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㉓ 전문가만이 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 당시 계엄군 출신 증언
[단독: 5·18 진실 찾기] <23> “도청 TNT 설치 ‘北 소행’ 직감”
열차 2량 분량 터졌다면 이리역 참사 맞먹는 피해
순수한 민주화운동이라는 주장 수용하기 어려워
허겸 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3-11-15 00:05:00
▲ [1] 1980년 5·18 당시 방독면을 쓴 남성들이 인명살상용 세열 수류탄과 폭약, 도화선 등을 분류하고 있다. 인화성 폭발물을 다룰 땐 가스가 분출된다는 점을 인지한 행동이란 점에서 폭약 처리에 능숙한 이들이 순수 시민인가에 대한 의문이 끊이질 않았다. [2] 배승일 문관이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을 들어 보이고 있다. [3] 육군본부가 1981년 발간한 ‘소요사태와 그 교훈’ 46쪽. “광주 소재 한국화약(주)의 보급소에서 폭약 2500상자와 뇌관 35만여 개, 도화선 4만m 등을 탈취했다”고 적혀 있다. [4] 광주매일이 1995년 펴낸 책 ‘正史 5.18’은 “다이너마이트는 계엄군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수단이었을 뿐 공격용 무기는 아니었다”는 시민군의 입장을 전하고 있다.
  
북한이 사전 계획하고 주도한 것으로 미 정보당국이 확인한 1980년 5·18 당시 전남도청 등 광주 일대에 설치된 폭발물을 운송·처리한 계엄군 장교는 “열차 2량 분량의 폭발물을 회수하면서 북한의 소행을 의심했다”고 증언했다. 
 
탄약사령부 산하 제1병기탄약창 운영과장으로 근무했던 계엄군 A씨는 최근 스카이데일리와의 통화에서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가 아니고선 도저히 설치할 수 없는 폭발물의 양이어서 참담한 심정을 느꼈다”며 이같이 밝혔다. 그러면서 “만약 폭발했다면 이리역 폭발 사고와 맞먹는 수준의 인명·재산 피해가 발생했을 텐데 폭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수한 민주화운동이라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현재 전라북도 익산시 위치에 있는 이리역 폭발 사고는 5·18이 일어난 해보다 3년 앞선 1977년 11월 발생했다. 다이너마이트 22t을 비롯해 폭약 30t을 수송하던 화약 열차가 이리역에서 폭발해 반경 1km까지 초토화된 사건이다. 사망 59명·중상 185명 등 사상자만 1402명이었고 완전 파괴 또는 반파된 가옥이 1591채, 일부 파손된 주택은 6042채에 달했다. 1674가정에서 이재민 7873명이 나왔다. 
 
1970년 5월 광주에서 장교로 임관해 1972년부터 병기 관리를 해 온 A씨는 이리역 폭발 사고 대책 마련에도 관여했고 5·18을 전후해 광주에 있는 전투병과교육사령부(CAC) 산하 부대에 이동정비로 파견 나간 적이 있어 현지 사정에도 밝다. 
 
지금까지 5·18 당시에는 전라남도 도청 민원실 지하에서 다이너마이트 2100발(8t)과 수류탄 450발이 계엄군 군속(현 군무원)에 의해 성공적으로 해체·수거된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A씨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 수거된 폭약의 양은 가히 충격적인 수준이다. 도청 외에도 다양한 곳에 실로 어마어마한 폭발물이 설치됐었다는 방증이다. 
 
이에 대해 A씨는 “일반 시민으로선 도저히 엄두를 낼 수 없는 양이었다”며 “수거한 양만 해도 탄약고 몇 개를 지어야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심지어 “막 왕창 쏟아졌다”는 표현까지 그는 입에 담았다. 
 
