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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요직 거친 탈북인 “당시 로동신문이 증거”
[단독: 5·18 진실 찾기⑨] “北 기자 2명 5·18 때 광주 취재해 갔다”
北 기자가 찍은 사진·영상 조총련 통해 日 신문과 교환
21일 ‘집단 발포’ 논란 전후한 상황 매우 상세하게 보도
허겸 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3-08-10 00:05:00
 
▲ 북한 로동신문 1980년 5월22일자에 게재된 광주 시위대-계엄군 대치 장면. 탈북 제보자는 본지에 “당시 조선중앙TV가 생중계한 장면”이라고 주장했다. 북한 신문이 외신 영상을 인용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만약 북한 기자가 직접 촬영한 영상의 한 장면(캡처)이고 장소가 금남로였다면 촬영 위치가 전남도청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제보자는 “북한 기자들은 서해 무인도에 은신했다가 5·18이 터진 후 광주로 왔다”고 침투 경로를 언급했다.
 
북한의 기자 2명이 1980년 5·18 광주 현장을 취재해 간 정황이 처음으로 드러났다. 
 
당시 한국은 계엄사령부가 보도를 전면 통제했다. 하지만 북한에선 시민과 계엄군의 격렬한 대치를 비롯해 광주의 상황이 연일 실황 중계하듯 보도된 것은 익히 검증된 사실이다. 그 무렵 성인이었던 탈북인 대부분이 TV와 신문 보도를 접했다고 일제히 증언한다. 
 
북한의 대대적인 보도를 두고, 지금까지 남한 내 숨어있는 ‘혁명역량(고정간첩의 북한식 표현)’ 또는 외신을 통해 전달된 사진과 영상정보를 북한이 인용·보도했을 것으로 추측됐다. 
 
그러나 북한이 직접 ‘종군기자’ 2명을 광주 5·18 현장에 보내 취재했다는 증언 내용이 언론에서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최근 취재진과 만난 탈북인 A씨는 “5·18 때 북에서 종군기자들이 내려와 여기서 벌어진 일들을 다 사진으로 찍고 동영상으로 촬영해 가지고 갔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로동신문(노동신문)에는 광주의 어느 골목골목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고 어느 무기고가 털렸으며 계엄군이 어디서 어떻게 했는지 짚으며 북한 신문에서 대서특필했다”며 “북한이 기자를 보내 모든 상황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증언했다. 
 
증언이 사실이라고 가정하고 광주에서 취재한 내용을 북한이 보도하게 된 경위를 묻자 “(남파된) 북한 기자들이 찍은 동영상과 사진, 작성한 기사를 일본의 OO신문을 통해 금방 조총련으로 송신했고 조총련에서 받은 것(정보)을 북한에 넘겼다”고 설명했다. A씨는 일본 일간지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본지가 A씨를 통해 건네받은 노동당 기관지 로동신문 1980년 5월22일자는 광주 소식을 매우 상세하게 다뤘다. 상단의 신문 내용에는 인용매체 없이 광주 상황을 기술하며 비평했고 하단에는 조선중앙통신 보도 내용을 전재·배열했다. 조선중앙통신은 노동당 직속 뉴스 통신사다. 통신사란 한국의 연합뉴스·뉴시스, 미국 AP·블룸버그와 같이 속보를 다루는 매체다. 
 
본지는 A씨 취재 이후 그의 발언을 뒷받침할 만한 추가 증언을 물색했지만 확보하지 못했다. 따라서 북한 기자의 5·18 광주 취재 정황은 현재로선 탈북인 한 명의 유일한 증언에 의존한 것임을 밝힌다. 익명을 요구한 A씨 뜻에 따라 개인 소개는 생략하지만 그는 탈북 전 북한 매체 전반의 속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한국 정보당국은 파악한 바 있다.
  
北, 5월20일부터 5·18 소식 신문·방송 등 대대적으로 다뤄 
 
A씨에 따르면 북한은 5월20일부터 5·18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5·18 연구가들에 따르면 20일은 광주에서 시위대가 군·경을 향한 무력 도발을 본격화한 시점으로 꼽힌다. 노동청과 광주역에서 각각 버스와 트럭이 돌진해 경찰 4명이 죽고 5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공수부대원 한 명이 숨지는 등 최초의 군·경 인명 피해가 발생한 날이다. 
 
