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㉙ 명본 이사장, 軍 출신 목격자 증언 확보
[단독: 5·18 진실 찾기] <29> “무기고 습격 폭도들 北 말씨 썼다”
5월21일 20여 명 화순 무기고 덮쳐… 말리자 “개수작 말라우”
돌까지 마구 집어 던져… 당시 예비군 중대장 무릎에 큰 부상
허겸 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3-12-27 00:05:00
▲ 5월21일 정오 무렵 신원미상의 남성들이 해남 경찰서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있다.
 
북한이 사전 계획하고 주도한 것으로 미 정보당국이 확인한 1980년 5·18 당시 무기고를 습격한 폭도들이 북한 말씨로 욕설을 했다는 증언이 처음 나왔다. 
 
지금까지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보는 쪽에서는 계엄군의 폭력성에 항의하기 위해 일반 시민이 무기고를 습격해 총기류를 탈취했다는 주장을 폈다. 정작 5·18 유공자 중에서 무기 탈취에 가담했다고 스스로 밝히고 공적이 인정된 이들은 3·4명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된다. 전남 전역의 무기고 44곳을 누가 습격했는지 40여 년간 의문이 제기된 이유다. 
 
5·18이 끝나고 무기를 회수·적재한 탄약사령부 산하 제1병기탄약창 운영과장 A씨는 스카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열차 2량 분량의 어마어마한 무기류를 시민군 몇 명이 삽시간에 약탈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본지 11월15일자 [단독: 5·18 진실 찾기] <23> “도청 TNT 설치 ‘北 소행’ 직감” 보도 참조> 
 
국가의 혜택이 주어지는 유공자 중 무기 탈취 유경험자가 극소수라는 것은 오히려 북한 공작조가 남파됐을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 줬고, 과연 선량한 광주시민이 전남 44개 무기고를 직접 습격했겠냐는 의구심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이런 가운데 무기고를 습격한 폭도 중에 북한 말씨를 쓰는 사람이 있었다는 목격담이 처음으로 전해진 것이다. 
    
▲ 장낙승 명본 이사장.
(사)국군명예회복운동본부(이하 명본·이사장 장낙승)는 전남 화순 예비군 무기고에서 총기류를 강탈한 폭도들이 “개수작하지 말라우”라는 표현을 썼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명본은 대한민국 안보 역사를 재조명하고 북한과 연계된 주사파가 전복시킨 왜곡된 국군사(史)를 바로잡기 위해 국방부 인가 공법단체로 11월 창립됐다. 거짓의 산에 세뇌된 5·18의 실체를 벗기고 계엄군이 무고한 양민을 선제사격으로 쏴 죽이지 않았다는 역사적 자료를 확보하는 것을 주요 역점 사업 중 하나로 정하고 있다. 
 
장낙승 명본 이사장은 인하대 학군단(ROTC) 출신 공병장교이자 소령으로 예편한 건축업자를 만나 5·18에 관해 주고받은 대화를 2019년 5월 공개했다. “우리 동기 송희선을 잘 안다고 한다”고 밝히며 증언의 신빙성과 증언자의 실재성을 보충했다. 육군사관학교 31기인 장 이사장이 육사총구국동지회 회장을 맡을 때였다. 
 
장 이사장은 “그(건축업자)의 아버지도 육군 소령으로 예편해 비상기획관으로 근무했다고 한다”며 “그가 인하대 1학년 때 5·18이 있었고 그의 아버지는 화순에서 근무했는데 5월21일 폭도들이 화순 무기고에 들이닥쳤다”고 설명을 이어 갔다. 
 
그러면서 “폭도들이 들이닥치기 전 폭약과 무기들을 진지에 감추고 있었는데 마지막 무기들을 운반하는 도중에 폭도들이 들이닥쳤다”며 “그의 아버지는 소문대로 학생으로 생각하고 다독이고 설득해서 돌려보내려 했는데 갑자기 뒤에서 ‘개수작하지 말라우’라며 돌이 날아와 아버지가 무릎을 맞고 쓰러졌고 무기를 모두 빼앗겼다고 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그때의 부상으로 무릎을 다쳐 90세가 되어 돌아가실 때까지 다리를 절었다”며 “대한민국에 아무리 불량한 사람들이 있어도 어른에게 ‘개수작하지 말라우’라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이 말은 북한 사람들이 많이 쓰는 말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에 더해 “돌을 던져 무릎을 못 쓰게 만든 것도 예사 실력이 아니다”라며 “전남 44곳의 예비군 무기고를 턴 것은 북괴 특수요원들의 짓이었고 역사는 분명히 밝혀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장 이사장은 26일 스카이데일리와 통화에서 “북한 욕설을 들은 증언자의 아버지는 당시 화순 예비군 무기고의 중대장이었다”고 보강 설명했다. 그러곤 “트럭 한 대에 탑승한 청년 20여 명을 소문으로 듣던 대학생이라고 생각한 증언자의 아버지는 ‘무기를 빼앗아도 군을 상대로 이길 수 없다’고 설득하려 했는데 이때 돌이 날아와 정확히 무릎을 맞혔다고 증언했다”고 말했다. 
   
