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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光州)는 현대사의 아픈 손가락이다. 1980년 5월 광주는 우리나라 민주화의 분깃점이다. 광주의 총성은 격변의 시대를 관통했고 지금도 아픈 역사로 우리 곁에서 숨 쉬고 있다. 광주 시민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말미암아 지금 우리는 그나마 이 정도의 언론과 집회·결사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저런 만감을 안고 오랜만에 광주행 기차를 탔다.
광주로 향하던 날 남도는 절기상 때 늦은 폭설주의보가 내려졌다. 기차가 충청도를 지날 때부터 굵어지던 눈발이 광주에 도착하니 눈보라로 바뀌었다. 광주역 앞 삼거리는 어디론가 바쁘게들 움직이는 사람들로 붐볐고 필자는 ‘AP 사진전’이 열리는 김대중컨벤션센터로 가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스며들었다.
모바일폰 지하철역 애플리케이션 지역을 광주로 설정하니 광주송정역에서 김대중컨벤션센터까지 불과 네 정거장이다. 거리로는 5.4km, 천천히 걸으면 1시간 30분 걸리는 곳이다. 날씨가 좋았으면 광주란 도시를 알기 위해 걸어볼 요량이었지만 눈과 바람을 앞세운 날씨가 꽤나 변덕스러워 지하철로 이동하기로 했다.
광주지하철은 노선이 하나다. 지하철은 평동에서부터 도시를 동서로 가로지르다가 원도심인 금남로4가역부터 녹동까지는 남북으로 이어진 ‘ㄱ’자 형태를 띤다. 송정, 상무, 원도심은 광주의 신 성장동력축이다. 지하철노선은 이 동력축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코로나19의 확산이 우려되고 날씨마저 궂다 보니 낮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지하철에는 승객이 별로 없다.
첫 방문 식당 메뉴는 무조건 제1번 골라
김대중컨벤션센터역을 빠져나오자 눈발과 바람이 거세졌다. 원래 식사를 하기로 한 장소까지 걸어가기 힘들 정도로 눈보라가 심했다. ‘따뜻한 남쪽나라’를 상상했던 순진한 생각이 여지없이 무너졌다.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눈보라가 몰아치는 가운데 멀리 노란색 국밥집 간판이 보였다. 1박2일 여정으로 내려간 광주의 첫 식사는 김대중컨벤션센터 근처 <대중국밥>에서 하게 됐다.
필자는 첫 방문 식당에서는 무조건 메뉴판 최상단 메뉴를 주문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유는 식당에서 가장 자신 있는 메인 메뉴를 상단에서부터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방문을 할 경우는 간판에서 도드라지게 강조하는 메뉴를 주문한다. 간판은 메뉴판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대중국밥>의 제1메뉴는 이름 그대로 대중국밥이다. 돼지 부속 고기를 푹 삶아서 콩나물과 함께 한 뚝배기 듬뿍 담아 내온다. 간을 따로 하지 않을 정도의 염도가 있는데, 새우젓이나 소금을 치기 전에 꼭 먼저 맛보길 권한다. 국밥은 예상보다 늦게 나왔다. 이미 끓여 놓은 국밥을 뚝배기에 옮겨 담아 화력 좋은 식당 가스불에 올리면 금방 끓을 텐데 늦은 이유는 바로 돌솥밥 때문이다.
돌솥밥은 해 놓는 것이 아니라 주문과 동시에 새로 짓는 것이기 때문에 같이 내오느라 늦는 것이다. 그래서 단골들은 식당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주문을 넣는다고 한다. 공깃밥을 제공하다가 지난해부터 돌솥밥을 지어 주기 시작했다. 과감한 변화를 통해 식당의 지속가능성을 높인 것이다. 돌솥밥은 맛도 맛이지만 대접받는 느낌을 강하게 주기 때문에 국밥집 품격을 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대중국밥, 김대중 전 대통령 향수 불러일으켜
대중국밥, 뼈해장국, 콩나물국밥, 순대국밥 등 국밥류 외에 황칠을 이용한 오리백숙, 닭백숙, 삼계탕, 황칠국밥도 인기 메뉴다. 이 집 간판에 크게 써 붙어 있는 황칠과 백숙이라는 키워드가 메뉴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이번에는 대중국밥을 먹었지만 다음번 기회가 있을 때는 황칠삼계탕을 맛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황칠은 두릅나무과에 속하는 황칠나무에서 나오는 수지액을 말한다. 황칠나무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 해남 완도 등 남부 해안 지역과 제주도에서만 자생하는 상록활엽수로 알려져 있다. 나무껍질에 상처를 줘서 황칠액을 얻는다. 삼국시대에는 황금색이 나는 도료로 많이 사용됐다가 이후 항암, 항산화, 진정·강장, 피부미백 등의 효과 등이 연구되면서 건강식으로 전해진다.