시민군 측이 주장하는 21일 ‘집단 발포’ 논란을 전후한 광주의 상황을 전한 북한 신문의 보도는 대단히 상세하게 기술했다. 
 
A씨가 증거라며 본지에 제시한 3가지 중 하나인 로동신문은 5월22일자 2면에서 상단의 좌우를 꽉 채운 장문 기사로 5·18 소식을 다뤘다. 
 
신문에는 △5월18일 0시 비상계엄령 선포 △북의 남침 위협 구실로 계엄 확대 △탱크 장갑차 출동, 공공건물·대학·보도기관 장악△국회의사당·정당 청사 배치△민주화운동 청년학생 대대적 검거△정계·종교계·학계·언론계 인사들 체포 △5·18은 군사파쇼독재자가 무력 동원해 의회 권력 가로챈 5·16 군사정변의 재판 △민주 역량에 대한 무장 탄압은 시대와 민족 지향에 역행 △민족의 이름으로 규탄 △군사 깡패 전두환을 두목으로 하는 유신 잔당 △남조선 땅을 피로 물들이고 통일 방해 △독재자들의 추악한 앞잡이들 △남조선 인민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독 △무지막지한 자들이 총칼을 휘두르며  공공연한 군사파쇼의 길로 내달림 △유신체제를 지탱해 보려는 유신 잔당들의 필사적인 발악 △또 하나의 군사정변 △유신체제는 인민들을 가혹하게 억압 착취하며 통일 가로막고 전쟁 준비 다그치기 위한 가장 반민족적 반인민적 체제 △헤아릴 수 없는 민중의 고통 강요 △남조선 인민들 반파쇼 민주항쟁에 나섬 △남조선 인민들 투쟁은 민족의 존엄과 통일 위한 애국 투쟁 △평화적 시위 투쟁을 억눌러오다가 마침내 전면적 무력 공세 감행 △이것은 유신 잔당들의 포악한 본성 드러내놓는 것 등의 내용이 담겼다. 
 
로동신문 본문은 ‘유신 잔당 파쇼 독재 정부의 대대적인 민주화운동 탄압을 맹비난’하는 내용으로 갈음할 수 있다. 
 
한국 “파쇼 독재” “유신 잔당”… 맹비난한 로동신문 보도 
 
광주의 일반 시민도 알 수 없는 더 상세한 내용은 하단에 나온다. 로동신문은 조선중앙통신 5월21일자 보도 4건을 게재했다. 
 
통신의 첫 번째 보도는 ‘광주의 폭동군중이 라주(나주)경찰서의 탄약고를 습격’이라는 헤드라인과 ‘경기관총과 실탄을 탈취, 경기관총으로 군대를 사격’ ‘목포에서도 2만 명이 반<정부> 시위’라는 부제목을 달았다. 
 
▲ 로동신문 1980년 5월22일자
통신은 서울에서 외신보도에 의하면이라고 인용 출처를 밝히면서 광주에서 학생, 시민들의 폭동은 21일 무력 충돌로 발전하여 군중과 군대 사이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전했다. 이어 굵은 글씨체로 반<정부> 폭동에 나선 광주시민들은 21일 라주로 달려가 라주경찰서 탄약고를 습격하여 경기관총 2정과 실탄 4만8천 발을 탈취하였다고 했다. 한국인도 잘 모르는 내용을 통신은 상세히 언급했다. “무장을 갖춘 그들은 이어 전남대학교부속병원 옥상에 경기관총을 걸어놓고 시민 탄압에 동원된 군대를 사격하였다”며 “이에 괴뢰군(북한 관점에서 한국군)이 맞서 나섬으로써 병원을 무대로 하여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한다”고 덧붙였다. 
 
통신은 또 “한편 광주에서 일어난 반<정부> 폭동의 불길은 목포에로 타 번져갔다”며 “21일 목포에서는 약 2만 명의 시민들이 반<정부> 시위를 벌리였다. 외신은 또한 광주 부근의 다른 도시들에서도 민주화를 요구하는 인민들의 시위가 전개되고 있으며 광주에서의 시위는 전라남도 전지역에로 확대될 기세를 보이고 있다고 전하였다”고 썼다. 
 
