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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117] 태풍이 앗아간 것, 태풍이 데려온 것
첫 키스 뒤 뜻밖의 자백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6-25 06:30:10
 
 
하운이 조각상처럼, 해를 마주하고 선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손을 내리고 나를 돌아본 다음 빙긋,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갑옷을 챙겨 입듯 숄로 몸을 야무지게 감싼 뒤 등을 돌려 해변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순간, 나의 가슴을 채우고 있던 충만함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첫 키스를 끝내자마자 이혼한 아내와의 추억을 꺼내는 남자가 하운의 입장에서 어떻게 보였을지 뒤늦게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앞서 걷고 있는 그녀의 발자국을 밟으며 따라 걸었다. 하운의 인생에서 태풍이 몰아치던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고, 그녀가 겨울의 무덤을 이야기했듯 그녀와의 연결점을 나 또한 증명해 보이려는 의도였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구차한 변명 같았다. 하지만 내 혓바닥은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만회하는 유일한 방법이 자백이라는 듯 그날의 일을 계속 이야기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한반도의 허리를 강타한 태풍의 세력은 한결 약해진 상태였지만 거리는 폭격을 맞은 듯 어수선했다. 빌딩 앞에 사람들이 나와 하릴없이 서성댔다. 지역 전체가 정전이었고 오후에나 복구될 예정이라고 했다. 달봉은 내가 대답하지 않아도 잘 지내냐며 곧잘 문자메시지로 안부를 물었다. 한번은 교회 청년회에 새로 온 아가씨가 있는데 정말 괜찮다며 만나 보라고 몇 번이나 전화했다. 내가 쉬는 날을 알아내고는 약속 장소와 시간을 일방적으로 통고했다.
 
멋진 놈이라고 네 자랑 엄청 해 두었으니까 잘 해 봐.”
 
달봉은 석 달이나 형인 나에게 꼬박꼬박 너,라고 했다. 자신은 안 나올 테니 염려 말라고, 대신 자신의 체면을 봐서라도 바람맞히면 안 된다고 엄포를 놓았다. 펑크 내면 다시는 날 보지 않겠다고, 협박 같지도 않은 너스레를 떨었다. 그렇게 정한 날이 하필 태풍이 몰아친 다음 날, 점심시간이었다.
 
만나기로 한 식당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고 약속 시간보다 너무 일찍 도착한 나는 커피라도 마실까 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력이 복구되지 않아 영업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던 대형 마트 건물 1층의 스타벅스에서도, 맥도날드에서도 커피 머신을 돌릴 수 없다고 했다. 건물 모퉁이에 위치한 베이커리에 사람들이 드나드는 게 보였다.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지만 주인은 전날 팔다 남은 크루아상을 휴대용 가스레인지로 끓인 커피와 마실 수 있게 해 주었다. 나는 문이 열려 있는 제과점 안으로 들어가 커피를 주문했다. 시간이 되면 약속한 장소로 갈 생각이었다.
 
아니, 얘가 어떻게 들어왔지?”
 
참새보다 작은 굴뚝새였다. 겁도 없이 테이블 밑을 종종거리고 뛰어다니며 먹이를 찾아다녔다. 자기 집이라도 된다는 듯 녀석은 담대했다. 주인이 보고 놀라서 내쫓으려 했다. 새는 주인이 쫓으려 할수록 약 올리듯 테이블 밑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그냥 두세요.”
 
창가 쪽 테이블에 혼자 앉아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젊은 여자가 말했다.
 
놀라서 날아오르면 유리창에 부딪힐지도 몰라요. 빵에 깃털이 떨어질 수도 있고요.”
 
그런가, 주인이 고개를 갸웃하는 동안 여자는 빵 부스러기를 테이블 아래 뿌려 주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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