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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수상 관련한 논란을 보며 ‘우리나라가 여기까지 왔구나’ 싶어 반갑게 여기기로 했다. 세계 최고 권위의 상에 감격해 온 국민이 한목소리로 환호하는 게 아니어서 오히려 건강한, 성숙한 상태라고 본다.
인종·국가·성별에 정치 성향까지 고려되는 점, 비주류 언어의 불리함 등 태생적 불공정성에도 오래 세월 노벨문학상을 선망하며 우리말의 불운을 애석해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새 이 상을 평가할, 혹은 그 이상의 수준에 도달한 셈이다.
노벨상의 취지를 가장 선명히 보여 주는 게 과학 부문 상들이다. 1901년 이래 123년 노벨상 역사에서 비(非)서구권 중 최다 수상자 29명이 일본에서 나왔다(4명은 수상 시점에서 외국 국적). 자연과학 부문만 따지자면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노벨상 수상자 보유국이다. 반면 우리나라 최초 노벨상은 평화상이었고 이것이 ‘북핵’으로 돌아왔다.
DJ 노벨상을 위한 관련 공작을 세상에 알리려던 국정원 직원(김기삼 미국 뉴욕주 변호사)은 20여년 전 조국을 등져야만 했다. 증거 자료에 기반한 폭로본의 출간도 우려곡절 끝에 나올 수 있었다. 수여한 쪽 받은 쪽 모두 천추의 불명예로 남을 노벨상이 될 전망이다.
노벨문학상에 대한 우리의 남다른 애착은 20세기 전반 국권을 상실한 이래 사실상 문학을 중심으로 ‘(근대적) 상상의 공동체=네이션’를 구성해 왔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근대국가라면 다양한 직종으로 진출했을 인재들이 유독 문인에 집중된 이유다.
전업 작가를 가질 만한 시장이 형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가 공부한 교과서에 실린 문인들 대부분 교사·기자로 일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 현실은 총독부를 통한 일제 치하였으나 우리말로 우리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검열 체제 아래 고도의 은유와 알레고리가 작동해 문학성을 배가시킨 측면도 있다. 이렇게 배양된 익명·다수의 조선인 독자층이야말로 결정적인 순간 ‘대한민국 국민’으로 부상할 존재들이었다.
동북아시아 특히 한국과 중국의 경우 문학이란 단순한 읽을거리가 아니라 백성을 국민으로 양성하는 실질적 매개체의 하나였다. 이 현상이 우리나라에선 한층 극단적 형태로 나타났다. 식민지였기에 근대적 네이션 형성이 문학을 통해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통속적 읽을거리로 치부되는 해방 전 각종 매체의 연재소설도 그래서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작품 속에서 특정 도시나 동네에 관한 이야기라도 확장된 현실, 즉 ‘우리나라’의 은유로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했다.
이는 각 지방의 색채를 강하게 간직한 한반도 내 모어들이 표준어로 재구성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 중심에 문학이 있었다. 지구상의 수천 개 언어 가운데 문학과 학술을 할 수 있을 만큼 진화한 경우는 우리말을 포함해 30개 남짓에 불과하다. 수백 년 근대어의 역사를 가진 서구, 사서삼경과 다른 백화체 소설의 역사가 1천 수백 년인 중국, 중세 이래 한자를 뒤섞은 독자적 문체를 정착시킨 일본이 각각 19세기 말∼20세기 초 급속히 언어를 근대화시킨 것과도 차원이 다른 역사를 겪은 게 우리말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배운 20세기 초 신소설의 국·한문 혼용체를 떠올려 보라.
그런 상태이던 우리말이 이광수의 ‘무정’ 쯤에 이르면 오늘날과 큰 차이 없는 상태가 돼 있다. 이 엄청난 속성 코스 또한 인류사의 기적이다. 그 배경에 근대 일본어와의 밀착된 교섭이 있었다. 모어가 장차 ‘국어’로 교육·공유되며 다양한 폭과 깊이를 갖춘 언어 구조물을 만들어 내기까지 길고 험난한 여정이 필요한 법인데 이례적인 지름길을 거친 셈이다. ‘한국어에 내린 벼락같은 축복’에 비유된 미당 서정주를 우리가 결코 그의 이른바 친일 행적만으로 평가·단죄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강의 문학 역시 이런 유례없는 우리말 발전사의 연장선에 있다. 다만 한강의 노벨상 수상으로 김규나 작가를 발견한 게 나는 더 기쁘다. 이번 노벨문학상 관련해 작가로서 한국인으로서 가질 만한 의견을 밝힌 이후 주류 언론과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김 작가의 진가를 우리 사회가 제대로 알길 바란다. 그 작품성·탄탄한 문장력·역사의식·나라사랑·북한동포사랑… 무엇 하나 빠질 게 없다. 독서력·영화 관람력·생각의 깊이를 보여 주는 시사적 산문 ‘대한민국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1·2) 역시 필독을 권한다. 단촐한 이력난에 보이는 ‘대한민국 소설가’란 직함도 참 좋다. 이번 사태를 겪고 보니 더욱 가슴 뭉클하다.
19세기 중반 이래 서구 근대문명의 해석·수용의 총화인 일본어 번역을 효율적으로 활용한 끝에 근·현대문학사 100년 미만의 나라가 주목할 만한 작품을 낳았고 그것에 세계인의 눈길이 쏠리게 됐다. 그런 의미에서 한강의 문학도 하나의 성취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주요 작품이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려던 제주4.3과 이 나라를 해체시킬 뻔한 광주5·18을 일방적 국가 폭력으로 규정한 역사관 위에 서 있어 아쉽지만, 이제 세계인을 향해 그 역사관만으로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해할 수 없음을 적극 설명할 과제가 생겼다.
식민지 말기 태평양전쟁과 건국 직후 6·25전쟁이라는 치명적 체험을 넘어 여기까지 온 유일한 나라 대한민국, 그 번영의 기적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이 사회과학적 실증 연구를 통해 설명하며 인류의 귀감으로 삼을 것을 권하고 있다. 그들이 귀감 삼으라 권하는 것은 한강 작품 속 4.3과 5·18이 성공했다면 불가능했을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그런 대한민국을 알려면 김 작가 글도 열심히 읽어야 한다.
인도계 미국인 경제학자 아쇼카 모디 프린스턴대 교수의 저작 ‘두개의 인도’도 그렇다. 당대 최고 선진국인 영국이 남긴 각종 유산과 인프라를 대의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으로 어떻게 말아먹었는지 인도공화국의 실패담을 말할 뿐이지만 대한민국이 왜 성공했는지를 거꾸로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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