두 번째로 게재한 조선중앙통신 보도는 ‘광부’를 제목에서 특정해 눈길을 끈다. ‘폭발물을 가진 광부들을 비롯하여 농민 등 수많은 주민들이 광주에 모여들었다’는 부제목에 이어 더 굵은 글씨체의 헤드라인은 ‘무기고들을 부시고 무기 탈취, 괴뢰기관 점거’였다. 
 
통신은 “외신보도에 의하면 21일 광주시의 20만 폭동군중은 1만 명의 괴뢰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면서 사회의 민주화를 기어이 실현하고야 말려는 자기들의 굳센 결의를 과시하였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괴뢰당국(한국 정부)은 광주의 괴뢰군 부대들을 후원하기 위하여 서울에 진주시킨 2개 보병연대를 광주로 출동시켰다”고 했다. 
 
20사단 2개 연대 군분교 이동 정보 미리 입수한 듯  
 
눈여겨볼 대목은 ‘서울에 진주시킨 2개 보병연대를 광주로 출동시켰다’는 문장이다. 이는 ‘20사단 지휘 차량 피탈’ 또는 ‘군분교 습격’ 사건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은 시위대에 거센 공세에 밀려 20일 밤 광주역에서 철수한 공수부대를 대신해 지원 차 광주로 향하던 20사단 62연대 지휘부 차량이 21일 아침 8시10분 광주 길목인 광천사거리에서 복면을 한 정체불명의 괴한들로부터 습격을 당해 불에 탄 3대를 뺀 지프차 11대와 무기를 빼앗긴 사건이다. 
 
로동신문이 인용한 조선중앙통신은 21일자에 이미 2개 연대가 서울을 떠나 광주로 출동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을 대변해준다. 
 
광주에 북한 기자가 있었다고 가정할 때 로동신문이 22일 아침에 배부되는 시점을 고려하면 적어도 뉴스를 만들어 일본을 거쳐 북으로 전달되기까지 하루 정도는 소요될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이 한국군의 지원 계획과 이동 일정을 미리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단, 예외의 상황도 상정할 수 있다. 당시 일본의 5·18 관련 기록에 따르면 외신으로선 5·18 사건을 처음으로 특종 보도한 일본 교도통신(共同通信) 기자들은 광주에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장소에 사용 가능한 전화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 현장으로 가 서울의 지국장에게 소식을 전한 일화가 있다. 만약 북한 기자들이 21일 전화로 정보를 전파했다면 같은날 조선중앙통신 보도가 나오고, 로동신문이 통신 보도를 인용해 22일 아침에 배포할 가능성은 있다. 
 
당시 20사단은 3개 연대를 광주에 지원할 예정이었다. 21일 낮 기준으로는 2개 연대가 이미 광주에 도착했어야 했고 당일 밤 60연대와 포병대대까지 병력 이동을 예고하고 있었지만 습격 사건으로 이후 일정이 변동됐다. 결과적으로 2개 연대만 이동한 상황이었는데 로동신문은 정확히 “2개 연대를 출동시켰다”고 설명했다. 
 
계엄사와 20사단 작전처 상황 일지에 따르면 60·61·62연대는 각각 다른 이동 수단과 경로로 광주에 도착할 계획이었다. 61연대는 전날 밤 10시에 광주로 출발해 21일 새벽 4시에 도착하고 62연대와 사령부는 21일 새벽 2시30분에 서울 용산역을 떠나 아침 9시쯤 광주 송정리역에 다다를 계획이었다. 태릉에 주둔했고 양평에서 추가 병력이 합류했던 60연대와 91포병대대는 가장 늦은 21일 밤 9시 성남비행장에서 출발할 예정이었다. 통신은 60연대의 합류 계획은 언급하지 않았다. 군분교 사건 시점에는 60연대가 이동하기 전이었다. 
 
통신은 또한 “다른 한편에서는 광부를 포함한 시 주변의 주민들 수천 명이 폭발물을 가지고 광산과 농촌지역으로부터 광주 시내로 모여들었다”고 보도했다. 일부 주민이 장갑차를 빼앗고 학생들은 <향토예비군> 무기고를 부수고 총들을 빼앗았다고 보도한 통신은 “광주 가까이에 있는 한 경찰서를 습격하여 카빈총 200정과 다른 보총 100정을 포함한 수많은 탄약과 폭발물을 탈취하였다”고 구체적으로 획득한 총기류의 수량과 종류를 적시했다. 
 
