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㉚ 재평가돼야 할 5·18 전후 DJ 행적
[단독: 5·18 진실 찾기]<30>“게릴라戰 나서라” 무장투쟁 부추긴 김대중
80년 5월11일 정읍서 “월남식으로 국민 속 침투” 선동
송선태는 같은날 전남도청 점령 계획한 ‘자유노트’ 작성
허겸 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2-08 00:05:00
 
▲ 김대중의 5·18 이전 발언들. @스카이데일리
 
김대중은 1980년 5월11일 월남처럼 도시게릴라전(戰)을 하라고 대중을 선동했고, 전남대생 송선태는 같은 날 다이너마이트를 활용해 전남도청을 점령하는 대(對)정부 무장 폭동 계획인 자유노트를 직접 작성했다.
 
이들의 계획은 정확히 일주일 뒤 5·18 항쟁 기간에 현실이 됐고, 44년이 흐른 오늘날 김대중은 ‘민주화의 영웅’으로, 송선태는 문재인정부가 만든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장관급 위원장으로 각각 자리매김하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펼쳐졌다. 
 
7일 스카이데일리가 단독 입수한 영상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은 1980년 5·18 발생 일주일 전인 5월11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월남식으로 국민 속에 침투해 도시게릴라 농촌게릴라전을 하라”는 대중 선동 문구로 열변을 토해낸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김대중의 정확한 발언은 “그러면 유일한 길은 월남식으로 국민 속에 침투해서 국민의 지지를 받아 가지고 도시게릴라 농촌게릴라의 게릴라전을 하는 것입니다”였다. 
 
그는 유일한 해법으로 게릴라전을 모색하게 된 원인을 바로 앞선 연설에서 스스로 밝혔다. ‘북한의 전면 남침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제였다. 
 
구체적인 사전 발언은 “오늘날 우리 국군의 반응 태세가 이와 같이 튼튼하고 미군이 여기에 주둔해 있는 한 북한 공산군의 전면 남침은 거의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중국과 소련도 그러한 전면 남침은 찬성하지 않습니다”였다. 
 
김대중에 대해 당시 사법부는 “반(反)정부 봉기의식을 고취한다”고 판단했다. 법원 판결문에는 “동학혁명과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같다”는 취지의 발언도 등장한다. 이에 따르면 김대중은 11일 오전 10시55분~11시45분 정읍 연설에서 “동학혁명은 처음부터 폭력주의가 아니라 상소하고 주장을 건의했으나 관철되지 않아 봉기한 것으로 오늘날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라고 발언했다. 이 같은 연설 내용은 1980년 9월 선고된 육군계엄보통군법회의의 1심 판결문(80보군형공 38호)에 고스란히 담겼다. 
  
김대중은 ‘민주주의를 막으려는 음모’라고도 언급했다. 법정 기록상 군부를 의식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1심 판결문은 “10.26사태 이후 조그마한 민주주의의 숨통이 터졌는데 그것을 막으려는 음모가 있다”고 김대중의 발언을 적시했다. 
 
신군부’를 직접 겨냥한 발언은 5월1일 나온다. 김대중은 이날 “김재규 재판에 대한 사법권 독립을 침해하고 노골적인 정치개입을 일삼는 보안사령관(전두환)은 물러나야 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하도록 지시하고 서명했다. 이 선언문은 문익환 등에 의해 7일 내·외신기자들 앞에서 발표됐다고 판결문은 기록했다.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김재규 수사를 총괄했다.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을 죽인 시해범이다. 대통령을 총으로 암살한 범인과 김재규의 범행을 알고도 직속상관인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하지 않은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의 공범 혐의 연행을 김대중은 ‘정치개입’으로 단정했다. 연행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대통령 피살 사건 연루자에 대한 수사책임자의 강제 직권조사를 군사 반란으로 본 것이다. 
 
