 급습을 받았다. 분석 자료에 따르면 군중 속에 잠복한 괴한들은 각목과 칼·낫·쇠 파이프를 들고 벽돌·화염병을 투척하며 기습공격했다.  
 
애초 20사단 60·61·62연대는 각각 다른 이동 수단과 경로로 광주에 도착할 계획이었다. 61연대는 전날 밤 10시에 광주로 출발해 21일 새벽 4시에 도착하고 62연대와 사령부는 21일 새벽 2시30분에 서울 용산역을 떠나 아침 9시쯤 광주 송정리역에 다다를 계획이었다. 태릉에 주둔했고 양평에서 추가 병력이 합류했던 60연대와 91포병대대는 가장 늦은 21일 밤 9시 성남 비행장에서 출발할 예정이었다. 
 
전교사·61연대 지원 안 해… 복면 쓴 공수 복장 괴한들 뒤에서 기습 
  
▲ 군분교에 설치된 장애물.
 
군 차량이 군분교에 다다르는 동안 전교사(CAC)는 안내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미리 도착한 61연대도 현장에 출동했다가 62연대가 피습되는 와중에 돌연 방향을 돌려 회군해 의문을 낳았다. 
 
20사단은 출발 전 사단 군수참모를 통해 병력 이동 계획을 3군 군수참모에게 보고했다. 군수참모는 CAC 군수참모에게 전달·공유했다. 통상의 작전에선 마중물처럼 안내 부대가 배치된다. 당시 육군본부도 전교사가 병력을 보내고 교통을 통제할 것으로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소한 소요 군중이 도로를 봉쇄했다는 첩보라도 미리 확보해 전파했을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교사는 단 한 명도 현장에 파견하지 않았다. 이는 송암동 사건과 함께 5·18 기간 전교사의 미스터리한 행적 중 하나다. 군사 전문가 B씨는 “바로 전날 밤까지 광주역에서 소요가 격화해 공수부대가 퇴각했는데 습격 가능성을 예상해 서울~광주에 이르는 주요 도로망에 대한 교통 통제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첩보전의 실패 이외에도 밝혀지지 않은 모종의 원인이 있을 것으로 본다”고 본지에 밝혔다. B씨는 추정하는 원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혔다.  
 
결국 20사단 62연대는 무방비 상태로 광주 진입을 시도하는 처지가 됐다. 이에 대해 군사기밀인 용산역~광주 간 병력 이동 계획이 괴한들의 도·감청 또는 군 내부에서 누설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군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이런 가운데 공격당한 62연대보다 일찍 전교사에 도착한 61연대는 소요 군중 진압을 목전에 두고 방향을 돌려 부대로 복귀하는 비상식적인 판단을 내렸다.  
 
20사단 충정작전 결과 보고와 1995년 검찰 피의자신문조서에 따르면 당시 61연대는 소요 군중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고 차량 40대에 병력을 탑승시켜 돌고개에 도착했지만 대대장의 보고를 받은 연대장은 사령관에게 현지 상황을 보고한 뒤 상무대로 복귀하라는 지시를 받고 복귀했다. 회군 시각은 최초의 피습이 있은 지 불과 10분이 흐른 오전 8시20분쯤이다.   
  
황석영의 저서로 처음에 알려졌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2017년 5월 증보판)’ 186쪽은 당시 지휘관의 실명을 언급했다. 책에 따르면 61연대 2대대장 김형곤 중령은 “광주시민들이 몹시 흥분된 상태”라고 판단했고 주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만류하자 연대장에게 무전으로 상황을 전하고 상무대로 복귀했다고 한다.  
 
61연대는 열차 이동 중인 사령부를 엄호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에 나섰다는 기록이 없다.  
 
괴한들이 어떤 복장이었는지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군사 전문가들은 일반 시민들로 구성된 시위대와 구분되는 무장세력의 작전 지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사건을 들여다보고 있어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일부 휩쓸린 광주시민들이 “자발적 항거”였다고 증언하고 있지만, 군 전문가들은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체계적인 움직임을 배후에서 조종한 지휘부가 있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인다.  
 
