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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와 일본의 역사왜곡 어디까지 하고 있나 <237>

진(秦)은 한족(漢族)아닌 동이(東夷)가 세운 나라

제후난립시대, 전국칠웅제압(全國七雄制壓)한 진(秦)이 통일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2-01-22 13:15:54

▲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전국시대의 진(秦), 초(楚), 연(燕), 제(齊), 한(韓), 위(魏), 조(趙)등 강성했던 7개 나라를 전국칠웅(全國七雄)이라 부른다. 이 7국 중에도 진(秦)이 다른 6국보다 강하였다. 그 이유를 말한다면 3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전국(戰國) 칠국(七國)중에서도 가장 문화가 앞서 우수한 인재가 위(魏)에 있었는데 위(魏)가 멸망한 뒤에 많은 인재가 이주해온 것이다.
 
둘째는 우수한 군마(軍馬)와 이를 잘 다루는 주변의 유목민을 대량으로 포용한 일이었다. 
 
셋째는 현재의 사천성(四川省)인 파촉(巴蜀)의 땅을 얻은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 파촉(巴蜀)의 땅은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기 때문에 물산(物産)이 풍부해 중원(中原)이 전란(戰亂)이나 기근으로 살기 어려워지면 사람들은 풍요로운 사천(四川)으로 이주를 해 왔다.
 
후삼국시대 위(魏)나 오(吳)가 평야지대를 선호한 것과 달리 촉한(蜀漢)의 제갈공명(諸葛孔明;서기181~234년)은 작으면서도 물산이 풍부한 사천(四川)의 땅을 선택하여 20년간에 걸쳐서 국가를 경영한 것은 유명하다.
 
당시 춘추전국시대로 모든 부족 중의 주체는 예맥이라 칭한다고 했다. 지나(支那)서전무성편(書傳武成篇)에 화하만맥(華夏蠻貊)이라 했다. 춘추전국시대에 지나를 정벌한 민족은 예맥조선족임을 말하고 있다. (論語卷14 憲問 第14)
 
사천(四川)의 땅은 티베트로부터 루트(route)를 통해서 인도와도 교역을 할 수가 있었고 이로 인하여 많은 교역상(交易上)의 부(富)를 축적할 수가 있었다. 특히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칠웅(七雄)중 가장 문화가 앞서 있던 위(魏)가 급속히 쇠퇴했는데 그 이유는 위(魏)와 연(燕)을 제외한 5강국과 국경이 접해있어 늘 침략을 받아 피폐해졌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본국의 무위무책(無爲無策)에 실망한 많은 위(魏)나라 사람들은 다른 문명국에 가는 것 보다 이웃의 진(秦)에 망명을 한 것이다. 당시 진(秦)은 문명이 가장 뒤진 국가로 말해지고 있어서 망명을 하는데 안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은 진(秦)나라도 한족(漢族) 아닌 동이(東夷)가 세운 나라임을 밝히려 한다.
 
진왕(秦王;秦始王)은 어느 민족인가
 
지나(支那)는 진왕(秦王)을 자기들의 민족이라 하나 이 시대에 한족(漢族)은 없었고 모두 우리 동이족(東夷族)의 시대였다. 진(秦)나라를 세우고 800년 만에야 지나(支那)를 통일했다는 정(政) 즉 진왕(秦王;서기전 259~서기전 210년)도 한족(漢族)이 아니라 우리 동이족임을 바로 알 필요가 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진왕실(秦王室)은 동이의 여수(女脩)의 후손이라 하고 있다. 동서(同書)에 의하면 여수(女脩)의 자손 중에 오래(惡來)가 있었는데 그는 은(殷)의 마지막 군주 주왕(紂王)의 신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은(殷)이 망한 후 오래(惡來)의 후손인 조보(趙高)가 주(周)에서 공을 세워 제5대 목왕(穆王;서기전 997~서기전 922년)으로부터 조씨성(趙氏姓)을 하사(下賜)받았다가 그 후 비자(非子)가 제 8대 효왕(孝王)의 총애를 받아 영씨(嬴氏) 성(姓)과 함께 진(秦)이라는 지역에 봉토(封土)를 받았다 한다.
 