▲ 김대중의 1980년 5월11일 전북 정읍 연설 영상 캡처
 
1981년 대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군사 반란’이라는 관점은 김대중, 그리고 그와 함께한 이들에겐 대정부 공격의 명분을 제공했다. 1997년 대법원은 이 시나리오를 인정한다. 최규하 대통령과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전 보안사령관)에 대적한 무장봉기 세력을 헌법수호 세력으로 간주한 것이다. 사법 최후의 보루인 대법원에서 사상 초유의 판결이 나오게 된 이유다. 정승화가 훗날 5·18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하는 촌극이 연출된 배경이기도 하다. 
 
1980년 5월12일 김대중은 군인을 상대로 정부 명령 불복종을 촉구했다. 정부는 이를 ‘시한부 선전포고’로 여겼다. 5월19일까지 최규하정부에 △비상계엄 즉각 해제 △신현확 국무총리 퇴진 △정부 개헌 심의위원회 해체 등을 요구했고 19일까지 확답을 하지 않으면 실력행사에 들어가겠다고 공표했다. 이번에도 전제는 '신군부 집권 시나리오에 따른 비상계엄령은 무효'라는 것이었다. 
 
이는 명백한 반란행위에 해당해 5월17일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의 근거가 됐고 정부는 김대중을 체포했다. 하지만 민주화 세력은 5.17 계엄령의 전국 확대를 신군부의 집권 시나리오로 간주하고 대정부 공격의 구실로 삼았다. 
  
김대중의 경호를 담당한 함윤식 전 비서이자 김대중을 직격한 '동교동 24시'의 저자는 한 언론사와 가진 인터뷰에서 “분명한 것은 5·18이 누군가의 각본에 의해 일어난 건지는 모르겠으나 5·18이 일어나도록 상황을 몰고 간 사람은 김대중이라는 사실”이며 “그때 김대중의 과격한 노선이 없었다면 군이 개입할 명분은 없었다고 확신한다”고 폭로했다. 
 
1980·1981년 1·2·3심 판결문을 종합하면 사법부는 군인에 대한 김대중의 정부 명령 불복종 촉구를 내란 음모로 간주했다. 
 
1심 재판부는 “김대중은 15일 오후 2시 문익환 등과 회합해 국민연합 명의의 ‘민주화 촉진 국민대회 선언문’을 검토했고, 17일 북악파크호텔에서는 문익환이 16일 선언문을 발표했다는 말을 듣고 김대중이 확인했다”고 적시하면서 “제2국민선언문에서 예고한 바와 같이 전 국민적 봉기를 결의하는 등 내란을 음모했다”고 판시했다. 
 
이듬해 대법원은 “누구나 헌법과 법률에 위반된다고 명백히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고도의 정치·군사적 행위인 비상계엄선포는 당연무효되지 않는다”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계엄사령관의 조치는 위헌·위법하지 않다고 결론 내렸다. 
 
삼권분립 원리를 준용해 “계엄선포가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권한은 사법부에 없다”고 못 박기도 했다. 하지만 1997년 대법원은 헌법상 일사부재리 원칙을 깨고 종전 판결을 뒤집는 근거로 계엄선포가 헌법에 위배된다고 번복했다.
 
이는 16년 전인 1981년 대법원 판결과 정면으로 배치됐다. 5·18 이듬해 대법원은 “국가 변란이나 국헌 문란의 목적이 없었다”는 김대중의 주장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김대중이 국가 변란을 획책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 근거 중 하나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일본본부는 북괴와 조총련 지령으로 구성되고 자금 지원을 받아 목적을 이루는 반국가단체”라고 이적성을 판단했다. 
 
앞서 대법원은 1978년 6월13일 판결(78도756)에서 “한민통 일본본부는 정부를 참칭하고 대한민국을 변란할 목적으로 불법조직된 반국가단체인 북괴 및 반국가단체인 제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의 지령에 의거 구성되고 그 자금지원을 받아 그 목적수행을 위해 활동하는 반국가단체”라고 판결했다. 
“DJ가 지역 대학생 선동한 게 광주소요 발단” 
 
군인들에 명령 불복종 부추겨… 명백한 반란행위 
당시 비서실장 함윤식 “과격노선이 군 개입 불러” 
헨리 스콧 前NYT 지국장 “광주사건은 DJ 사기극” 
 
이 같은 판례를 근거로 판결한 1981년 대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한민통 일본본부 기관지 ‘민족시보’는 북괴 헌법 전문을 게재하고 “김일성 수상은 독재자 박정희가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았을 것”이라며 북괴를 선전하거나 정치노선을 찬양했다. 또한 ‘고려연방공화국으로’라는 제목으로 김일성 사진과 연설 내용을 게재하며 북괴와 조총련 활동을 비호했으며 민단활동과 대한민국 정부 시책은 극렬히 비판했다. 
 