전두환 회고록에는 시위군중과 구분되는 무장 시위대의 존재가 일부 묘사된다. 회고록 1권 404~405쪽은 “인솔 장교가 차에서 내려 통과시켜 줄 것을 설득했는데 갑자기 진행 방향과 반대쪽인 20사단 지휘부 차량 뒤편에서 잠복해 있던 일단의 무장 시위대가 쇠 파이프와 낫·화염병 등으로 공격해 왔고 사단장 차를 비롯한 14대의 차들은 모두 불타거나 탈취당했다”고 상술했다.  
 
그러면서 “잠복해 있던 정체불명의 무장 시위대는 그 장소에 있던 일반 시위군중과는 분명히 구별할 수 있을 만큼 행동거지가 민첩하고 조직적이었다”며 “20사단 지휘부가 광주톨게이트를 통과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잠복해 있다가 화염병 등으로 공격한 것”으로 봤다.  
 
무엇보다 “무장 시위대 가운데 일부는 경찰복과 공수부대 복장을 갖춘 채 복면을 하고 있었다”고 기술한 대목은 눈에 띈다. 회고록은 “사단의 주력이 아닌 단순한 차량 행렬에 불과했고 또 그때는 이미 시위대가 경찰과 군의 무전기를 탈취해 간 상황이어서 군부대의 이동정보를 알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육군 사단 중에서도 정예부대인 20사단 지휘부의 차량 행렬을 게릴라 작전하듯이 공격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복면 시위대의 정체에 의문이 생긴다”고 했다.   
 
육사총구국동지회 초대 회장을 지낸 이두호 (사)자유수호국민운동 대표는 최근 기자와 만나 “(괴한들이) 시민군으로 위장하면 시민의 공격을 계엄군에 책임을 전가할 수 있고 계엄군으로 위장하면 시민의 만행을 계엄군에 책임을 전가할 수 있다”며 21일 하루 동안 위장뿐 아니라 시민군의 전술은 화전(和戰)·공수(攻守)·양동(陽動) 작전의 다양한 특징을 보인 사실을 강조했다.  
 
무장세력 하루 전부터 함정 파… 고도의 전문가 솜씨 
 
62연대·사령부 타격… 지프 14대·각종 무기·무전기 탈취
경찰·공수부대 복장에 복면 쓴 괴한들, 軍위장 양동작전
“사전차단 작전 실패 했더라면 전남도청 장악 못했을 것”
 
괴한들, 차량 탈취 전 “밖으로 나오지 말라” 주민 상대 방송 
 
이 같은 의구심은 복면을 쓴 공수 복장의 괴한들이 지휘차량 탈취에 앞서 주택가를 돌며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방송한 사실에서 더욱 증폭된다.  
 
20사단 60연대 수색 중대장 김덕수 대위는 2018년 8월 광주 광천동 소재 노인회관을 방문해 1980년 5월의 상황을 노인들로부터 청취했다. 여러 명의 할머니들은 그 시기를 상기하면서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5월21일 새벽 아침부터 일찍 총을 들고 와서 집 밖에 나오지 말라”고 방송을 했다고 증언했다. 일부 구경하다 휩쓸린 이들을 제외하면 공격 주체 또는 지휘부는 평범한 광주시민들로 구성된 시위대가 아니었을 개연성이 커지는 대목이다. 
 
▲ 군분교 사건 검찰 수사 기록.
당시 동아일보 광주 주재 김영택 기자는 “괴한들이 민간인이었느냐 하는 의문이 있다”며 “민간인이 정규군보다 강할 수는 없고 광주시민들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는 취지로 언급했다. 여태껏 이 50여 명의 괴한들이 광주시민들이었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고 김 기자는 덧붙였다. 80만 쪽이 넘는 5·18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역사로서의 5·18 2권(김대령 저)’에 따르면 낫을 든 시위대는 군 무전기를 탈취하자마자 사용법을 알았으며 그날 오후 3시에 중학생 특공대를 조직했을 때 중학생 시민군들에게까지 무전기 사용법을 금방 가르쳐준 사실로 미뤄 평범한 농민들일 수가 없다고 했다.   
 
