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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와 일본사는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44

배반당한 홍익인간…역사왜곡 배은망덕 中·日

서진왕조(西晉王朝)의 조기 붕괴도 내부분열…한민족을 호족이라 폄하한 중국사서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7-12-23 17:32:48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우리는 고대에서부터 중국과 일본에 선도적인 민족으로 홍익인간의 이념을 가지고 그들에게 문화와 문물을 전수했다. 중국의 4300여년 역사와 일본의 1600여년 역사에서 우리는 정치· 군사와 문화·문물제도며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나 그들은 우리의 기대를 빗나갔다.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 第八.下)에, 동방에 있는 한민족(韓民族)은 유인(柔仁)해 북방, 남방, 서방민족과 다르다고 했다. 그런데 중국은 우리선진 고대우리 민족을 호족(胡族)이라 폄하하며 역사를 조작 왜곡하고 일본역시 우리역사를 제멋대로 왜곡 조작함은 여전하다.
 
진제국(秦帝國)과 한(漢)의 상속자로서 정치기구(政治機構)는 진(秦)의 것을 답습해서 그것을 대담하게 수정한 진(晋)의 무제(武帝)가 280년 양자강하류의 오(吳)나라를 정복해 천하를 평정 했을 때 서북의 맹장 동탁(董)卓)이 낙양에 상경해서 후한(後漢)의 헌제(獻帝)를 밀어내고 천하 이반을 초래한지 91년, 위·촉·오 삼국분립으로부터 59년 만에 평화가 다가왔다.
 
 
사마의(司馬懿)이래 3대에 걸쳐서 음모로 위조(魏朝)의 양보를 받은 무제는 왕조창조에 걸 맞는 재지(才智)와 결단이 결여해 있었다. 그가 후한말의 분열은 각주장관인 자사(刺史)가 군사권을 가진데서라 해서 주군(州郡) 병력을 축소해 대군(大群)에도 군사 100인까지로 했다.
 
이것은 일시적인 천하태평에 취한 불용의(不用意)한 정책이었다. 그는 위의 조비(曹丕)가 그 당시 상황을 고려해서 한 독특한 인재 추천 제도를 시대에 맞지 않은데도 그대로 받아서 9품제도-(九品中正制度라함)를 채용하나 기존의 호족세력을 옹호하는 데 이용됐을 뿐이었다.
 
따라서 서진(西晉)의 정부가 호족을 누루고 정권의 기초를 굳힐 수 없었기 때문 황족(皇族)꽈 귀족(貴族)의 사리(私利)추구로 국가장래를 잊고 있어 국내외(國內外)에 위기가 닥치고 있었다.
 
이 때, 서(西)는 감숙(甘肅) 청해(靑海)로부터, 동(東)은 요녕(遼寧)에 이르기까지의 중국국경으로부터 남(南)은 하남성(河南省)의 내지(內地)에 미치는 지대(地帶)에는 흉노(匈奴), 오환(烏桓), 선비(鮮卑), 씨(氏), 강(羌)등의 다수 이민족이 들어와 있었다.
 
더욱이 흉노는 원주지의 사막을 장악하고 요동 요서의 장성(長城)외로부터 감숙, 청해에 걸쳐서 광대한 지역에 진출해온 동호족의 선비족은 자문(字文),모용(慕容),척발(拓跋)등이 강했었다. 그들은 무력으로서 침입, 정복자로서 점주(占州)해서, 부족조직을 그대로 남기고 있었다.
 
한편, 씨(氏)·강(羌) 등은 감숙, 청해(靑海)지방의 원주민이었으나 후한시대부터 대거(大擧)해서 감숙의 장성(長城)내로부터 협서성(陜西省) 내지(內地)에 이주(移住)했다. 이들 흉노(匈奴) 갈, 씨(氏), 선비(鮮卑), 강(羌)의 오민족(五民族)은 다섯의 호(胡), 즉, 오호(五胡)라고 총칭(總稱)한다.
 
오늘은 우리민족이 대중을 이루는 흉노, 선비(鮮卑), 갈, 씨(氏), 강(羌)의 16의 호족(胡族)이 나라를 세우고도 50년도 채우지 못하고 명멸(明滅)한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역사를 조명(照明)해 어찌해서 그리 됐는지! 그들의 대륙에서의 상황의 내면을 살펴보고 자 하는 것이다.
 