계엄군은 작전명 ‘뉴캡투(New Cap-2)’에 따라 광주에서 수거한 폭발물을 경남 김해의 K-2공군전투비행단으로 수송했다. 뉴캡투는 ‘야전군 탄약적송계획’이다. 전쟁 시 야전부대 적재적소에 탄약을 배송하는 군수품 조달 작전의 일환이지만, 5·18 당시엔 광주에서 수거한 폭발물을 안전하게 회수·처리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운용됐다. 
 
이 작전에 따라 2만여 평 규모의 탄약창의 하치장(물품 보관·관리소)에는 군 전용 철로와 이후 트럭 편으로 옮겨진 폭발물이 내려졌다. ‘충정작전(도청 점령 작전)’을 통해 계엄군이 압수·수거한 시민군 폭발물 중 TNT를 제외한 나머지 전량이 반입된 것이다. 
 
A씨는 “몸통과 뇌관이 분리된 상태로 도착한 수류탄도 있었지만 실밥과 고무줄로 뇌관이 묶인 채로 아슬아슬하게 온 경우도 있었다”고 아연실색했던 경험을 떠올렸다. 그러곤 “11t차라고 군인들이 부르는 대한통운 차 한 대에 보통 4t 분량의 폭발물이 운반되는데 총 3대 차량, 12t 분량의 수류탄이 들어 있었다”며 “나머지 한 차(4t)에는 백색 오성 신호탄 등의 인화성 물질과 폭발물이 적재돼 들어왔다”고 말했다. 
 
그는 “모두 합쳐 열차 2량 분량인데 그 규모가 너무 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며 “도대체 무슨 일이 그곳에서 벌어진 것인지 폭발물 규모만 보고도 짐작할 수 있었을 정도”라고 덧붙였다. 
 
육군본부가 5·18 이듬해인 1981년 5월 발간한 ‘소요진압과 그 교훈’46쪽에는 “특히 폭도들은 복면과 마스크를 착용한 채 화순광업소를 폭파하고 화약 및 TNT를 탈취하는 한편, 광주 소재 한국화약(주)의 보급소에서 폭약 2500상자와 뇌관 35만여 개, 도화선 4만m 등을 탈취했다”고 적혀 있다. 
 
기록들에 따르면 시민군은 화순광업소 외에도 한국화약(주) 광주창고와 화순~광주 사이에 있는 지원동 석산채석장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훔쳤다. 김대령 박사의 ‘5·18 유공자 무용담(비봉출판사)’69쪽에 따르면 민수용(민간용) 다이너마이트와 일부 군용 TNT가 섞여 있었다. 
 
이 가운데 일부는 전남도청 지하실로 반입됐고 일부 TNT는 통합병원 부근에도 설치됐다. 
 
이 책에 따르면 학군단(ROTC) 장교 시절 특수전 학교에서 폭파 과목을 수강해 도청 폭발물 설치 사건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석관원 씨는 공병 부사관 출신의 공인중개사 김영덕 씨가 폭약의 양이 이리역 대폭발 사고 때보다 2배 이상이라는 것을 알고 경악했다고 한다. 
 
수많은 무고한 시민이 대폭발 때문에 희생될 위험이 있었고, 이 사실을 상무대 교회에서 사역했던 문용동 전도사에게 알렸다. 김 씨도 공병부사관 출신이었지만 전남도청에 설치된 폭발장치 뇌관을 스스로 해체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시민 증언을 토대로 쓴 김 박사의 이 책과 지만원 박사의 ‘12.12와 5·18’(도서출판 시스템) 461~465쪽에 따르면 이 폭발물이 터지면 이리역 폭발 사고와 같은 규모의 비극을 초래할 것이라는 판단에서 시민수습위원회 소속 전남대생 김창길 등은 폭약 해체를 위한 노력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 폐허로 변한 이리역 대폭발 사고 현장.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대폭발 참사났다면 누구도 민주화운동이라 못 할 것”
 
전교사 폭발물 전담요원 시민군으로 위장 침투… 몰래 해체 
5·18 영웅’ 윤상원 수류탄 자폭… 폭탄해체한 게 천만다행 
시위대는 엄포용이라 주장했지만 광주시민 볼모로 삼은 것 
 