군 전문가들은 20사단 피탈 사건을 이해하려면 전날 밤 치열하게 시위대의 공격을 받은 광주역이 어떤 곳이었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광주역 일대에서 임무를 수행 중인 3공수여단은 20일 밤부터 차량 돌진을 비롯한 집요한 공격을 받으며 수많은 시위대에 포위돼 있었다. 당시 공수 대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차 온다”는 소리를 듣고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고 한다. 결국 3공수는 광주역 경계 임무를 포기하고 시위대에 광주역을 내주면서 간신히 벗어나 주둔지인 전남대로 21일 새벽 2시30분쯤 되돌아올 수 있었다.  
 
광주역은 열차로 대규모 병력과 장비를 수송해 최단 시간 내에 광주 시내로 진입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계엄군의 인원 및 물자 장비 등을 충원하고 보급받을 수 있는 군사 전략상 베이스캠프와도 같은 곳이었다. 군사전문가들은 20일 밤의 집요한 공격은 계엄군이 광주역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전술적 양상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고속도로와 일반도로로 이동한 20사단 지휘 차량을 대상으로 한 기습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군부대의 이동 상황에 따른 정보를 접하고 고도의 군사작전의 일환으로 일반 시위대가 계획할 수 없는 장애물을 설치한 사실에 주목한다. 상무대 근처 쌍촌동 도로상에, 돌고개와 농성동 부근 도로상에 3곳의 도로가 차량이 빠질 정도로 절개돼 계엄군의 시내 진입을 차단할 목적으로 밤새 장애물을 설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구체적으로 시내 쪽에서나 고속도로 쪽의 도로를 거쳐 상무대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농성동과 화정동의 경계에 위치한 군분교 상에 시외 측과 시내 측에 각각 파손된 차량과 콘크리트관·강철관·원목 등으로 다단계의 장애물이 설치됐는데 이는 고도의 군사적 식견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설치하기 힘들다고 A씨는 분석했다. 그는 “밤사이 짧은 시간 내에 어떻게 토끼몰이식 함정 유인 형태의 장애물을 설치할 수 있는지를 살펴 보면 단순한 장애물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20사단 배치 과정에 미국이 개입했는지에 관한 분석도 있었다. 20사단의 이동 시점과 관련해 김영택 기자는 “전방에 있던 보병부대(20사단)의 공식적인 이동 승인은 22일 받게 되는데 이날(21일) 미리 도착했다”며 “사전 승낙을 받고 출발한 것인지, 작전 지휘권자인 존 위컴 한미연합사령관이 결국 승인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판단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고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이 대목에서 미국의 5·18 개입 또는 배후를 의심하는 여론이 증폭됐다.  
 
광주역 전투와 연관성… 美 前 대사 “미국과 무관" 
 
이와 관련해 헤리티지재단이 1985년 9월16일 펴낸 대릴 M 플렁크(Daryl M. Plunk) 선임 방문연구원의 보고서는 20사단 역할과 미국의 관련성에 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 보고서는 “윌리엄 글라이스틴 전 주한 미국대사는 (플렁크 연구원에게) 한국군의 사용이 ‘국가 안보에 위협’을 초래하지 않는 한 한국은 행동(결정)을 미국에 ‘통보(notify)’하기만 하면 된다고 설명했다”고 언급했다. 한국이 군사 배치에 관한 한 독자적 결정권한이 있고 미국은 한국의 군사 결정이 주변국을 선제공격하는 등 역내 안보를 저해하지 않는 한 관여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보고서는 또 “5·18 기간에 한국 정부는 20사단 재배치 결정을 미국에 알리는데 주의를 기울였다”고 했다. 
 
