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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류사 첫 ‘초거대 한민족 피라미드’ 400여개 은닉
이을형의 ‘법과 정의’…한국의 상고사 찾기(18)-신시배달국사(神市倍達國史)(10)
이을형 필진페이지 + 입력 2014-03-08 23:16:26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
 
중국 역사의 약점은 우리와는 대조적으로 역사의 빈약함이다. 중국은 상고사가 없는 나라다. 그들은 환국과 배달국시대 우리와 같은 역사가 없다. 이는 지금 대국이 된 중국이 역사에 대한 열등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우리의 상고사를 자기들 역사에 제멋대로 맞추고 조작해서 억지로 만들어 가는 이유다.
 
배달국시대까지도 중화인(中華人)의 나라는 중원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삼황오제설(三皇五帝說)을 조작해 마치 상고시대 역사가 있었던 것 같이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헌원 이전의 역사는 기록도 없다. 그들이 말하는 삼황오제도 우리의 역사다.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중국의 삼황(三皇)이라는 수인씨(燧人氏), 복희(伏羲氏), 신농(神農-소전·少典의 아들)과 오제(五帝)라는 천황씨(天皇氏), 유소씨(有巢氏), 고시씨(高矢氏), 치우씨(蚩尤氏), 신지씨(神誌氏) 등이 바로 한민족의 역사인물들이다. 이외에 역사적 인물로 여왜(여와·女㛂), 소전(少典), 유망(楡罔), 소호(小昊) 반고(盤固), 헌원, 전욱(전頊), 제곡(帝嚳) 등도 마찬가지다.
 
요·순은 우리의 한민족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나라들은 우리 배달국 사람이기에 우리 선조들이다. 당시 또 나라가 있다고 해도 우리가 지배하거나 우리의 제후국이었다. 단군조선에 와서 우리는 고도의 문명국으로 부상했다. 이는 당시 법률이며 화폐가 발견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단군시대 우리 선조들은 태평성대를 누렸다. 한서지리지(漢書地理誌)에 ‘조선에는 도둑이 없어 문을 열고 잔다’는 기록이 있다. 죄에 대한 형벌제도도 명문화 했을 만큼 고도의 문명국이었다. 이 당시부터 가림토의 문자가 있었기에 기록이 가능했다. ‘한국은 성인(聖人)이 세운나라’라고 할 만큼 ‘홍익인간’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정신으로 그 축이 됐다. 지금도 홍익인간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류의 정신이다.
 
우리는 천민(天民)의 자손으로 천손(天孫)을 자처하며 태고시대의 옛날부터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민족이었다. 그 제천의식은 높은 산 정상에서 행해졌고, 산이 없는 평야지대에서는 제천 단(祭天壇)을 쌓고 제사를 드렸다. 그 평야지대에 쌓은 제단이 바로 피라미드의 시작이다. 이 피리미드가 후에는 통치자 무덤으로 변화한 것을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인류의 문명은 4대문명으로 알려져 왔지만 요하에서 인류의 최초·최고 문명이 일어난 것으로 밝혀지면서 세계 고고학계는 문명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하게 됐다. 요하문명(홍산문명)은 4대 문명보다 1000~2000년 앞선다. 따라서 홍산은 우리 선조들이 최고·최초로 일으켜 세계사를 주도했음을 상징하는 문명이다. 지금까지 인류 최초의 문명이라던 메소포타미아 문명도 우리 민족이 BC 3100년경 이곳으로 이동해 일으킨 것은 이제 상식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한 논문들이 그 연구결과를 동일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집트의 피리미드도 요하문명을 일으킨 인종에 의해 나왔다는 사실이 학계에서 발표되고 있다. 예컨대,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의 요시무라(吉村) 교수는 “홍산문명을 일으킨 검은머리의 인종이 BC 3100년경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키고 수메르에서 귀화한 ‘임호테프’ 사람에 의해 BC 2700년 전 이집트 최초의 피라미드가 탄생됐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요시무라(吉村) 교수의 이 같은 고증은 지금까지 인류 최고의 문명이라고 알려졌던 수메르문명이 사실은 우리 한국의 배달문명을 이룩한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만든 문명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이집트문명 역시 배달문명을 이룩한 사람들에 의해 처음 이뤄 졌다는 것이다. 이번 칼럼에서는 세계 5대문명과 피라미드의 이 같은 역사적 사실들을 고찰하고자 한다.
 