오호(五胡)의 중국내지이주(中國內地移住)
 
서기304년 흉노족 추장(酋長) 유연(劉淵)이 왕으로 칭해서 한(漢)을 세워서 파만(巴蠻-씨족의 일종一種)의 이웅(李雄)이 성도(成都)로 칭해서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가 막(幕)을 연다.
 
오호(五胡)란, 흉노, 갈, 씨(氏), 선비(鮮卑), 강(羌)족을 일컫는 것으로 한인(漢人)정권의 성립을 포함하면서도 대세는 이 호족(胡族)이 중심이 돼서 서기 439년, 북위(北魏)에 의한 통일이 완성하기까지의 화북(華北)을 무대로 격렬(激烈)한 흥망(興亡)을 반복 했다.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의 경우를 봐도 그들은 20년에서 50년을 채우지 못하고 아래에서 보듯 십육국(十六國)으로 분열된 것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오호제국(五胡諸國)의 건국과 소멸 연대(年代)를 보면 국명(國名)과 존속(存續) 연한은 아래와 같이 짧았음을 알 수 있다.
  
오호십육국 분합표(五胡十六國 分合表).
 
전조(前趙) 304~329 (25년) 전촉(前蜀) 304~347 (43년).
후조(後趙) 319~350 (31년) 전량(前涼) 324~376 (31년)
전연(前燕) 337~370 (33년) 서진(西秦) 385~431 (46년)
후량(後凉) 386~403 (31년) 남연(南燕) 398~410 (33년)
서량(西涼) 400~420 (20년) 북량(北涼) 401~439 (38년)
하(夏) 407~ 431 (24년) 북연(北燕) 409~436 (27년)
 
위 오호(五胡) 중 한족(漢族)은 전량(前涼), 서량(西涼), 북연(北燕), 3국 뿐 이었다.
 
즉,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의 시작과 끝이 2대를 가지 못하고 있음에서 보듯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4세기에서 5세기에 걸친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은 분열의 시대로 개국(開國)과 패망(敗亡)의 명멸(明滅)함이 흥미를 자아내고 있다. 어찌해서 수명이 짧았는가
 
그 수명이 짧은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 연구과제로하고 그 때의 상황을 살펴보면, 한말(漢末) 혼란기에 화북(華北)에 이주(移住)한 흉노(匈奴), 선비(鮮卑), 갈, 씨(氏), 강(羌),의 오호(五胡)족이 동진(東晋)의 쇠퇴에 편승해서 각기16국을 형성해서 상호 흥망을 되풀이 했다.
 
그 중 전진(前秦)은 부견(符堅-(338~385)때, 왕맹(王猛)등을 채용해서 강대(强大)하게 돼 일시 화북(華北)의 통일에 성공해서 383년에는 동진(東晋)에 침입을 기도 했으나 진(晋)의 장사현(將謝玄)의 비수(비水) 싸움에서 패해 강남지배(江南支配)에 실패 했다.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중 한족(漢族)은 3개로, 대세(大勢)는 선비족이 중심이 돼서 439년 북위(北魏)에 의한 통일을 완성하기 까지 화북(華北)을 무대로 격렬한 흥망을 거듭 반복했다.
 
이 시대는 격렬한 정치적 분열과 선비족에 의한 한인(漢人)지배라는 형태가 대규모형태로 처음으로 출현한 점에 특색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5호(胡)는 선비족(鮮卑族)이 중심이었다.
 
선비족(鮮卑族)은 이 시기에 중국에 침입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중국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장성(長城)남쪽에 분주(分住)했으며, 위진(魏晉)의 때에는 산서성(山西省) 전반(全般)에 확대해서 다른 지역에도 유망(流亡)이나 강제적 내도(內徒)에 의해서 산포(散布)하고 있었다.
 
이 때 정치적 분열에 관해서 말한다면 이미 후한(後漢)시대에 황건적 난을 계기로 해서 현재화(顯在化)하고 있는 삼국의 대립을 거쳐서 서진(西晉)에 의한 단기간의 통일을 본 8왕의 난에 의해서 다시 혼란에 빠져 그 중에서 5의 선비족 국(鮮卑族 國)이 탄생한다는 흐름이 있었다.
 