두릅나무과에는 인삼, 오갈피 등 질 좋은 고급 약용재료가 포함돼 있어 황칠나무는 일찌기 약리효과가 우수한 수종으로 인식돼 왔다. 조선시대에는 궁중가구에 주칠을 주로 사용했으나 대한제국기에 이르러 벗겨진 주칠 위에 황칠을 입혔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황칠은 황제를 상징하고 황태자는 주칠로 표현됐다.
<대중국밥>은 돌솥밥에 한번 놀라고 푹 곰삭은 반찬에 두 번 놀란다. 족히 3년 이상된 맛을 내는 김치, 깍두기, 열무김치는 물론 웬만한 식당에서는 공장용으로 내놓는 깻잎도 직접 담가서 익힌 것을 내놓는다. 식당 업력이 25년이 되다보니 반찬도 주인 따라 웅숭 싶은 맛을 낸다. <대중식당>의 ‘대중’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름에서 따왔냐고 물으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며 말끝을 흐렸다. 김 전 대통령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좋은 이름이다.
대중이란 단어가 워낙 대중적인지라 ‘이현령비현령’이 되겠다 싶었다. 김대중컨벤션센터 근처 <대중국밥>은 식당 주인의 진정성과 손님을 대접하는 마음이 국밥 한 그릇에 오롯이 담겨있다. 돌솥밥을 지어주기 시작하면서 팔 관절이 상했고 뜨거운 것을 만지다 보니 지문이 닳아 없어졌다는 말이 오래도록 남았다.
빛고을서 열리고 있는 빛의 향연 ‘AP사진전’
국밥집을 나서서 서둘러 김대중컨벤션센터를 향해 종종걸음을 걸었다. 날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맑게 개어 있었다. 푸르디푸른 광주의 하늘이 객을 반겼다. AP사진전을 함께 보기로 한 지인들이 컨벤션센터 1층에 먼저들 와 있었다.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너를 다시 볼 수 있을까’라는 부제로 열렸던 AP사진전이 2019-20 시즌에는 ‘빛의 기억, 찰나의 역사’란 제목으로 광주에서 전시되고 있다. 빛고을 광주의 장소성과 빛의 예술인 사진이 주는 이미지를 잘 공감각화 시킨 부제다.
AP(Associated Press)는 미국의 통신사다. 통신사는 뉴스콘텐츠와 사진, 비디오자료 등을 신문사에 파는 뉴스도매상 같은 곳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뉴시스, 뉴스1, 뉴스핌 등이 있는 데 규모는 사뭇 다르다. 외국 통신사 콘텐츠를 쓰고 싶으면 제휴관계가 있는 국내 통신사에서 사 써야 하는 구조다.
현장에는 전시회 주관사인 문화공방 디케이비 이영민 대표가 나와서 반갑게 객을 맞았다. 이번 관람은 한국축제포럼 회원들을 위한 것이다. 이날은 안남일 포럼 회장(고대 교수), 정연길 상임이사와 서울과 광주전남 지회 회원들이 다수 참석했다. 한국축제포럼은 문화관광 축제 발전을 위한 인재육성과 자체 역량강화를 위해 만든 민간 사단법인체다.
사진전 작품은 AP측에서 디지털 아카이브 로그인 정보를 제공하면 국내 선별위원들이 그곳에 접속해서 3000여장을 1차로 추려낸다. 1억장이 넘는 사진 속에서 수 천 장을 추려내는 작업도 만만치 않지만 전시작품으로 최종 선별하는 과정은 필자 같이 결정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는 곤욕일 터다.
그런 과정을 통해 선별된 작품이 적지 않게 전시돼 있다. 관람 포인트는 ‘빛’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빛이 남긴 과정, 빛의 온도, 빛의 기억, 찰나의 역사 등 빛고을 광주에서 전시되는 장소성을 듬뿍 담고 있다. 지뢰에 한쪽 다리가 희생된 4명의 건장한 남성들이 목발을 짚고 태양을 등지고 서 있는 모습은 전쟁의 참상을 고스란히 비언어적으로 전달한다.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을 부제로 한 북한특별전도 볼거리다. 사진전은 오는 3월1일까지라고 하니 얼마 남지 않았다.