5(五)대 문명이 나온 역사적 배경과 시대적 상황
 
5대 문명이 우리 한민족 주도로 된 것을 식민사관의 사람들은 믿지 않고 있다. 하지만 우리 한민족인 기마민족이 문명의 발상지를 오고 가며 침입 내지 정복해서 이룬 것이 5대문명의 실체다. 역사의 기술(記述)은 대개 문명이 나온 배경을 농경이 대하유역(大河流域)에서 발달한데서 출발하고 있다. 이 일대에서 생산이 증대되고 인구가 증가해 통치체제가 갖추어지면서 실제로 문명이 일어났다. 그 당시 부족의 지배자도 출현해 부족국가가 왕조국가로 발전하며 5대 인류문명이 대하(大河)를 중심으로 발원했다. 그 중심에는 우리 한민족이 있었다.
 
우리가 5대문명에 관여했다. 메소포타미아문명, 이집트 문명도 우리가 주도했다는 것은 이미 기술한 그대로다. BC 6000년대부터 보리 등 농경민, 초원의 유목민, 산림의 수렵민 등이 공존하며 상호 필요한 물품을 교류하며 살았다. 티그리스·유프라테스 두 강의 유역은 토지가 비옥했으나 강우량이 적어 건조했기 때문에 지하수도, 제방, 저수지, 운하 등의 문명이 탄생하는 배경이 됐다. 필요한 물을 끌어 사용하는 관개(灌漑) 기술이 나오게 됐다.
 
이집트 나일 강은 여름마다 홍수로 물이 넘쳐 상류로부터 비옥한 흙이 운반됐기 때문에 보리농사가 발달하면서 많은 도시국가가 생겨났다. 인류는 샘족, 야벳족, 함족으로도 구분하는데 이집트에서는 함족에 의해 BC 3500년경부터 도시국가 형성돼 BC 3000경 통일왕조가 수립됐다. 이후 왕조는 몇 번이고 교체됐는데, 기마민족이 이곳까지 와서 농경지대에 침입하고 정복하는 일이 많았다. 나일계곡에 연한 농경지역에서 봉쇄적인 지형 때문에 특색 있는 문명을 낳았고 BC 525년 페르시아에게 통일 될 때까지 약 30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이 때문에 교통로, 교역로인 산림지대의 길, 초원의 길, 오아시스의 길 등이 넓혀졌다. 문화적으로는 태양력 측지술(測地術), 문자의 발명, 피라미드, 사자(死者)의 서(書) 등이 있다. 나일강의 범람을 통제·관리해 홍수의 피해를 막고 경작지를 확대했다. 이것이 이집트의 정치통일과 강대한 왕권의 출현에 중요한 바탕이 됐다.
 
메소포타미아는 이집트에 비해 개방적인 지형이다. 따라서 주위의 산악부에 상당히 유력한 유목민인 기마민족이 침입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국가성립은 비교적 늦게 성립되고 국가의 흥망도 빈번했다. 반면 문화교류가 빈번해 앗시리아, 페르시아 등과 같이 오리엔트의 통일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 메소포타미아는 왕권이 강대해 계약의 관념이 발달했다. ‘함무라비법전’은 그것을 상징한다. 이 지역에서는 페르시아에 의한 통일과 전제국가 체제가 완성됐다. 문화적으로는 태음력, 육십진법을 비롯해 설형문자(楔形文字), 페니키아의 표음문자, 헤브라이 일신교 등을 낳았다. 인더스문명은 인더스 강 유역에서 농경을 넓혀 BC 2500년경부터 각지에 훌륭한 도시를 건설한다. 이곳에서는 청동기(靑銅器)가 사용돼 인더스 문자도 만들어진다. 그리고 앞서 문명을 일으킨 메소포타미아와도 교류가 있었다. 우리 한민족은 이곳까지 영향을 미치며 인더스문명을 일으켰다. 기마민족의 기동력은 놀라워 이곳 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황하문명 또한 우리 한민족이 일으킨 문명이다. 우리가 역사에서 중원(中原)이라는 곳이 바로 황하지역을 말하는 것인데, 우리 민족이 이곳에 먼저 선주(先住)했다. 그 당시 황하유역의 사바나 지대에서는 사람들이 수렵, 목축과 함께 보리, 조, 등의 농경을 발달시켰다. BC 1500~1200년경에는 우리 한민족이 주축이 된 여러 도시국가가 이곳에서 탄생된다. 그 중 은(殷)나라가 가장 대표적이다. 은(殷)나라는 우리 한민족이 세운 나라다. 서아시아 북방 유라시아의 우리 민족이 청동(靑銅)의 칼 등을 갖고 왔기 때문에 어느 민족국가보다 강력한 왕조를 건국할 수 있었다. 황하문명에서는 뛰어난 청동기와 한자의 시조가 되는 갑골문자(甲骨文字)도 나왔다. 갑골문자(甲骨文字)는 주자(呪者)가 귀갑(龜甲), 우골(牛骨) 등을 불에 태워 그 위에 정치적 결정이나 곡물의 풍작, 흉작을 점치는 행위 등을 기록한 것을 말한다. 당시의 은 왕(殷王)의 묘나 궁전도 발굴되고 있다. 은허(殷墟)가 바로 그것이다.
 