그 후손 중에 진시왕(秦始王)으로 널리 알려진 영정(嬴政)이 나타나 춘추전국시대의 강국들인 초(楚), 연(燕), 제(齊), 한(韓), 위(魏), 조(趙)를 물리치고 중원(中原)을 통일하였다고 하고 있다. 그는 본래 서이(西夷)족으로 흉노계열이다.
 
한편, 진(秦)은 북(北), 서(西), 남(南)의 세 방면에 이민족과 국경을 접해있었기 때문에 영토의 확장과 함께 이민족 병사를 길러서 기마전술의 습득과 군마의 수입, 증산에도 힘써서 중원을 통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북방 유목민족으로부터 기마전술을 배운 군사대국 조(趙)와는 라이벌적인 존재였으나 진(秦)이 조(趙)나라를 격파하니 화북지방(華北地方) 군사균형이 일거에 무너져서 지나(支那)통일을 달성했다고 하고 있다. (以上은 정희철, [중국은 없다]. 136面~138面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53面이하88面參照,本文)을인용했음을 밝힙니다.)
 
진(秦)이 달성한 통일지역은 현재의 지나(支那) 본토인 정주(正州)와 일치하고 있다. 여기서 지나본토(支那本土) 정주(正州)란, 거의 한민족(漢民族)만이 점해 있는 지역이라 하나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순한족(純漢族)은 지나에도 없다. 지금 지나인은 이민족과 융합된 신 지나인(新 支那人)인 것이다.
 
진시왕(秦始王)의 흥망(興亡)과 패망원인
 
진왕(秦王)인 정(政)은 춘추전국시대의 강국들인 초(楚), 연(燕), 한(韓), 위(魏), 조(趙)를 물리치고 마지막으로 제(齊)를 서기전 221년에 멸하고 춘추이래의 난세 통일을 달성하자 지금까지의 봉건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관료제도를 채용해서 군현제를 두고 중앙으로부터 역원(役員)을 임명해서 파견했다.
 
이미 기술한 바 있지만 진왕(秦王)이 택한 정책 중 특기할만한 것은 지금까지 나라마다 달리하고 있던 문자의 자체(字体), 차륜(車輪)의 폭, 도량형, 화폐등의 제도를 통일한 것이다.
 
그런대 진왕(秦王)은 나라마다 있던 성벽을 파괴하고 병기를 몰수한 위에 전국12만호의 부호(富豪)를 국도에 옮기고 장려한 궁궐과 기타 토목공사를 일으킨 것과 문자의 통일을 한다며 한자(漢字)의 수를 3300자로 정하여 지금까지 한자를 이용한 각종의 서적을 일거에 파기하고 만 것이다.
 
이것을 후세사람들은 ‘분서(焚書)’라고 하는데 진왕(秦王)은 서체와 읽기를 통일한다고 하였으나 이는 아주 잘못한 것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이었다.
 
또한 진왕(秦王)이 패망으로 가는 사업은 자신을 위해 지하궁전을 시작하여 매년 70만 인원을 동원해서 죽을 때까지 조영을 시키고 공사가 끝나면 비밀 보호유지를 위해 전원을 능묘(陵墓)내에 매장한 것이다.
 
또 한편에서는 수도 함양(咸陽)의 궁전과 치세의 말기에는 위수(渭水)를 낀 함양의 대안(對岸)에 새 궁전인 아방궁의 건설을 35만의 인원으로 궁(宮)을 짓게 하였는데 이 인원조달은 왕이 70만 명을 징발하라고 명령내리면 진왕(秦王)의 지배하에 있는 관료는 경범자라도 끌어다 채우면 그만이었다.
 
조선조(朝鮮朝), 정조대왕(正祖大王)은 수원성(水原城)을 쌓을 때 임금(賃金)을 주면서 쌓은 것과는 달리 임금도 없이 혹사하면서 병이나 사고로 사망해도 아무런 보상이 없었다. 이로 인한 백성의 원성은 극에 달하였다.
 
이 때에 진승(陳勝)이 대택(大澤)에서 혁명군을 일으켜 ‘진(秦)을 타도하자!’ 외치니 천하가 유수(流水)같이 호응하였다. 이는 진(秦)이 강권으로 백성을 억압한 폐해이다. 재래 지나 학자들은 진을 타도한자는 진승과 항우라 선전하였다.
 