팔왕(八王)의 난(亂)과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의 흥망
 
여기서 팔왕(八王)의 난(亂)이란, 서기290년 무제가 죽자 정신박약자인 혜제(惠帝)를 즉위시켜 양태후(楊太后)의 부(父) 양준(楊駿)이 외척으로서 정치의 실권을 잡았다. 진왕조(晋王朝) 창업의 공신(功臣) 가윤(賈允)딸 가황후(賈皇后)는 양태후(楊太后)를 폐하고 양준(楊駿)을 배제했다.
 
이에 반감을 가진 조왕윤(趙王倫)이 병(兵)을 일으켜 가황후(賈皇后)를 죽이고 혜제(惠帝)도 폐위하고 스스로 제위(帝位)에 오른다. 이 때문에 요지에 봉(封)해져 있던 장군으로서 지방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사마씨(司馬氏)의 제왕(諸王), 팔인(八人)이 일어선 정권다툼을 말한다.
 
팔왕(八王)의 내란(內亂)은 일전해서 오호(五胡)의 이민족이 대반란(大反亂)을 초래하게 된다. 진한(秦,漢) 통일제국(帝國)이 붕괴해 다음의 수당(隨唐)의 통일제국이 나오기 까지 거대한 혼미(昏迷)의 시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다섯 선비족이 정치적 분열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사회분열이 일어나 다섯의 선비족활동을 하기 좋은 상황 하에 당시중국사회가 있었던 것이다.
 
씨(氏), 강(羌),도 후한(後漢) 후기 이래 도민(徒民)이 돼서 협서지방(陜西地方)에 다수 거주(居住)하고 있었다. 감숙(甘肅)과 사천(四)川)은 원래(原來) 그들의 거주지(居住地)이기도 하다.
 
선비족은 흉노 쇠태 후의 공백기에 진출했기 때문에 중국내지(中國內地)에의 이주(移住)는 늦었으나 중국의 혼란(混亂)을 피한 한인(漢人)을 많이 내부(內部)에 와 있었다. 호족(胡族)의 침입이라기보다는 [봉기(蜂起)]라고 하는 것이 옳은 상황이었다.
 
봉기(蜂起)의 원인은, 직접적으로는 한인왕조(漢人王朝)의 권력이 쇠태에 구(求)해지나 한편 이주(移住)한 호족이 한인(漢人)관료에 의해서 핍박이 원인돼 호족이 봉기한 것이라 본다.
 
한편 사회의 발전이 지역주변의사회의 확대가 가져온 모순이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를 낳은 것으로 보고 있다. 서기 304년 유연이이 세운 한(漢-후에 조(趙)로 개칭(改稱=전조(前趙)는 311년에 낙양(洛陽)을 함락(陷落)해서 회제(懷帝)를 붓 잡는 영가(永嘉)의 난(亂) 일으킨다.
 
또 서기316년에는 장안에 있는 민제(愍帝)를 붓 잡아 서진(西晉)을 멸망시키고 진조정권(晋朝政權)을 강남(江南)으로 옮기고 동진(東晋)이 격렬한 동족내의 권력싸움에 의해서 쇠약해 원래 한(漢)의 무장이었던 석륵(石勒)의 세운 후조(後趙)에게 멸망 된다.
 
이와 같이 격렬한 권력투쟁으로서 후조(後趙)도 붕괴해서 없어진 후는 전연(前燕)과 전진(前秦)의 두 세력으로 대립하나 오호(五胡) 군주중 제일 명군(名君)으로 칭하는 부견(符堅)의 통치하에 전진(前秦)이 전연(前燕)을 타도하고, 더 나아가 대(代)국과 전량(前涼)의 두 나라도 병합해서 376년에 화북 통일(華北 統一)에 성공한다.
 
그러나 동진(東晋) 원정(遠征)에 383년 비수(비水)에서 패배하니 여러 종족은 각기 전진(前秦)의 지배를 떠나 전연(前燕)의 계보를 이은 후연(後燕)과 장안에 있는 후진(後秦)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나라로 분열해 얼마 아니 돼 대국(代國)의 후신인 북위(北魏)가 후연을 파하고 하북지방(河北地方)을 얻어 강대화(强大化) 한다.
 