피라미드의 최고(最古)도 조선의 피라미드로 들어나
 
2000년 7월 3일 중국의 천진일보(天津日報)는 티베트 서쪽 끝에 돌로 쌓은 1백 개가 넘는 피리미드가 러시아 고고학 발굴단에 의해 발굴된 사실을 보도한다. 이집트에서 제일 큰 기제피라미드(Gizeh Pyramid BC 2613~2494, 146.5m)보다 2배 이상 큰(300m, BC,4000) 피라미드도 있었다. 이 피라미드들은 발굴에 참여한 중국인 학자도 언급했듯이 환국, 배달국시대의 지도자와 환웅의 것으로 추정 되고 있다. 그 증거로 5000년 전 중국 북부와 만주에 있었던 강력한 문명국가는 오로지 환국과 배달국밖에 없었다. 당시 몽골이나 흉노, 거란과 여진은 문명을 만들 능력이 없는 단순한 유목민들이었다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그런데 정작 그 주인인 우리는 역사에 대한 무지로 침묵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 말문이 막힌다. 1945년 우연한 계기로 중국 북쪽을 비행하던 미군수송기 조종사에 의해 촬영된 사진의 보고서에 의해 이 피라미드들은 최초로 세상에 알려졌다. 400여개의 거대한 하얀 피라미드가 중국 북쪽에 널려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독일의 고고학자 할트위그 하우스돌프(Hartwig Hausdorf)는 비밀리에 이들 피라미드를 촬영해 ‘White Pyramid’(하얀 피라미드)라는 책을 출판해 서방세계에 북 중국의 피라미드의 실체를 알렸다. 중국 정부는 이곳이 옛 중국의 영역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이 피라미드 사진과 보고서는 조작된 것이라고 이 조차 거짓말을 했으나 서구사회의 계속되는 압력과 방송 등으로 그 실체를 결국에는 인정한다.
 
1963년 발굴당시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이 피라미드가 진시황(BC,259~210)의 무덤으로 예상하며 희망을 갖고 조심스럽게 발굴에 임했으나 고고학계의 탄소연대 측정 결과 약 BC 4000년 전에 돌로 축조된 환국과 고구려의 건축공법인 ‘들여쌓기 공법’인 것으로 드러났다. 피라미드들이 황하문명보다 2천년이 앞서고 진시황의 연대보다 수천 년 앞서 만들어진 한민족 고유의 공법으로 축조된 것이 밝혀짐에 따라 중국은 크게 당황했다. 돌로 쌓으며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계단식 모양의 전통적 축조공법으로 쌓은 하얀색 돌의 피라미드였기 때문이. 중국의 무덤은 돌이 아닌 흙으로 무덤을 만드는 종족이었기에 당혹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이 피라미드에서 쏟아져 나오는 유물은 우리 한민족의 것이었기에 중국은 이를 숨기기 위해 발굴을 중단했다. 나아가 중국은 지금까지도 한민족 관련의 유물들을 절대 비밀로 하기 위해 발굴에 참여한 자들에게 함구령을 내리는 야만성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우리 유물을 중국 것으로 둔갑시키기 위한 꼼수임은 두말을 나위도 없다. 무엇 때문에 인류의 유산인 고대유물을 독점하고 날조하려는 것인지 그 속내는 말을 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이곳의 발견으로 고고학계는 피라미드의 인류역사를 다시 써야 했다. 이를 증명하는 실화가 있다. 중국의 서안의 피라미드 발굴과학자인 장문구(張汶邱)의 발굴 실화가 그것이다. 그는 임종 전 ‘조선의 피라미드 중 최고(最古)는 티베트 피라미드다’라는 글에 이 같은 사실을 적시해 소개하고 있다. 장문구(張汶邱)의 발굴참여 비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피라미드의 발굴상황에서 보는 중국의 옹졸함
 