그러나 진(秦)이 예맥(예(銳麥;濊貊))과 남월(南越)의 전란으로 진(秦)멸망의 원인이 된다. 이 혼란에 빠진 때 진승(陳勝) 항우(項羽)가 궐기한 것이었다.
 
글을 맺으며 - 지나(支那)와 일본의 역사허구 바로잡아야
 
지나(支那)는 진승(陳勝)과 항우(項羽)가 진을 멸망시켰다하고 일본은 진(秦)이 예맥(銳麥;濊貊)과 남월(南越)을 평정하였다고 하니 우리나라 학자들도 모두 다 그리들 보고 있으나 예맥과 남월은 건재하고 있었다.
 
지나(支那)와 일본은 똑같이 ‘진(秦)이 예맥(예(銳麥;濊貊)을 일소하였다고 하고 있으나 이 시대는 흉노(匈奴)라는 예맥(예(銳麥;濊貊))은 건재했다.
 
그리고 같은 해인 서기전 214년 절강(浙江) 남부로부터 복건(福建)에 걸쳐서 활거하고 있던 월(越)이 있었는데 진군(秦軍)이 이들을 제압 시켜 진왕(秦王)이 복건,(福建) 광동(廣東), 광서(廣西), 인도지나의 하노이까지 복속시켜서 각기 군(郡)을 두었다고 하고 있으나 허구(虛構)로 보고 있다.
 
흉노(匈奴)라는 예맥(예(銳麥;濊貊))에 군(郡)을 둔적이 없고 월(越)도 건제하여 예맥과 남월이 진(秦)을 타도한 것을 거꾸로 엮고 있다.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가 유연제노오월(幽然齊魯吳越)을 100만 대군으로 정벌한 삼국사 권46의 역사와 지나(支那)의 남제서(南齊書)권58의 기록을 봐도 월(越)은 건재하고 있었다.
 
끝으로 진(秦)의 멸망에 대하여 말하면, 전국시대 7국의 하나로서 산서성(山西省) 지방에 있었던 한[(韓)]은 서기전402년 제후(諸侯)의 열(列)에 참여하여 이름을 떨치다가 서기전 230년 진왕(秦王)에게 토멸을 당하였다.
 
이때 한(韓)나라 20세 청년 장량(張良)이 망국지원(亡國之怨)을 품고 창해역사(滄海力士) 여후영(碑文에는여홍성(黎洪星)으로 나옴)에게 박랑사중(博浪沙中)에서 120근 철추(鐵椎)로 진시왕을 박살내고 한고조 유방(劉邦)의 모사(謀士)가 된 것은 청사(靑史)에 전해지고 있다. 이 때가 서기전 210년이었다.
 
이후 환관(宦官) 조고(趙高)가 변방에 나가 있는 장자(長子)에게 진왕(秦王)이 사약(賜藥)을 내렸다고 속여서 죽이고 막내아들 호해(胡亥)를 즉위시켜 권력을 장악하여 국정을 농단함으로 각지에 파견된 장수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망한다.
 
반군(叛軍)의 무리 중에 유방(劉邦)은 혼란한 틈을 타서 함양(咸(陽)을 점령했으나 항우(項羽)가 관중(關中)의 관문인 함곡관(函谷關)을 점령하자 항우(項羽)에게 항복하고 한중(漢中)일대로 좌천(左遷)되어 한왕(漢王)에 봉해졌다.
 
이후 유방(劉邦)은 이곳에서 힘을 키워 한(漢)을 세우나 당시 북방에는 강력한 예맥족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漢)은 한고조(漢高祖)가 이들을 공격하였다가 60년간 예맥에 조공(朝貢)을 바친 사실들을 숨기나 숨길 수 없다.
 
진(秦)나라는 본래가 우리 북방기마민족이 세운 나라이고 그들이 말하는 흉노계열의 서이족(西夷族)이기에 우리역사에 편입되어져야 할 나라다. (以上은 (文定昌, [古朝鮮史硏究],109面, 정희철 [중국은 없다]. 136面~138面. 杉山徹宗,「眞實の中國四千年史」 53面~88面, 외에 기타 서적 참조하고 본문을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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