또한 서기 439년에는 다시 화북통일(華北統一)에 성공한다. 서기 420년 동진(東晋)을 대신(代身)해 성립한 송(宋)과 남북에 대치(對峙)하는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를 맞이한다.
 
선비족(鮮卑族)을 중심으로 대륙지배
 
오호제국(五胡諸國)의 지배의 중핵(中核)은 자기종족을 중심으로 하는 호족전사(胡族戰士)가 갖는 강력한 군사력이었다. 그들은 부족마다 집단을 이루고 그것을 왕실의 성원인 제왕(諸王)이 분령(分領)하는 유목국가(遊牧國家)특색을 매우 강하게 군제(軍制)를 취하고 있었다.
 
이러한 호족(胡族)에 대해서는 각국의 군주(君主)는 대단우(大單于-(황태자가 취임하는 경우가 많다.) 각국의 군주는 대단우(大單于)나 천왕(天王)이라는 칭호를 취해서 지배한다.
 
한편 한인(漢人)에 대해서는 진한(秦,漢) 이래의 군현제(郡縣制)를 적용해 관료를 모개(謀介)로 하는 지배를 했다. 이 경우는 왕(王) 혹은 황제(皇帝)라 하는 칭호(稱號)를 사용한다. 말하자면 이중지배체제(二重支配體制)를 오호제국(五胡諸國)은 채용했다.
 
그러나 양자(兩者)간에 헤어져서 있는 것이 아니라 제군(諸軍)을 분령(分領)하는 제왕(諸王)도 실은 중국식의 관호(官號)를 가지고 형식상은 그 이름 하에서 각 군을 통활 해서 얻은 것이다.
 
또 황제 호(皇帝 號)는 호한(胡漢)에 걸 맞는 것, 즉 천왕(天王), 대단우(大單于)에 우월하는 것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군주자체도 석륵(石勒)이나 부견(符堅)은 높은 교양을 몸에 지닌 것도 알려져, 한편 한인(漢人)유력자, 지식인의 등용도 적극적으로 행해져 후조(後趙)에 쓰여 진 장빈(張賓), 전진(前秦)에 쓰여 진 왕맹(王猛)은 그들의 나라의 정치에 매우 큰 기여를 했다.
 
이와 같은 오호제국(五胡諸國)은 호한(胡,漢)양세계의 통일적 지배에 부심(腐心)했다. 또한 충분히 이를 성공은 아니 했었다고 말 할 수 있으나 단기간에서 계속 차례로 멸망 해 나갔다.
 
일단 성공은 다음의 북위(北魏)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호족(胡族)이라는 신요소를 포함한 신 사회에의 제일보(第一步)를 내딛은 시기(時期)는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상은 西島定生 護雅夫, 木村常三郞, 猿谷 要 編著, ‘世界歷史の基礎知識’ (1). 142~143면, 三省堂 發行’ ‘三省堂 編修所 編’ ‘改訂 增補版 各國別 [世界史の整理] 178면 參照 引用)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국가형성의 사회사’.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智勝, ’우리上古史‘-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황순종,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반재원, ‘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권진규 ‘조선사’. 오재성,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고구리사)’, ‘우리(右犂)의 歷史는? 犂(리:東夷)歷史 쇠集’ ‘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二十一世紀出版社集團, ‘山海經’. 大連出版社, ‘行走 大黑山’.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石井進外, ‘詳說日本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Georges Duby : L'HISTOIRE CONTINUE, 松村剛 譯 ‘歷史は續く’. 坂本泰良,‘明治維新から現代へ’. 劉泳,海燕,‘赤蜂博物館’. ‘各國別 [世界史の整理] 三省堂發行’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 世界史史料集’,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石井進, 笠原一男, 兒玉幸多, 笹山晴生, ‘詳說日本史’. 稻垣泰彦, 川村二郞, 村井益男, 甘粕 健 共著 ‘日本史’. 西東社出版部編 ‘日本の古墳, 古代遺跡’ .貝塚茂樹, ‘中國の歷史’上.中,下. 西島定生 護雅夫, 木村常三郞, 猿谷 要 編著, ‘世界歷史の基礎知識’.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외 다수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을 인용(引用)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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