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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 잔혹성 호도한 대표적 사건… 드러나는 진실
[단독: 5·18 진실 찾기⑮] 임신부 최미애 씨 쏜 건 軍 아닌 괴한들
군복 입은 사람들이 쐈다고 증언… 계엄군 위장 세력 분명
당시 軍은 전남대서 시위대에 포위당해 꼼짝 못 한 상황
허겸 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3-09-19 19:39:27
▲ ❶임신부 최미애 씨는 1980년 5월21일 오후 1시50분을 전후해 전남대 정문에서 직선거리로 300여 m 떨어진 중흥동 주택가에서 총격을 받고 숨졌다. 이 시각은 계엄군(3공수)이 시민군에 가로막혀 전남대 캠퍼스 안에 갇힌 채로 수세에 몰릴 때였다. 계엄군이 명령을 어기고 주택가까지 오기 위해선 시민군이 점령한 다리와 정문 앞 사거리를 건너야 했기 때문에 최씨의 피살은 군이 아닌 무장괴한의 소행이라는 분석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❷ 최씨의 검시서 ❸ 생전 최씨의 모습.
 
1980년 5월 계엄군에 의해 숨진 것으로 그동안 알려졌던 임신부 최미애 씨가 군인이 아닌 무장 괴한들에 의해 피살된 정황이 드러났다. 
 
5·18 당시 군복을 입은 이들이 쏜 총에 임신부가 사망했다는 소문은 광주 시민들에게 빠르게 전파됐으며 군중의 대대적인 분노를 촉발한 결정적 사건 중 하나였다. 
 
특히 임신 7개월 차였던 최씨가 퇴근이 늦어지는 남편을 집 밖으로 나와 기다리던 중 이마에 총알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는 소식은 5·18 기간 계엄군의 잔혹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오늘날까지 회자된다. 
 
19일 본지가 단독 입수한 현직 의료인의 5·18 검시조서·검안서 재분석 결과와 관련 증언을 종합하면 최씨의 직접적인 사인은 두부관통 총상으로 사망자 검시서에 기록됐다. 
 
구체적인 부위는 ‘전두부에서 후두부로 관통’으로 적혔다. 총알이 앞머리로 들어가 뒷머리로 나온 것이다. 누군가 최씨의 정면에서 얼굴(머리)을 정조준해 쏜 것으로 볼 수 있다. 
 
검시서에 따르면 최씨는 5월21일 오후 1시50분 광주시 북구 중흥2동 331-45 앞길에서 사망했다. 1957년 2월생인 최씨는 사망 당시 23세였다. 검시는 1980년 6월7일 오전 11시 조선대 부속병원에서 진행됐다. 
 
광주지검 김규섭 검사가 검시했고 의사(박규호)·군검찰관(김이수 중위)·경찰관(주영근 경사)·군의관(정종일 대위)이 각각 검시에 참여했다. 시신 인수자는 남편 김충희(당시 33세) 씨로 돼 있다. 
 
“M16 총상은 軍 소행 개연성… 그러나 계엄군은 시위대 장악한 용봉교 못 건너”
 
검시서에는 계엄군이 쐈다는 풍문을 입증하듯 사인은 M16 총상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M16이 공수부대원의 주력 화기였던 점으로 미뤄 적어도 의료기록에 따르면 군인이 쐈다는 소문은 뒤늦게나마 사실성을 확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최씨의 사망은 격앙된 광주 민심에 불을 지핀 격이었다. 5·18증언집을 종합하면 “계엄군이 임산부(정확한 표현은 임신 중인 임신부)를 무자비하게 쏴 죽였다” “임산부의 이마를 쏴 죽였다” “엄마가 죽은 뒤에도 태아가 살아 움직였다더라”는 말들이 삽시간에 번졌다. 
 
이 가운데 머리에 맞았고 태아가 한동안 살아 있었다는 소문은 사실로 보인다. 숨진 최씨의 남동생인 유족 최정구 씨는 5·18증언집에서 “머리에 총을 맞은 누나는 (중략) 죽어 있었다”며 “누나를 집으로 옮겨 놓으니 뱃속의 아이가 마구 뛰었다. 아이라도 살려보려고 여러 병원에 연락해 보았으나 아무도 와 주지 않았다. 결국 뱃속의 아이도 누나와 함께 죽고 말았다”고 황망했던 순간의 기억을 전했다. 
 