1980년 1심 판결 이후 김대중은 “한민통 일본본부가 반국가단체라 하더라도 피고인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했지만, 2심 재판부는 “원심(1심)이 적법하게 증거조사를 마쳐 채택한 한민통 일본본부 발기인의 대회선언문·민족시보·한민통일본본부 구성원 들에 대한 성분 분석표·한민통 일본본부에 대한 보고 등에 관한 영사증명서 및 여러 증거와 증인의 법정진술·자필진술 등을 종합하면 한민통 일본본부 주요 구성원들은 반국가단체인 조총련 구성원이거나 그에 동조하는 자들임을 인정할 수 있다”며 김대중의 주장을 배척했다. 이어 “한민통 일본본부가 대외적으로 대한민국 지지라는 정책을 내걸었다 하더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활동의 편의를 위한 선전적 명분에 불과하다”고 해석했다. 
 
당시 김대중은 “공소사실이 특정돼 있지 않아 위법하다”는 주장도 폈다. 이에 대해 1981년 대법원은 “범행의 일시·장소·주체·수단·방법 등이 모두 특정돼 있고 수괴가 누구인지 폭동 지휘자를 조사·심리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원심이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며 “원심판결에 내란음모죄의 구성요건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과오나 위법이 없다”고 판시했다. 
 
이에 더해 “내란음모죄는 실행 착수 전에 2인 이상이 내란의 내용에 합의하는 것이고 세부 계획까지 모의할 필요는 없고(1975년 4월8일 선고 74도3323) 구성요건도 형법 제90조에 따라 내란죄를 범할 목적으로 음모함으로써 족하다”며 김대중의 내란 음모행위를 인정했다. 
 
계엄사령부는 항쟁이 끝난 뒤 31일 김대중이 학생을 배후 조종하고 선동해 사태를 야기했다는 중간 수사 결과를 공개하면서 김대중의 체포 경위를 밝혔다. 구체적으로 “광주사태의 발단이 계엄군과 전남대생들의 충돌에서 일어났으나 사태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간 데에는 학생소요를 배후 조종해 온 김대중이 전남대 및 조선대의 추종 학생 주로 복학생들을 선동해 온 것이 소요사태의 발단이 됐다”며 “사태 악화 과정에서 광주시내 골수 추종자들이 이를 격화시킨 사실이 드러났다”고 계엄사는 발표했다. 
 
그러면서 “간첩과 간첩에 협력하는 불순분자들 책동이 있었다”고 사태의 악화 배경을 언급했지만 고정간첩인지 남파간첩인지 계엄사는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았다. 
 
이 같은 판단을 내린 것은 한국 정부만은 아니었다. 
 
복수의 미 국무부와 중앙정보국(CIA) 문건에 따르면 미국은 5·18의 성격에 관해 △북한 민간 공작대원들(North Korean Agents) △김대중 추종자들(Kim Daejung followers·Associates) △공산주의 선동가들(communist instigators) △불순세력(impure elements) 등이 사전 계획하고 주도한 ‘내란(insurrection)’ ‘반란(rebellion)’ 형태의 대남공작으로 일찌감치 파악하고 있었다. <본지 2023년 11월29일자 [단독: 5·18 진실 찾기] <25> 위컴 장군 “총 뺏은 폭도는 소탕 마땅” 보도 참조> 
 
1980년 5·18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존 A 위컴(John Adams Wickham) 장군은 “광주사태에서 민간인이 군·경(군인과 경찰)의 총을 빼앗아 군인에 대응한 것은 ‘Another Enemy(또 다른 적)’로 간주되며 정규군이 즉각 소탕해야 한다”며 “국가에는 정규군보다 더 강한 집단이 있어선 안 된다”고 발언했다. 
 