아울러 “폭동 군중들은 버스와 장갑차들을 빼앗아 타고 그것을 폭압에 날뛰는 괴뢰군인들 속으로 들이몰아 저지선을 뚫고 나가곤 하였다”고도 보도했다. 차량 돌진은 광주역과 노동청·도청 앞 광장 등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 무력도발 현상이었으며 북한 매체가 이 사실을 소개한 것이다. 
 
통신은 “폭동 군중들은 중무장을 갖춘 괴뢰군과 격전을 벌린 끝에 그들의 장갑차를 빼앗아 <시청>을 점거하였다”고 덧붙여 전했다. 
 
3·4번째 통신 보도는 “광주시의 반<정부> 폭동 20만 명 규모로 확대” “광주의 시위대들이 목포·라주 등 다른 도시들에로 향하고 있다”는 제목으로 광주 소식을 전했다. 
 
 
▲ 전남도청에 '5.18 진상규명'이라고 적힌 구조물 앞으로 한 시민이 걸어가고 있다. (왼쪽) 북한 로동신문에 게재된 사진이 금남로에서 대치하는 시민군과 계엄군의 모습이라면 유력한 촬영 장소는 전남도청 쪽이고 사진의 구도에 비춰 최상층 또는 옥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북한 기자가 침투한 것이 사실이라면, 도청 옥상 부근에서 동영상을 촬영했다는 얘기가 된다. 남충수 기자
 
北 “방금 들어온 소식”… 매일같이 광주 영상 TV 보도
 
로동신문·조선중앙통신도 광주소식 끊임없이 타전 
국내자료에 없는 ‘시위대·계엄군 대치’ 사진 실리기도 
당시 계엄군 “도청 옥상 있던 괴한들이 찍은 사진 같다” 
  
北 기자 광주 남파 사실이면 어떤 루트로 침투했나 
 
A씨가 주장하는 북한 기자들이 남파된 시점은 상식 밖이다. 그는 “3개월 전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고 했다. 이 증언이 북한군이 5·18에 개입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되진 못한다. 그런데도 마치 5·18을 북한이 미리 예견했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어, 북한 기자들이 미리 와 있었다는 주장에 대해 되물었지만 직접적인 답변을 듣지는 못했다. 
 
그러면서 A씨는 서해안으로 침투한 과정을 “내가 아는 한”이라는 단서를 전제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5·18 석 달 전부터 전라도 쪽에 무인도가 많지 않습니까. 들어와서 잠복해 있으면서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렸다가 그다음에 해안선 배를 타고 이쪽 여기로 들어왔습니다.” 
 
침투 시점과 은신 장소, 내륙에 다다른 과정이 비교적 구체적이었지만 A씨의 발언은 복수의 증언 또는 물증을 통해 여전히 검증이 필요하다. 특히 북한 기자들이 총칼을 들고 5·18에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남한 정찰행위만으로도 국가보안법상 명백한 간첩 행위에 해당할 수 있다. 
 
우리 군 당국의 기록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이 10·26 사건으로 서거한 이후 북한의 대남 간첩 침투는 1979년 한 해 동안 5건에서 1980년에는 1월부터 5월 초까지만 해도 10건에 달하는 것으로 공식 기록됐다. 북한의 대남 침투가 빈발해졌다는 얘기다. 
 
서해안 도서 지역으로 침투했다는 A씨 발언과 관련해 정보기관에서 근무했던 이혜진(가명) 씨도 궤를 같이 하는 발언을 한 사실이 있다. 이씨의 발언은 A씨 증언을 보충할 뿐 증언이 사실임을 보장하는 것으로 보긴 힘들다. 
 
이씨는 지난달 19일 본지 주최로 열린 5·18 세미나에 발제자로 참석해 “전남 영광군 백수해안도로 끝자락에 있는 ‘백수해안 백바위’ 등은 북한 공작원의 침투 추정 지역”이라고 사실상 좌표를 찍은 바 있다. 
 
그러면서 “5·18 유공자 고은(본명 고은태) 시인의 연작시 ‘만인보’는 백수해안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물이 빠지면 흰 모래 위로 탱크도 들어올 만큼 단단한 해안이 나타난다”며 “인근에 북한 공작선이 자주 들락거린 송이도·대각이도·소각이도·낙월도가 있고 40노트로 항해 시 송이도에선 7분, 낙월도는 5분이면 해안에 닿는다”고 했다. 
 