당시 군과 대치하던 시위대는 이 소식에 크게 동요하며 격분했다. 최씨가 숨진 곳에서 금남로는 걸어서 5분이 채 안 되는 가까운 거리다. 임신부가 숨진 시각 금남로에는 시민군 측 추산 10만여 명의 시민이 전남도청을 사수하던 계엄군과 대치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다. 
 
이때가 5·18에서 가장 뜨거운 논란거리 중 하나인 ‘집단발포(포사격이 아니므로 정확한 표현은 집단사격)’ 주장의 근거가 된 시점임을 감안하면 군인이 임신부를 쏴 죽였다는 소문은 그 진위와 상관없이 시위대를 격노하게 만든 데다 계엄군에 대한 폭발적 반발로 이어지는 한 요인이 됐다고 우파의 관점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을 들여다보는 5·18연구가들은 일치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실제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 전개는 당시 광주시민이 무고한 광주 임신부 죽음에 얼마나 크게 영향을 받았는지를 대변한다. 최씨의 죽음과 태극기를 들고 있다 옥상으로부터의 하향 추정 사격으로 머리에 총격을 받고 죽은 조사천 씨 사망 사건은 시위대가 계엄군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데 충분한 동기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태극기를 펼쳐 든 비무장 시민과 임신부가 연이어 총에 맞아 죽었기 때문이다. 조씨와 최씨는 둘 다 머리에 총알이 관통했다. 
 
따라서 계엄군이 임신부 최미애 씨를 죽였는지를 규명하는 것은 계엄군과 시민군의 대치라는 5·18의 최초 갈등 단계가 어떻게 교전 단계로 확전됐고 양측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됐는지를 이해하는 데 핵심 열쇠가 된다. 
 
“계엄령 작전 중 탈영은 사형… 군복 입고 군중 속에 들어가 시민 총 쏴 죽인다고?” 
 
첫 번째 의문은 과연 계엄군이 머리에 총구를 겨눠 격발했는지다. 군복을 입은 이들이 총을 쐈다는 주민 목격자들의 증언이 있던 만큼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다고 전제해도 가해자들이 군인이라고 보기엔 당시 작전 상황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의문이 강하게 제기된다. 
 
당시 3공수 16대대 팀장 김응근 대위는 5·18을 추적해 온 유튜브채널 참깨방송과 가진 인터뷰에서 “(전남대 앞) 큰 사거리만 방어했다”며 군인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개별 행동으로 최씨 사망 현장까지 갈 수 없던 상황이라고 말했다. “3공수 병력들이 전남대 앞 하숙촌이자 최씨가 죽은 현장 골목까지 깊숙이 들어올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그러면서 김 대위는 “흥분한 일부 병력이 갈 수 있지 않나”라는 질문에도 “아니다. 큰일 난다”고 분명히 못 박고 나서 “데모대원들이 너무 많이 있어 거기 들어갔다간 거의 죽음이고 무식한 놈 아니면 안 된다”고 가능성을 차단했다. 
 
당시 계엄군은 시위대에 둘러싸인 채로 전남대 안에 있었다. 시쳇말로 코너에 몰려 있던 상황이다. 같은 시각 10만여 명의 시위대에 계엄군이 포위된 전남도청 앞 상황과 비슷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병사들이 용봉교(龍鳳橋)를 건너가 시위대가 점령한 민간 지역을 휘젓고 다니며 민간인을 쏴 죽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당시 계엄군 출신 예비역들은 한결같이 증언한다. 
 
본지는 이번 취재 과정에서 1980년 5월의 현장을 지킨 계엄군 출신 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이 질문을 던졌지만 “(군인이 민간인을 쏴 죽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대답한 인사는 한 명도 없었다. 계엄군 출신 인사들은 “군인도 사람”이라며 “동료가 총이나 돌에 맞아 죽고 다치는 걸 보면서 흥분한 나머지 폭력을 휘두르거나 과도하게 진압하는 과격하고 비정한 행동은 했겠지만 국민을 쏴 죽이는 건 별개의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이는 비단 명령 불복종의 문제가 아니라는 첨언도 있었다. 한 군 출신 인사는 “계엄령 작전 상황에서 명령 불복종은 군법회의에 회부돼 최고 사형이 언도될 수 있다”며 “가지 말라는 데 작전지를 탈영할 군인도 없거니와 가면 몰매 맞아 죽을 게 뻔한 곳으로 들어갈 어리석은 탈영병도 없다”고 조언했다. 
 
계엄군이 전남대 캠퍼스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포위된 상황은 당시 다수의 시민 증언에서도 파악된다. 
  
