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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이의 군사이슈

국가론적 관점에서 본 6·25 전쟁

자유민주통일로 국민국가체제의 완성 이룩해야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1-06-24 09:42:41

 
▲박정이 (예)육군대장·국제정치학 박사
6·25 전쟁은 북한군의 기습남침과 지연전 및 낙동강 방어선 사수(1950.6.25∼9.14), 인천상륙작전과 총반격 및 한·만 국경선으로의 북진(1950.9.15∼10.25), 중공군 침략과 새로운 전쟁의 시작(1950.10.25∼1951.7.9/1∼5차 공세), 휴전회담과 고지 쟁탈전(1951.7.10.∼1953.7.27)으로 전개되었다.
 
6·25 전쟁의 성격을 살펴보면, 6·25 전쟁은 통일지향의 침략전쟁으로 냉전을 구조화시켰으며, 내전의 성격을 띠면서도 세계의 독립국가 93개국 중 73개국이 참여한 국제전으로 유엔 집단안보의 최초 사례였다. 6·25 전쟁은 대한민국으로선 5000년 민족사의 가장 참혹한 파괴와 살상을 가져다준 북한의 반민족적 침략전쟁이었으나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대한민국의 대변혁을 가져다준 계기가 되었다.
 
국가 건설과 전쟁은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이자 결과로 작용한다. 먼저 정의상 전쟁의 주체는 국가이다. 왜냐하면 전쟁은 독립된 정치적 단위인 국가들의 조직화된 군사력 사이에서 벌어지는 실질적인 무력 갈등이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은 비정치적 방법을 통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점에서 정치의 연장이기도 하다. 국제체제에서 배타적 주권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가 자신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전쟁을 지향하는 것도 국가의 고유 임무이자 역할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국가 형성 과정에서 전쟁이 빈발했던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이다.
 
전쟁과 국가건설의 상호작용에 대해 틸리(Charles Tilly)가 “전쟁이 국가를 만들고 국가가 전쟁을 만들었다”고 주장한 것은 정곡을 찌른 말이다. 무엇보다 16세기 이후 군주들의 패권경쟁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일상화되었는데, 전쟁에서의 승패 여부가 곧 국가건설자로서 군주의 운명을 가늠하였다. 그리고 전쟁에 대비하는 과정과 특히 전쟁에서의 승리는 국가건설에 관련된 핵심적 문제까지 일거에 해결해주는 부수적 효과까지 동반하였다. 예컨대 대외적 세력으로부터 주민보호를 위해 자원 추출 및 동원 능력이 극대화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내적 경쟁 집단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물리적 강제력의 독점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또한, 영토의 획정이나 국가기구의 사회적 분화 및 자율성의 확보 역시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국가에게 주어진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다.
 
대한민국은 6·25 전쟁을 통해 세계 역사상 유례가 드문 고난을 극복하면서 스스로가 원하는 제도개혁을 이룩해 나가는 가운데 자신의 역량을 신장시켜 발전국가의 물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6·25 전쟁을 수행하면서 신생 대한민국은 제도적으로나 기능적으로 강화된 근대국민국가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6·25 전쟁은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한 사회통합을 이루어 국민화를 달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해방정국의 사회 분위기 속에 좌파 헤게모니가 형성되었지만 미 군정의 시행으로 그 주도권이 우익 단정수립세력으로 넘어갔다.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체제 전복 활동은 계속되어 국가보안법(1948.12)이 제정되고 특별조치령(1950.6)도 공포하여 좌익세력을 척결해 나갔다. 그러나 정부의 반공정책과 더불어 전쟁 3년간의 경험은 너(적)와 나(우군)의 정체성을 명확히 해주었고, 북한의 무자비한 학살과 실정은 남한 국민들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사회통합에 크게 기여하였다.
 
아울러 강력한 군사력 건설과 안보역량 구축은 경제발전을 위한 튼튼한 버팀목 역할을 하였다. 6·25 전쟁 발발 시 10만여 명이던 국군은 휴전 시 60만 대군으로 급성장했다. 1950년에 발발한 6·25 전쟁을 계기로 대한민국에 대한 미국의 대규모 개입이 이루어졌고, 그 후 공동으로 전쟁을 치른 한·미 양국은 혈맹이라는 특수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미국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음으로써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세계자본주의 경제질서에 자연스럽게 편입될 수 있었다.
 
6·25 전쟁은 영토적으로도 대한민국을 국민국가로 형성시켰다. 전쟁 전에도 한반도는 38도선에 의해 남과 북이 갈라져 있었지만, 이때의 38도선은 국경선이 아니라 임시 경계선이었다. 그러나 6·25 전쟁은 38도선을 휴전선으로서 그 경계를 보다 명확히 하였고, 정전체제는 38도선을 남북한 간의 군사분계선으로 만들었다.
 
6·25 전쟁은 관료기구(행정기구)의 강화를 가져왔다. 해방 후 미 군정청은 사회통치를 위해 고도로 발달된 조선총독부의 기구를 그대로 이양받아 발전시켰는데, 제1공화국의 관료제도는 이러한 구조적 기반 위에서 성립되었다. 6·25 전쟁은 행정적인 면에서 관료조직에 대한 행정사무의 중압으로 나타나 신망있고 경험이 풍부한 전직 관리들이 대거 진출하여 식민지적 관료성격이 증대되었으며, 1954년 헌법 개정은 대통령 중심제 하에서 행정부의 기능을 더욱 강화시켜 주었다.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제도들의 성공적인 초기 제도화이다. 해방 후 미 군정에 의해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제도들이 도입되었는데, 이 시기에 한국에서 역사상 최초로 입헌공화제 민주주의가 시도되었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권위주의적 지도자였던 이승만 대통령도 몇 차례의 헌법 변개사태가 있었으나 삼권분립 원칙을 존중하면서 1948년 헌법을 폐지하지 않았다.
 
6·25 전쟁은 자본축적 및 자원동원체제의 구축을 촉진하였다. 농지개혁을 통해 소작제가 폐지되고 지주가 몰락하여 자본주의적 생산구조가 형성되었고, 귀속재산 불하를 통해 신흥 자본가들이 육성되어 자유시장경제체제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전비조달은 미국의 원조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으나, 막대한 군사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조세임시증징법을 제정하고(1950.12) 전세가 계속 악화되자 임시토지수득세법을 제정하여(1951.9) 전시체제를 강화하였다. 병력동원을 위해 1949년 8월에 병역법이 제정되었으나 1952년 2월부터 징집을 준비하여 점진적으로 병력을 충원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대한민국은 완전하게 국가의 모습을 갖추기도 전에 북한의 기습적인 공격을 받아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을 맞이했으나 이승만 정부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국권을 수호함으로써 대한민국이 제도적으로 성숙되고 자율성과 능력을 구비한 국가체제로 더욱 강화되었다. 6·25 전쟁을 통해 근대국민국가로 탈바꿈한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남북통일을 이룩하여 완전한 단일민족국가를 건설해야 하는 과업을 안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반도 내에서 국가건설과 통일은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세력균형이 어떻게 분포되느냐에 따라 그 영향을 받아 왔다. 한반도 자유통일을 달성하고 국민국가체제를 완결하기 위해서는 주변국들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국력과 국격을 갖춘 중견국가으로서의 능력과 태세를 구비하고, 국가책략의 발전과 외교역량을 강화해나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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