김창길 학생은 전투병과교육사령부(CAC)와 은밀히 접촉했고 전교사는 폭발물 전담 요원을 시민군으로 위장 투입했다. 전교사 병기근무대 소속의 배승일 군속 등을 무장시민군이 장악하고 있는 도청 지하실로 2회씩이나 잠입시켜 25일에는 밤 9시부터 새벽 1시까지, 26일에 다시 잠입해 오전과 오후에 걸쳐 피를 말리면서 뇌관을 제거했다. 
 
배씨는 월간조선 2020년 5월호에 보도된 5·18 특집 인터뷰에서 “도청 내의 TNT·다이너마이트 뇌관과 손가락 길이 정도의 도화선으로 장치한 폭약 뭉치 2100개의 뇌관을 제거한 후 충전물 콤포지션(도폭선)과 한 발당 위력 18m인 인마살상용 세열수류탄 450발의 신관을 제거했다”고 말했다. 
 
그는 “최루탄 신관을 제거하려고 했으나 잘못하다가는 탄로가 날까 봐 그만두고 다량의 전기뇌관·비전기뇌관·소구경 탄약인 카빈탄·M1탄·30LMG탄·50MG 탄약을 분류했다”고 증언했다. 
 
월간조선은 당시 도청에 다이너마이트와 수류탄 등 폭약이 8t 트럭 4대분이 있었고 추정치지만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라고 보도했다. 
 
김 박사의 ‘5·18 유공자 무용담’은 전남도청 지하실에 대한석탄공사 화순광업소에서 탈취한 8t 트럭 1대 분량의 다이너마이트(TNT)와 콤포지션에 전문가의 솜씨로 뇌관까지 설치해 언제라도 폭발시킬 수 있는 준비상태로 만들어 놓고 계엄군이 다시 시내로 진입해 오면 이를 폭파해 광주시를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협박했다고 했다. 
 
시민군은 80만 인구가 사는 광주시 도심 한복판인 전남도청 안에 수십 t의 TNT 폭발 장치를 설치해 놓았다. 그 TNT 폭발 장치는 집단자폭용 무기였고 도청 옆에는 주택가가 다닥다닥 붙어있었기에 일순간에 금남로와 산수동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 피해는 광주 전 지역에 미칠 것이었다. 
 
특히 5·18 연구가들은 인화성 물질로 가득한 창고가 대폭발한 2020년 8월4일 레바논 베이루트 항구 창고 폭발 사고와 종종 비교한다. 당시 157명이 사망하고 5000명이 중상을 당했다. 이재민은 30만 명이었다. 
 
5·18 연구가들은 베이루트는 주유소와 도시가스·주택이 없는 곳에서 발생했지만 1980년 5월 전남도청 주변에는 주유소와 도시가스가 줄줄이 연결된 주택들이 밀집해 있어 폭발 시 피해 규모가 베이루트를 앞질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광주 최고의 폭약 전문가가 분해하는 데만 꼬박 이틀이 걸렸다. 그런데 5월22일 단 몇 시간 내에 수십 t의 산업용 다이너마이트와 군용 TNT를 도청으로 수송해 전광석화처럼 대형 폭파망을 구성하고 뇌관 설치를 완료한 난동자들이 누구인지 의문은 끊임없이 계속됐다. 
 
무등일보는 2015년 4월 화순광업소에 근무하던 김영복 등 13명이 “순전히 엄포용”으로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했다고 보도했다. 이 글은 신문기자가 아닌 당시 광주시 인권옴부즈맨으로 일하던 안종철 씨가 썼다. 
 