1963년 4월 고적 발굴 팀 36명은 당국(중국)으로부터 ‘진시황의 다른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을 조사해야 하니 대기하라. 이번 유적은 매우 중요하니 조사 발굴내용을 외부에 일절 누설하면 안 되니 이 점을 각별히 유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장문구(張汶邱) 일행은 중국에도 이런 피라미드가 있었구나 하는 기쁨과 경이로움에 탄성을 올렸다. 발굴팀은 3일 동안 피라미드의 가장 큰 순서대로 발굴하기 시작 했다. 3곳 모두 한 형태였는데, 이 중 가운데 피라미드가 대단한 규모였다. 거대한 벽돌 피라미드 지하입구로 들어가자 약 3~5층으로 석실이 나뉘어져 있었고 상층부 공간으로 들어 갈수록 말과 마차의 그림으로 화려하게 조성된 벽화, 그림, 여러 문자(가림토 등)들이 나왔다. 또한 조각류 약 6200여점, 맷돌·절구 솥·그릇 등 생활도구 1500여점, 배추김치(백김치)·동물의 뼈 등 음식물 400여점, 청동검·활·금관(신라형)·칼·창과 장신구류 등 부장품 800여점, 투머리를 한 정 중앙시신(진시황의 모습과 흡사했음), 14구와 호위상 3000여점 등이 대량 발견됐다. 장문구(張汶邱 발굴 팀은 “난생 처음 보는 너무나도 엄청난 유물, 유적에 대해 모두 하나같이 무엇에 홀린 듯 했다. 마치 외계인의 무덤을 발굴하고 있는 듯 한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발굴팀은 이어 “작업 3일째 되던 날은 약 70% 정도가 파악·작성됐다. 이날 오후쯤에 발굴단장이던 모 교수에게 중간보고를 하자 그분은 큰 한숨을 쉬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공개했다.
 
“이 유적은 우리 화하족(옛 중국) 유물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유적이다. 중화역사 이전의 조선의 문명이야! 큰일이다. 일단 당국에 보고한 후에 다시 지시를 받아야 하니 지금까지의 발굴을 모두 그 자리에 두고 일단 오늘은 그만 나가세. 그날 밤 발굴중단과 동시에 철수명령이 내려졌다”
 
발굴단원(장문구 발굴 팀)들은 숙소에서 현지 공안(公安)에게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서’를 작성·제출했다. 그렇게 발굴팀이 철수한 후 그 피라미드에 관해 더 이상 알려진 내용이 없다. 장문구는 “이것이 중국의 피라미드에 대한 마지막이었고 내가 아는 전부다”고 임종 전 말했다. 중국은 이처럼 우리의 피라미드는 물론 역사 유적과 유물들까지도 숨기고 외부와 차단시키며 공표조차 제대로 않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중국은 인류의 문명 역사마저 숨기며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역사를 조작하려는 속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는 인류의 유산까지 도둑질 하겠다는 의도로 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중국에 대해 측은한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동정이 앞선다. 만주 집안(集安)의 피라미드나 중국 북부 함양의 피라미드군(群)과 티베트의 피라미드 모두는 제아무리 중국 것이라 말해도 그것을 그대로 들을 학자는 없다. 이 피라미드는 엄연히 우리의 피라미드로 당시 우리 한민족의 세운 국가영역에서 세워진 피라미드가 아니던가. 우리는 고대문명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고대 피라미드 건조의 효시(嚆矢)가 되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갖고 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상고사’,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제주도교육위원회 ‘耽羅文獻集’, 최진열 ‘대륙에 서다’, 한창건 ‘환국, 배달 조선사신론’, 한창호 ‘한국고대사 발굴’,한정호 ‘대조선 민족사’, 박찬희 ‘지구촌 인류를 구제할 법칙-홍익인간사상’, 日本 三省堂 ‘世界史の整理’, 酒井忠夫. 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외 다수 서책을 참고·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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