▲ 헤리티지재단 광주 보고서
글라이스틴 전 대사는 “(한국의)행동은 국가 안보를 위태롭게 하지 않았고 궁극적으로 군대를 사용할 권리는 주권의 기능이었다”며 “미 대사관은 폭동 ‘약 2일 전’까지 광주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마지막날 20사단이 수행한 광주 탈환은 ‘매우 합리적인 조치(highly sensible action)’로 받아들였으며 미 대사관이 군의 재배치를 수용한 것은 ‘승인’ 또는 ‘공모’와는 무관하다(The U.S. Embassy's acceptance of the troop redeployment did not constitute ‘approval’ or ‘complicity’.)”고 재차 선을 그었다. 
 
‘합리적인 조치’로 받아들인다는 미국의 판단은 현재 5.18의 진실을 찾으려는 연구가들의 견해와도 맥이 닿아 있다.   
 
퇴역한 군사전략가 C씨는 “한국 현대사에서 1980년 이후로 5·18과 유사한 사례는 없다”면서 “제아무리 성난 시민들이라고 해도 군부대를 공격해 무기를 탈취한 뒤 지휘 차량 10여 대를 몰고 군납 자동차 생산업체를 또다시 습격해 차량 수백 대를 가로챈다는 건 전무후무한 역사”라고 못 박았다. 그는 또 “이것을 평범한 시민들의 소행으로 보는 것 자체가 5·18이 얼마나 부실하게 조사됐고 정치적 의도로 진실이 덮여 왔는지 반증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군사전문가들의 모임에서 만든 태스크포스(TF)팀도 “5·18 당시 계엄군의 발포를 유도하는 ‘적거아요(敵据我擾·적이 머무르면 교란한다)’식 군중 운집 점화 활동이 발견된다”고 해석했다. TF팀은 20일 밤 시청과 전남도 경찰청·MBC·KBS 무력화로 행정·방송·통신 기능이 불능에 빠졌고 세무서에 이어 광주역을 내주며 군수기지 기능과 교통이 마비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31사단 공공기관 경계 병력에 대한 공격으로 공권력 해체를 기도한 상황에 21일 20사단 지휘 차량 탈취가 감행된 것은 산발적인 일회성 공격으로 보기보다 일련의 군사 전술이 적용된 전체 중 하나로 이해하는 게 맞는다”고 강조했다.  
 
20사단에서 피탈된 군 장비는 추가 무기 획득이나 거점 점령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칼빈총을 거꾸로 멘 채로 전남도청을 사수하는 괴한들에게서 피탈된 장교용 우의가 발견된다고 군 전문가들은 주목했다. 지금까지는 칼빈총의 총구를 아래 방향으로 메는 것은 북한군의 특징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끈 바 있다. 우리 군은 총구를 하늘로 향하게 어깨에 메지만 북한은 비에 젖어 고장 날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총구를 아래로 향하게 멘다는 설명이 곁들여지면서다. 그러나 도청을 사수하는 정체불명의 무장 괴한들이 사병용 판초우의 대신 장교용 우의를 착용했다는 지적이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정부군은 21일 이전에 시위대로부터 습격당하면서 장교용 우의가 피탈된 사실이 없다. 장교용 우의는 20사단 62연대 지휘 차량 피습 때만 강탈당했다. 동일범의 소행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5·18연구가 D씨는 “광주사태(D씨의 표현)의 본질은 제2의 6·25의 불길을 지피기 위한 불쏘시개 역할로 보인다”며 “즉 군사작전이었다고 개인적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D씨는 “이런 관점에서 보면 20일 밤 광주역을 집요하게 공격한 것도 20사단이 광주역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 했던 것이고 군분교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지휘 차량을 탈취한 것이나 61연대 2대대를 저지하기 위해 도로를 차단한 것, 전남도청을 정찰하러 나간 백성묵 단장의 헬기를 공격한 것도 20사단이 광주로 진입하지 못하게 취한 조치들이었다”고 해석하고 “결국 20사단이 광주에 진입하지 못해서 도청을 빼앗겼던 것이고 정부군의 전술적 패배였다”고 주장했다. 
 
광주=허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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