▲ 김대중의 첫 공판 소식을 게재한 1980년 8월14일자 경향신문.
 
이른바 ‘폭도’로 간주되기도 하는 무장 시민군의 대정부 공격이 범국민적 설득력을 갖기 위한 대전제는 크게 두 가지로 꼽힌다. 첫째 정부군(계엄군)이 먼저 사격명령에 따라 시민을 집단 사격으로 쏴 죽였거나 둘째 정부 전복이 합리적이라고 볼 만한 결정적 잘못과 그에 대한 책임이 정부에 있어야 했다. 
 
계엄군의 사격 명령은 오늘날까지 증거 불충분으로 논란이 이어진다. 김대중이 군중을 선동했던 44년 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문재인정부가 만든 5·18조사위도 ‘증거 부족’을 이유로 전두환 사격명령을 규명하는 데 실패했다고 광주의 언론이 보도했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법언에 따라야 한다. 피고인이 유죄인지 무죄인지 확신이 없을 때는 무죄를 선고해야 한다는 헌법과 형사소송법상 원칙이다. 전두환 합수부장은 법리상 무죄이지만 정서상으론 여전히 유죄로 간주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12.12가 군사 반란이라는 해석 역시 논쟁이 거듭되고 있다. 
 
당시 검찰 수사 기록에 따르면 정승화는 대통령이 시해된 1979년 10월26일 피 묻은 옷을 걸친 채 나타난 김재규와 같은 차에 탄 뒤 그가 새 옷과 구두를 갈아신는 것을 보고도 직속상관인 노재현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김계원 비서실장이 정승화·노재현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김재규가 범인임을 알린 밤 11시40분까지 무려 4시간 동안 침묵했다. 
 
그는 또 차지철 경호실장만 할 수 있는 경호 인력의 시해 현장 출동명령을 전화로 중단시켰다. 상식적으로 차 실장이 죽은 사실을 인지해야 가능한 행동이었다. 대통령과 차지철이 죽고 김재규가 피범벅이 됐다면 직속상관과 내각 각료들에게 정황을 알리는 게 군인으로서 기본이었다. 이에 따라 수사 책임자였던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상급자이자 육군 참모총장인 정승화를 반드시 조사할 의무가 있었다. 
  
명백한 반란… DJ 예비내각 구성” 
 
김대중은 5월1일 과도내각을 결성한다. 
 
김대중 내란음모 1·2·3심 판결문에 따르면 재판부는 “김대중이 이날 자택에서 문익환 등과 교내시위를 교외시위로 유도하고 시민이 가세하도록 선동해 폭력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면 정부가 붕괴될 것이니 학원에 영향력이 있는 청년조직원들이 학생선동에 더욱 주력하도록 하고 결행 시기는 5월 중순경으로 정했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면서 김대중 자신의 집권을 위한 제반 전략지휘본부이자 정부 전복 후 과도내각역할을 할 ‘한국민주제도연구소’가 빠른 시기에 활동을 개시하도록 이사장·소장을 선임하기로 했다고 대법원은 판단했다. 
 
대법 판결문에 따르면 김대중이 시켜 미리 준비한 한국민주제도연구소 정관과 이사 취임 의뢰서 및 위임 승낙서는 참석자에게 배포됐고 전원 이사직 취임을 승낙해 연구소가 결성됐다. 사법부는 “전문위원과 보좌위원 구성을 위임하고 선임하는 등 정부 타도를 위한 폭력시위 선동과 과도내각 역할의 조직을 구성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과도내각 모의도 있었다고 대법원은 판단했다. 대법관들은 “4월16일 오후 2시 서울 도봉구 수유동 크리스챤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문익환 등과 회합해 ‘한국민주제도연구소’를 설립해 자신의 사조직을 통할하고 집권목적을 위한 제반 전략지휘본부이자 집권준비를 위한 조직구성을 모의했다”며 “4월 초에는 사조직을 비롯한 종교계·청년학생들을 앞세워 일시에 범국민적 반정부 폭력시위를 유발하기로 합의했다”고 사실관계를 확인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연구소는 △전문위원 민족재생담당 김관석 △역사문화담당 백낙청 △종교교육담당 장을병 △노동담당 탁희준 △농업담당 유인호 △경제담당 임재정 △안보외교담당 양호민 △통일담당 문익환 △도의정치담당 안병무 △행정담당 이문영 △노동담당 장기표 △농민담당 황한식 △종교(천주교)담당 이태호 △종교(개신교)담당 서경석 △여성담당 이응경 △학원담당 김학민 △지역담당 김세균 등을 각각 선임했다. 
 