▲ 서울고법 1996년 판결문. 팩트가 거꾸로 기재돼 있다. 5.17 계엄 확대가 신군부 반란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데 법원이 이처럼 잘못된 팩트를 근거로 사용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광주진입 폭도가 먼저 쐈는데… 법원 판결문은 ‘거꾸로’ 
 
軍이 ‘선제사격’ 적시… 틀린 팩트가 판결 영향줬을 수도 
본지 입수 ‘도발 일지’엔 폭도 총격에 병사 먼저 관통상 
부대 동료들이 일제히 대응사격… 치열한 교전으로 번져 
 
이런 가운데 화순과 나주·목포 방면에서 무기를 탈취해 광주로 진입하는 폭도들이 계엄군을 향해 먼저 총을 쏘며 장애물을 돌파했지만 1996년 법원 판결문은 이 사실을 반대로 기재한 사실이 새롭게 확인됐다. 
 
계엄군이 시민군에게 선제사격을 가한 것으로 판결문에 적시된 것이어서 틀린 팩트가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당시 서울고법 재판부는 5.17 계엄 전국 확대를 신군부 반란 행위의 일환으로 볼 것인지를 심리하면서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를 반란수괴로 각각 규정했다. 재판부의 이 같은 본안 판단 결과는 1996년 12월16일 서울고법 제1형사부 판결 선고문에 고스란히 담겼고 이후 대법원도 이 판단을 받아들였다. 
 
판결문은 ‘① 1980.5.21 22:10 효천역 부근에서 20사단 61연대 2대대가 버스와 트럭 등 차량 6, 7대에 탑승하고 목포 쪽에서 광주 쪽으로 이동하던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여 시위대 버스 2대를 전복시켰다’고 기재했다. 
 
법원은 계엄군이 오후 10시쯤 먼저 시민군에게 총을 쐈다고 본 것이다. 
 
 
▲ 폭도 도발상황 반전지 차트.
 
그러나 본지가 입수한 계엄군 61연대 2대대 ‘폭도 도발 상황’ 반전지 차트에 따르면 폭도들이 먼저 총격을 가해 병사 한 명이 관통상을 입은 것으로 기록됐다. 
 
효천역은 1번 국도를 따라 정남 쪽으로 7~9km 내려간 뒤 봉학산을 앞두고 남평리에서 좌회전하면 화순 방면이고, 우회전하면 나주 방면이다. 광주에서는 나주를 거쳐야 목포에 다다른다. 5·18 당시 광주 시민군이 나주·목포 무기고로 향하려면 효천역 일대를 지나는 1번 국도를 가야 했다. 광주~화순 구간은 너릿재가 지름길이지만 지방도로인 관계로 다량의 트럭이 이동하기엔 효천역을 통과하는 1번 국도(현재 고속도로)가 이동이 원활했다. 
  
시민군은 21일 도청 앞 집단발포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정당방위 차원에서 그날 오후부터 무기고를 습격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무기를 탈취한 뒤 광주로 돌아오는 시간은 저녁 이후 시간대가 된다. 61연대 일지에 묘사된 트럭을 탄 채로 집단 이동하는 폭도들과 동선이 일치한다. 이들이 광주로 진입하면서 계엄군을 향해 먼저 총을 쐈다는 게 반전지 차트 기록이다. 
 
‘광주~목포 도로 효천역 총격전’ 폭도 도발 상황은 ‘상기 일시 및 장소에 동부대가 20:00경 도착 도로(4차선) 봉쇄 작전을 위해 매복 준비 및 도로 장애물을 약 50%가량 설치 중 목포 방향에서 폭도들이 탑승한 트럭 및 버스 6대가 광주 방향으로 진입하기 위해 장애물을 설치하던 동부대 요원에게 사격을 가하면서 전속력으로 광주 쪽으로 봉쇄망을 뚫고 탈주하므로 해서 교전이 전개됐다’고 적었다. 
 
