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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숭 구멍이 나 있는 스위스 에멘탈 치즈를 좋아하시나요? 부드럽고 고소한 풍미가 일품인 에멘탈 치즈에는 뜻밖에도 대형 참사를 막는 중요한 안전 철학이 담겨있다. 치즈 단면에 드러나는 크고 작은 구멍이 바로 사고를 바라보는 가장 과학적인 모델로 전 세계 산업 안전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스위스 치즈 모델(Swiss Cheese Model)’이 공동주택의 화재처럼 복잡한 대형 사고가 발생하는 과정을 가장 명료하게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최근 홍콩의 고층 아파트 화재 참사는 아시아의 고밀도 주거 환경이 안고 있는 잠재적 위험을 새삼 일깨웠다. 수많은 가구가 수직으로 밀집한 공동주택에서 발생하는 화재는 곧 대규모 인명 피해로 직결될 수 있는 ‘우리 모두의 리스크’다. 이처럼 치명적인 대형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사고를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각부터 바꿔야 한다.
영국 맨체스터 대학의 제임스 리즌(James Reason) 교수가 설명한 이 모델은 에멘탈 치즈처럼 구멍이 뚫린 여러 개의 치즈 조각을 겹쳐 놓은 모습으로 사고 발생 과정을 비유한다. 각 치즈 조각(안전장치·규정·교육·관리감독)에는 각기 다른 위치에 구멍(허점)이 있는데 이 허점들이 ‘불운하게’ 겹치게 되는 순간 재앙적인 사고가 발생한다는 이론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공동주택의 안전 시스템은 바로 이 치즈 구멍들이 위험할 정도로 일렬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경고를 보낸다. 그중 하나가 ‘양치기 소년’에 의한 ‘경보 피로(Alarm Fatigue)’다. 아파트에서 화재 발생 시 첫 번째 방어선은 경보 시스템인데, 대부분의 아파트에서 이 경보 시스템이 잦은 오작동으로 인해 이미 무력화되고 있다. 고기를 굽느라 생긴 연기, 담배 연기, 심지어 스팀 다림질의 수증기에 의해 걸핏하면 울리는 경보는 ‘거짓 신호’가 되어 주민들에게 경보 피로감을 주는 동시에 재난에 대한 긴장감을 극도로 무디게 만들고 있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주민 스스로가 물리적인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2023년 성탄절 새벽 서울 도봉구 아파트 화재 참사를 기억하시는가? 당시 사망자 발생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각 층의 방화문이 제대로 닫혀있지 않았던 점이 지목됐다. 일부 주민이 통행 불편을 이유로 방화문을 열어뒀고, 이로 인해 연기가 계단을 타고 급속히 확산되며 희생을 키웠다. 방화문은 유독가스의 수직 이동을 막아주는 생명의 최후 방어선이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또한, 아파트 복도나 비상계단에 쌓아둔 자전거·유모차 등의 적치물은 화재 확산의 연료일 뿐 아니라, 연기로 시야가 제한된 상황에서 대피하는 주민의 이동을 치명적으로 방해한다. 2020년 군포 아파트 화재 당시 옥상 비상문이 잠겨 있어 피난자들이 최후의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희생된 사례 역시, 사소한 ‘관리 편의’가 생명을 앗아간 비극이었다. 복도 적치물, 방화문 개방, 옥상문 잠금 등은 ‘나만 괜찮으면 돼’라는 이기심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스위스 치즈 구멍’이다.
대형 참사를 미연에 방지하려면 근본적으로 ‘스위스 치즈의 구멍들’이 생기지 않도록 평소에 점검해야 한다. 우선, 잦은 오작동의 근본 원인인 설비 노후화를 해결하고, AI 기반의 오작동 방지 기술이나 다중 센서 시스템 도입 등 적극 검토가 필요하다. 또한 ‘작은 안전 무시’에 대한 무관용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소방시설법에 따라 복도 적치 행위는 엄연한 불법이며, 관리 주체는 ‘작은 위협’을 절대 용인하지 않는다는 엄격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큰 사고가 발생하기 전 경미한 사고와 징후들이 수없이 나타난다는 ‘1:29:300 법칙’으로 잘 알려진 H.W. 하인리히는 ‘88:10:2 법칙’을 말하기도 했다. 이는 산업재해의 원인을 분석한 법칙으로, 재해의 88%는 불안전한 사람의 행위로, 10%는 불안전한 기계나 신체적 문제로, 나머지 2%는 불가항력적인 원인으로 발생한다는 설명이다. 재해의 대부분은 인간의 불안전한 행동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을 안전하게 재설정하려면 실제적인 피난 훈련이 필요하다. 평소 방화문이 닫혀있는지 확인하고, 경보가 울릴 때 비워둔 복도를 통해 비상계단을 이용하는 과정은 반복 숙달되어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설마’라는 운에 기댈 수 없다. 비워둔 복도와 닫힌 방화문이 곧 연기의 확산을 막고, 피난 시간을 확보하는 생명의 길이다. 이 스위스 치즈 모델의 경고를 무시하는 순간, 우리는 자칫 우리 자신을 포함한 공동체의 안전을 스스로 파괴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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