예비내각 명단은 뜻하지 않게 세상에 나오게 됐다. 신동아 1999년 7월호 등에 따르면 이종찬 중앙정보부 총무국장이 김대중을 연행한 1980년 5월17일 이희호 여사가 예비내각명단을 갖고 있다 빼앗겼다. 이 여사는 서랍에서 꺼낸 종이를 핸드백에 넣고 밖으로 나가려다 중정 수사관에게 발각됐다. 수사관은 제출을 요구했고 결국 두 쪽짜리 종이를 압수했다. 한 장은 예비내각이었다. 당시 신문들이 이 사실을 보도했다. 또 한 장에는 22일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열리는 집회 계획이 담겼다. 
 
이에 따라 대법원은 5·18을 김대중의 반(反)국가 무장 반란으로 1981년 확정했지만 같은 사건에 대해 다시 심리하지 않는다는 헌법상 일사부재리 원칙을 깨고 1997년 판결을 번복하며 김대중에게 면죄부를 줬다. 
 
이 과정에선 정치적 해석이 새롭게 발굴된 증거를 압도했다. 헌법재판소는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간주하는 법을 인정했지만 합헌 4명, 위헌 의견은 5명으로 턱걸이했다. 헌재가 위헌 결정을 내리기 위해선 6명이 필요했지만 한 명이 부족했다. 헌법재판관 9명 중 과반인 5명이 위헌으로 판단한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대법원 스스로 일사부재리 원칙을 깬 만큼 5·18특별법은 또다시 대법원에서 재심할 여지가 있다는 얘기다. 5·18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끝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 헨리 스콧-스톡스 전 NYT 기자.
헨리 스콧-스톡스(Henry Scott-Stokes) 전 뉴욕타임스(NYT) 지국장은 저서 ‘영국기자가 본 연합국전승사관의 허망’ 중 ‘내가 만난 아시아 지도자’ 대목에서 “김대중은 사기꾼이고 거짓말쟁이”라며 “광주사건이야말로 김대중의 민주주의 기만이 뚜렷이 드러난 사건”이라고 일갈했다. 
 
그는 “김대중이 노린 것은 권력이었고 광주사건이 벌어진 가운데 김대중은 권력을 쟁취하는 것에 가장 많이 신경을 썼다”고 혹평했다. 그러면서 “1980년 광주사태는 김대중 자신이 민주화 기수를 가장해 대통령이 되기 위해 폭동을 사주한 사건이었다”며 “광주사건을 일으킨 사람들, 김대중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김대중이 얼마나 세속적 지위나 돈을 중요시하고 일족의 재산 축적에 혈안이 돼 있었는지 잘 알고 있다. 우리 외국 언론들은 그 사실을 감춰 왔다”고 했다. 또한 “저널리스트로서 어리석었던 나 자신이 부끄럽다”며 “재산 축적보다 훨씬 무거운 죄는 나라를 팔아버린 국가 반역 행위였다. 말할 것도 없이 북한과 연관된 일이다”고 덧붙였다. 
 
  
▲ 김대중은 1982년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제출한 자필 각서에서 국가안보에 누를 끼친 잘못을 자백했고 향후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전 대통령은 김대중을 비롯해 관련자들을 대대적으로 석방했고 ‘광주의 아픔’을 묻고 가겠다며 더는 폭동의 배후를 캐묻지 않았다. 그러나 김대중의 5·18 무장반란은 노태우의 6공화국 비자금이 탄로 나면서 정치적 야합의 서사 구도가 형성되는 가운데 민주화운동으로 점차 탈바꿈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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