또한 ‘이때 사병 1명이 관통으로 부상을 입자 동부대 요원은 일제히 응사(應射·대응사격)함으로 교전이 치열하였으며 이미 폭도 차량 3대는 광주로 이탈하였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 광주 목포의 1번국도 중 효천역 앞~효덕동삼거리~백운동로타리 구간 표시. 61연대는 5월21일 광주시 남구 금당산(303.5m) 일대 효천역에 장애물을 설치했다. 효덕동삼거리의 우측 진월동 방행은 용산동을 거쳐 지원동 주남마을 쪽으로 연결되는 지방도로다. 이 도로는 11공수여단이 철수 시 사용했다. 보병학교 교도대가 이 61연대 2대대로부터 도로봉쇄임무를 인수받았고 이후 이곳에서 송암동 오인사격이 발생했다.   
 
이 내용은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 지휘부와 출동 진압부대의 장성급 지휘관 7명 이상에게 보고된 내용이다. 
 
그러나 법원 판결문은 폭도가 선제사격한 8시30분 상황은 제외하고 10시10분 상황만 기재된 것이다. 이 사실관계는 1996년 8월26일 선고된 서울지법 제30형사부의 1심 판결에는 기재되지 않았다. 2심에서 틀린 팩트가 처음 등장한 것이다. 
 
그동안 재판부가 김영삼정부의 민주화운동 방침에 따라 답을 정해놓고 판결했다는 의혹은 꾸준히 제기됐었다. <본지 11월1일자 [단독: 5·18 진실 찾기] <21> “5·18이 민주화운동 된 건 정치권력 야합 탓” 보도 참조> 
 
폭도 도발 상황 차트에는 특이한 내용도 기록돼 있다. 
 
차트는 ‘피해를 보고 도주한 폭도들 (중략) 재차 동부대 위치까지 접근 총격을 가해오자 (중략) 이때 (부상자를 구출하기 위해 되돌아온) 폭도들의 증원군에는 여자 30~40명이 편성돼 있어 더 이상 우군(계엄군) 측에서 교전을 회피했음’이라는 기록이다. 
 
총격전이 오가는 와중에 부상자 구출에 투입된 여성 30~40명은 일반 부녀자일 가능성이 작다는 점에서 관련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한 5·18 연구가는 “봉쇄 장애물을 향해 전속력으로 관통하며 선제사격을 가한 데다 아군 관통상까지 입힌 기록을 외면한 것은 사법부가 심리에서 편견을 갖고 있었다는 분명한 정황 증거”라고 지적했다. 
 
▲ 무기 피탈 현황. 전교사
한편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와 검찰 기록 등에 따르면 시민군 등이 전남 예비군 무기고 44곳 등을 공격해 총기류 7276정(안기부 다른 기록엔 5403정)·실탄 36만7847발 등을 탈취했고 전남도청엔 3000상자 분량의 폭약을 설치했다. 5·18 항쟁이 끝나고 수거된 폭발물은 열차 2량 분량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북한 서적도 피탈된 무기 현황을 구체적으로 나열한다.
 
조선노동당출판사가 1985년 5월16일 출판한 ‘광주의 분노’는 35쪽에 ‘무기 탈취 투쟁을 시작한 21일 오전부터 오후 4시 현재까지 폭동 군중이 탈취한 무기는 카빈총 2240정·엠-1보총 1235정·권총 28정·실탄 4만6400여 발이었고 장갑차가 4대·군용차량이 400여 대에 달했으며 수백 킬로그램에 달하는 폭약과 수백 개의 뢰관(뇌관)들도 획득했다. 무기 획득을 위한 봉기군중들의 투쟁은 이날 오후부터 광주의 주변 지역으로 확대됐다’고 밝혔다. 
 
▲ 북한이 발간한 '광주의 분노' 35쪽에는 시간대별 무기 탈취 현황이 기록돼 있다.
 
북한 책은 ‘21일 오후 4시 현재’라는 획득 무기류 파악 시점을 언급한 점이 눈길을 끈다. 피습 직후 안기부는 피탈 무기류의 전수 조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시점에 북한은 정확한 노획량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 전라남도 나주 예비군 무기고 탈취 현장에 들어선 사적비. 나주=남충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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