눈발 뚫고 도착한 옛 정취 그윽한 <동화정>
전시회를 보고 원도심지역인 북구 용봉동을 가는 길에 다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종잡을 수 없는 날씨지만 대설주의보를 내릴만한 눈은 아니었다. <동화정>이라는 식당은 들어서는 순간 옛날 대폿집 생각이 났다. 정감 어린 반김과 낯익은 분위기가 그러했다. 광주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18개 극단이 단골로 애용하는 곳이라고 한다. 이 말은 문화예술인들의 가난한 뱃속을 인심으로 넉넉하게 채워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화정>은 계절음식, 생상겹살, 백반이 전문인 식당이다. 이날 내놓은 음식은 ‘주물럭+낙지’라는 메뉴로 커다란 살아있는 낙지를 뜨거운 국물에 퐁당 빠트리는 퍼포먼스가 압권이다. 밑반찬은 꼬막, 청어, 묵은 총각김치, 두부김치 등이 넉넉하고 푸짐하다. 메인요리가 나오기 전 밑반찬만으로도 배를 채울 수 있는 곳이다. 전체 메뉴를 보니 육류와 해산물이 다양해서 술 한잔 마시기 딱 좋은 집이다.
<동화정>을 나서서 2차로 장소를 옮기려는데 폭설주의보답게 커다란 함박눈이 거침없이 뿌렸다. 비는 사람을 피하게 하지만 눈은 고스란히 받아내는 기쁨을 준다. 광주의 밤은 눈 속으로 그렇게 파묻혔다.
금남로에서 맞닥뜨린 옛 전남도청과 전일빌딩
잠에서 깨보니 숙소인 ‘희재가’란 게스트하우스다. 1층은 평소 카페로 사용하고 2층은 통째 숙소다. 광주중앙도서관 인근 주택가에 위치한 아담하고 예쁜 곳이다. 구석구석 정갈함이 집주인의 성격을 대변하고 있다. 일행들이 깨기 전에 집을 나섰다. 광주란 동네를 좀 걸어보기 위해서다. 더불어 해장할 식당을 찾을 목적도 있다.
서석초등학교를 지나 조금 걷다 보니 5.18민주항쟁 당시 전남도청이던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나왔다. 금남로에 다다른 것이다. ‘충장로 금남로 굽어보며 웃는 형제여~ 잊으리 그대 넋이 핏물 되어 흐르던 날~ 끓는 피 총을 들고 전진하는 혁명광주’란 노랫말이 생생하게 그려지는 순간이다. 전남도청 건물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민주평화교류원으로 쓰이고 있다. 맞은편에는 전일빌딩이 서 있다. 5.18민주항쟁 당시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건물이다. 하얀 외벽에 주황색으로 당시 피탄 자국을 표시해 놓고 있다.
영업시간 전에 손님 반겨준 ‘남원추어탕’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해장집을 찾았지만 9시가 갓 넘은 시간이라 문을 연 곳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근처에는 평양냉면 면옥 <평양옥>이 있었지만 아침나절이라 발길이 가지지 않았다. 물론 문을 열었는지도 불분명했다. 마침 전일빌딩 주차장 옆에 <남원원조추어탕>이란 간판이 보였다. 아직 손님 받을 시간이 아니었지만 흔쾌히 들어오라고 한다. 추어탕 한 그릇과 지역 막걸리인 무등산막걸리를 주문하고 모바일폰에 담은 사진을 넘겨봤다.
당황스럽게도 갑자기 감정이 복받치면서 눈물을 쏟고 말았다. 빛고을에 진 빚진 자의 마음이다. 80년대를 관통하는 세대의 일원으로 광주가 피로 적신 옥토에 민주주의라는 싹을 제대로 틔우지 못한 죄책감이 일순간 몰려들었다.
정갈한 반찬과 달근하고 입에 착 붙는 맛인 추어탕을 먹으면서도 내내 눈물을 흘렸다. 뜨거운 국물 탓인지는 모르지만 훌쩍거림은 계속됐다. 무등산막걸리는 근래 마셔 본 지역 막걸리 중에 수작으로 손꼽는다. 무엇보다 영업시간 전임에도 불구하고 여행객의 주린 배를 위해 자리를 내준 마음이 참 고마웠다. 광주는 세계김치축제를 매년 개최하는 남도음식의 본고장이다. 그래선지 대부분 식당이 기본 이상의 맛을 낸다. 광주, 맛있는 기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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