박명규 5·18역사학회 회장도 최근 본지 인터뷰에서 “전라도 해안선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해안선을 이용한 침투와 탈출이 용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1980년 5월 합참의장이 전남 목포 해안의 경계를 해제한 사실에 의문을 갖고 연구해 왔다고 한다. 
  
北, 허위 사실로 주민에게 대남 적개심 키워 
 
본지와 접촉한 복수의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은 5·18 기간에 조선중앙TV에서 매일 같이 광주 영상물들을 상영했고 로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도 연속해서 한국 소식을 타전했다. 
 
특히 중대 방송으로 취급해 온종일 광주봉기를 비중 있게 방영했다는 증언도 많다. 광주시민이 무장을 하고 화염병을 뿌리는 장면, 최루탄을 발사하는 경찰 등을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라는 멘트로 시간마다 반복해 보여줬다고 한다. 
 
또한 ‘역사로서의 5·18(김대령 저·비봉출판사)’에 따르면 임신부의 배를 가르는 장면과 어린 여대생의 옷을 벗기고 가슴을 도려내는 장면을 비롯한 끔찍한 살인 장면이 북한 방송에서 방영됐다고 한다. 
 
5·18 기간에는 역대급 유언비어들이 난무한 것으로 기록된다. 대부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거나, 40여 년이 흐른 현재 광주시민 대다수가 믿지 않는 내용들이었지만 당시엔 파급력이 컸다고 5·18연구가들은 입을 모았다. 
 
이런 가운데 북한은 연일 끔찍한 영상물들을 방영하며 북한 주민들로 하여금 대남 적개심을 키우게 했다고 한다. 북한 주민 중 여자들은 “무서워서 사람 죽이는 장면들을 볼 수가 없었다”는 증언들도 있다. 
 
사진 속 장소는 금남로 추정… A씨 “조선중앙TV 생중계 장면
 
로동신문 속 사진에서 시위대와 계엄군은 대치하고 있다.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동일한 사진은 아직 5·18 관련 기록물로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종적으로 검증을 거쳐서도 같은 사진이 국내에 없다면 북한 기자들이 찍은 사진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외신 영상을 인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로동신문은 기사에서 ‘외신에 따르면’이라고 출처를 인용하고 있지만 사진에는 출처를 명시하지 않았다. 실제 북한 기자가 찍었다고 해도 현장에서 취재했다는 내용을 언급하지 않았을 것으로 5·18 연구가들은 추정한다. 
 
연구가 B씨는 사진 속 장소와 관련해 “금남로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광주에서 사진에 있는 곳처럼 좌우로 폭이 넓은 도로는 금남로로 봐야 한다”며 “도로 폭이 넓은 점으로 미뤄 전남대가 아닌가 생각했지만 당시 학생과 군경이 대치한 곳은 학교 밖이기 때문에 (로동신문) 사진 속 장소는 아닌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연구가 C씨는 “가로수 배열로 보아 북동성당 쪽으로 처음에 추정했지만 금남로일 것으로 생각된다”면서 정확한 분석일 수 없다고 덧붙였다. 
 
합동참모본부에서 북한 정보를 취급한 예비역 장성 D씨는 사진 정보에 대해선 함구했지만 “당시 김일성은 남한 혁명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며 “북한 기자들의 광주 침투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했다. 김일성의 역점이라는 D씨의 발언 역시 북한이 군을 남파해 5·18에 개입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5·18 당시 계엄군이었던 E씨는 “전남도청 앞 분수대 대치 상황이라고 가정할 때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북한 기자 추정 인물이) 도청에서 사진을 찍은 결과가 도출된다는 점”이라며 “당시 높은 고층 건물은 도청밖에 없었다”고 분석했다. 
 
탈북 제보자 A씨는 “로동신문의 사진은 1980년 5·18 당시 북한 조선중앙TV 방송에서 생중계했던 장면”이라고 부연했다. 한 장씩 찍는 스틸컷이 아니라 시쳇말로 영상 캡처라는 설명이었다. 그러곤 “국내 모든 신문·방송이 생중계하는 국민대토론회가 열리면 갖고 있는 증거들을 모두 공개하겠다”고 덧붙였다. 
 
광주=허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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