북한 개입설을 반박한 책 ‘5·18 때 북한군이 광주에 왔다고?(아시아문화커뮤니티·2016년)’의 저자인 안씨는 문재인정부가 만든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위·위원장 송선태)에서 부위원장을 맡았다. 조사위는 내부 문제로 9월1일 안 부위원장에 대해 사직 권고안을 냈고 위원 7명 중 4명이 찬성했다고 광주MBC가 보도했지만 안씨는 지난달 13일 국회에서 열린 5·18조사위에 대한 국정감사에 출석한 바 있다. 
 
안씨는 2015년 무등일보 기고글에서 지 박사가 발언했던 전남도청 지하실에 있던 ‘8t 분량의 TNT, 40㎞ 길이의 도화선’이 거짓이라고 지적하며 실제론 16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를 “한 신문사에서 펴낸 ‘5·18 正史(정사)’”라고 밝혔다. 광주매일이 1995년 펴낸 책이다. 정작 ‘正史 5·18’ 352쪽에는 “이날 밤 전남도청 지하실로 옮겨진 다이너마이트는 무려 8t 트럭 1대분, 전남도청은 물론 광주 시내 중심가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엄청난 양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지 박사가 인용했던 ‘8t 분량의 TNT'라는 내용과 동일하게 기재된 것이다. 
 
또한 이 분량은 광주일보 1996년 10월10일자에 ‘당시 폭약량은 리어카 2~3대 분량’이라는 시민군 측 증언보다도 훨씬 많은 것이다. 
 
‘正史 5·18’ 350쪽에선 “가공할 만한 살상 능력을 지닌 다이너마이트를 입수한 시위대는 환호한다 (중략) 다이너마이트를 효율적으로 활용한다면 광란상태에 빠져 있는 계엄군들과의 거리를 최소한이나마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라며 “다이너마이트는 계엄군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수단이었을 뿐 공격용 무기는 아니었다”고 적혀 있다. 
 
이에 대해 뜻밖에 북한 서적은 그 목적을 달리 설명한다. 
 
북한이 발간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588쪽에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건물을 몽땅 폭파해 버리기 위한 모든 장치까지 다 준비했다. 그런데 적들이 공격을 몇 시간 앞두고 밀정을 침투시켜 뢰관(뇌관)을 모두 분해해 버렸기 때문에 계획대로 실현되지 못했다”고 했다. 
 
또한 시민군 측이 5·18의 영웅으로 칭송하는 윤상원이 숨지기 전 수류탄으로 자폭한 사실도 드러났다. 배승일 군무원이 뇌관을 폭약의 몸통과 분리하지 않았다면 연쇄 폭발로 광주시가 참혹한 불바다로 바뀔 수 있었다는 점에서 윤상원의 수류탄 자폭사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김 박사의 ‘5·18 유공자 무용담’ 68쪽에는 “윤상원이 5월27일 아침 수류탄으로 자폭한 이유도 폭발물 뇌관에 불을 붙이려는 순간 수십 톤 분량의 뇌관이 전부 분리된 것을, 시민군 중에 누군가가 자기를 배신했다는 것을 그때에야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고 돼 있다. 
 
5·18에 대해 연구해 온 신기훈 육군3사구국동지회 초대회장은 “전남도청의 다이너마이트가 터져서 이리역 폭발사고처럼 현장이 폐허로 돌변하고 광주시민들이 숨졌다면 누구도 5·18을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를 순 없었을 것”이라며 “광주시민 전체의 생명을 인질로 삼은 반란 같은 폭동이었지만 온건파 학생들과 광주에 살지 않는 계엄군은 목숨을 걸고 광주시민을 이리역 폭발 사고의 악몽으로부터 해방해 준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광주시민이 잘못 이해하는 것처럼 경상도 계엄군이 전라도 시민을 죽이러 왔다면 계엄군이 들통나면 죽을 각오로 시민군으로 위장해 들어가 그 엄청난 분량의 뇌관들을 하나씩 분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난동자가 누구인지 실체를 규명하는 작업은 호남인을 바라보는 외지인의 편견을 없애는 일에도 분명히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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