“전남대 갇힌 공수부대… 어찌 거리 나가 사람 죽이나”
 
공수대원 40명 활보했다는 주민들 “얼굴에 위장했더라” 
당시 대원들 위장크림 안 써… 오히려 시위대가 검은 칠
투입대원 3분의 2가 호남 출신… 도민 학살 터무니 없어 
 
“선임하사가 광주 사람인데 민간인을 총으로 쏜다는 건 말도 안 돼” 
 
장준영(당시 19세) 씨는 5·18증언집에서 “우리는 전남대에서 투석전이 벌어졌다는 연락을 받고 전남대 정문으로 갔다. 그때 시각이 12시30분 정도 되었을 때였다”며 “전남대 로터리에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로터리에서부터 전남대 정문 입구까지 발 디딜 틈이 없이 꽉 차 있었는데 (중략) 그때 계엄군 1개 소대 정도가 전남대 내 당산나무 조금 못 미친 곳에 배치돼 있었다. 시위 군중은 전남대 법대 밑 쪽에까지 꽉 차 있었다. (중략) 시위대는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고 증언했다. 
 
3공수 15대대장 박종규 중령은 월간조선 2005년 1월호에서 “‘과격한 진압을 삼가라’는 말은 돌에 맞아 죽으라는 지시나 다름없었다”고 했다. 
 
박 중령은 “시위 군중은 이미 장갑차와 군용차량으로 무장돼 있었고 우리에게 위협을 주기 위해 전남대학 외곽도로를 질주하면서 위협적 시위를 계속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전남대 바깥쪽은 이미 시위대에 접수됐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광주사태가 절대로 ‘시민항쟁’이나 ‘민주항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그들은 군의 공격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군에 공격을 감행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극렬한 시위분자들이 선량한 민주시민과 계엄군을 싸움 붙인 격”이라고 증언했다. 
 
당시 전남도청 11공수 62대대 최상필 대위는 “공수특전여단은 세계적인 특수부대 이자 최정예 요원 부대로 군기가 엄격하다”며 “공수요원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한 부대가 ‘임산부의 배를 갈랐다’ ‘여고생의 가슴을 도려냈다’ 하는 그러한 상황은 있을 수도 없다”고 강하게 부인했다. 
 
“밀고 밀리는 대접전이 전남대학 정문에서 수십 차례 있었다”는 박 중령의 증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상황에서 한두 명도 아니고 40명의 계엄군이 군복을 입고 성난 군중이 장악한 학교 바깥쪽에서 돌아다닌다는 말은 상식적이지 않다. 
 
전남대에 주둔한 김 대위는 “팀장인 나도 못 쏘는데 병사가 함부로 총을 쏠 수가 없다. (공수부대는 사병보다 부사관으로 구성돼) 우리 같은 경우는 주로 간부들이 많기 때문에 전부 하사관 장교이고 집에 다 가족들이 있다”며 “우리 선임하사가 광주사람인데 민간인을 총으로 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계엄군이 임신부를 죽였을 가능성을 일축했다. 
 
이웃 목격자 “여기 말씨 아닌 얼굴 검게 칠한 이들이 돌아다니며 막 쏴 죽여” 
 
임신부 최씨가 숨진 전남대 앞 중흥동 사망사건 현장에 있었던 A씨는 갑자기 들이닥쳐 집을 수색한 공수부대원 40명이 최씨를 죽였다며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A씨는 방송에서 “공수부대가 길에서 총을 쏩디다. 가다가 보니 여자가 평화시장 옆에서 딱 꼬부라져 버리고 그 여자가 별안간 죽어 버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얼굴이 우둘우둘해 갖고 그 공수부대들이 (얼굴에다) 뭣을 막 칠했더라고. 한번 쳐다보니까 얼굴이 막 무섭디다”라며 당시 놀랍고 심란한 마음이 들어 담장을 넘어 도망갔다고 했다. 옷은 “군복입었지라 공수부대들 것”이라고 덧붙였다. 
 
A씨는 처음 대면한 순간에 대해 “공수부대가 우리 집으로 싸악 한 40명이 달려들었어. 나 보고선 학생들 있으면 내놓으라고 그러더라”고 기억했다. 
 
이어 “우리 집은 학생이 없소 보시다시피 문을 내가 다 열어 놨어. 열어 보이니까 나가더니 한 놈이 내 모가지를 잡고서 ‘왜 모가지를 잡아요’ 내가 그러니까 한 사람이 ‘놔두라’고 그랬다”며 “군인이 여기 말씨가 아닙디다”라고 했다. 
 
광주 말씨를 쓰지 않고 군복을 입은 이들이 얼굴에 칠을 했다는 증언은 공수부대원의 증언과 배치된다. 
 
3공수 중대장 김 대위는 “공수부대는 광주에서 진압할 때 얼굴에 위장크림을 바르지 않았죠”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또한 전남대 교문 건너편 상황에 관한 질문에도 “공수부대 복장을 한 애들이 있었다. 걔네들이 폭도들인데, 아마 그것을 조장을 하기 위해서 쏘고 그랬다. 우리(공수대원)는 절대로 이탈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역시 공수부대원이 얼굴에 위장크림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질문에도 “그렇다”고 거듭 강조했다. 
 
전남도청을 사수하던 11공수 62대대 문병소 중사도 유사한 증언을 했다. 문 중사는 “21일 오후 2시까지도 저희들은 얼굴에 무슨 위장크림을 바르고 그런 과정이 전혀 없었다”고 했다. 
 
오히려 시민군 쪽에서 위장한 사람들은 한 두 사람씩 있었다고 증언했다. 
 
“공수부대에 위장크림 지급 안 돼… 軍 소행처럼 보이게 모략한 정황” 
 
문 중사는 “특수분장을 하고 이런 사람들은 시민군들 대중들 저 한 블록 뒤에 군용지프차라든지 APC장갑차·대형화물차·버스·택시 같은 데 흰띠 수건 같은 걸 머리에 칭칭 감고 위장을 한 그런 사람들은 한 두 사람씩 차량에  탑승해 가지고 깃발 같은 걸 흔들고 이런 걸 20~30m 조금 멀게는 한 50~100m 중간 중간에 차량을 끌고 움직이는 그런 사람들은 바로 5월21일 오후 2시 직전까지는 제가 가까이서 봤다”고 진술했다. 
 
‘흰띠 수건으로 위장을 한 사람’을 뜻하는 건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혹시 위장크림 바르고 그런 것 못 보았습니까’라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고 뒤이어 “저희들은 위장크림을 바르고 할 시간적 여유 조차도 없고 그걸 바르면 끈적거린다”고 덧붙였기 때문이다. 
 
문 중사는 “그 당시 제품들이 구두약 같은 것이고 미군에서 혹시 나오는 걸 한 번씩 지급받으면 구두약처럼 진득해서 얼굴에 바르면 피부가 약한 사람은 뭐가 생기고 이랬다”며 “광주에선 일체 그런 제품들이 지급된 적이 없다”고 보충 설명했다. 이 증언을 종합하면 공수부대는 5·18 기간에 얼굴에 위장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시민군 중에서 위장한 이들이 가끔씩 목격됐다는 설명으로 풀이된다. 
 
박명규 5·18역사학회 회장은 최근 본지와 만나 “국군이 시민을 학살한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계엄군 학살설을 강하게 부인했다. 그러면서 “특히 당시 공수부대원의 3분의 2는 전라도 출신이었고 현지 계엄사령관들도 전라도 출신이었다”며 “계엄군의 광주·전라도민 학살 소문은 터무니 없다”고 강조했다. 5·18역사학회는 이 같은 내용을 성명으로 발표한 바 있다. 
 
육사총구국동지회 초대 회장을 지낸 이두호 (사)자유수호국민운동 대표와 국가정보원 고위 간부를 지낸 김영택 자유수호국민운동 상임고문은 “(괴한들이) 계엄군으로 위장한 뒤 시민에 만행을 저지르면 계엄군에 책임을 전가할 수 있다”며 그 수법은 군사학적으로 ‘모략전’이자 ‘게릴라전’의 양상을 보인다고 분석했다. 
 
최미애 씨 사망 검시서에 대한 의학적 분석을 비롯해 당시 상황을 종합적으로 연구해 온 한 의료인은 “증언들로 미뤄 짐작하면 최씨는 계엄군으로 위장한 약 40명 정도의 무장단체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최씨가 살해되던 오후 1시50분에는 시위 군중의 파상 공격에 전남대 캠퍼스를 방어하고 있던 3공수여단이 진땀을 흘리고 있던 시각이었다”며 “그런 시각에 일부 병력이 캠퍼스를 빠져나가 독단적으로 중흥동 골목을 돌면서 시민들을 살해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다”고 밝혔다. 
 
 
광주=허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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