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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식의 대고구리

자강보다는 당나라에 의존했던 김춘추

성 33개 빼앗긴 김춘추 당나라에 구원 요청

고구리 병사 1000여명 죽거나 포로로 잡혀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2-06-23 09:44:34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651년에 당나라로 갔던 백제 사신이 돌아올 때 당 고종이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려 의자왕을 타일렀다고 한다.
 
해동의 세 나라는 개국한 지 오래되고 국토가 나란히 붙어 있어 경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태이다. 근자에 이르러 마침내 사이가 벌어져 전쟁을 돌아가며 일으켜 거의 편안한 날이 없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세 나라의 백성들은 목숨을 칼도마 위에 올려놓은 상황이 되었으며, 무기를 쌓아 놓고 분풀이하는 일이 아침저녁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늘을 대신해 만물을 다스리는 짐의 입장으로는 이를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지난해에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들이 함께 와서 조회했을 때, 나는 이와 같은 원한을 풀고 다시 화목하고 돈독하게 지내라고 명했었다.
 
신라 사신 김법민이 고구려와 백제는 입술과 이빨처럼 서로 의지하며 군사를 일으켜 번갈아 신라를 침범해 신라는 큰 성과 중요한 진을 모두 백제에게 빼앗겨 국토는 날로 줄어들고 나라의 위엄과 힘도 떨어졌습니다. 원컨대 백제에게 빼앗은 성을 돌려주라는 조칙을 내려 주십시오. 만일 명을 받들지 않는다면 즉시 우리 스스로 병사를 일으켰다가 잃었던 옛 땅을 되찾으면 즉시 화친을 맺겠습니다라고 아뢰었는데 그의 말이 도리에 맞기에 짐은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 제환공(齊桓公)이 제후의 지위였음에도 멸망하는 나라를 구원해 주었는데, 하물며 짐은 만국의 군주로서 어찌 위급하게 된 번국을 구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백제 왕은 빼앗은 신라의 성을 모두 돌려주고 신라도 사로잡은 백제 포로들을 모두 돌려보내야 한다. 그렇게 한 뒤에야 근심이 풀리고 분쟁이 해소될 것이다. 무기를 거두고 갑옷을 풀어야 백성들이 쉬고 싶어 하는 소망을 이룰 것이며 세 나라는 전쟁의 괴로움을 잊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경에서는 피를 흘리고 영토 전체에 시체가 쌓이면 농사와 길쌈이 모두 피폐해져 남녀 모두가 의지할 곳이 없어지는 것과 어찌 한 가지로 같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 백제 왕이 이 분부를 따르지 않는다면 짐은 법민의 요청대로 신라가 백제와 결전하도록 내버려둘 것이다.
 
또한 고구려와 조약을 맺어 백제와 서로 멀리서 구원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고구려가 만일 거부한다면 즉시 거란과 여러 번국들에게 요수를 건너가 약탈하라 명할 것이다. 백제 왕은 짐의 말을 깊이 생각해 스스로 많은 복을 얻도록 해야 할 것이며, 좋은 방책을 찾아 도모해 후회가 없도록 하라는 내용이다.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 이듬해인 655년 정월에 고구리가 백제·말갈 병사들과 연합해 신라의 북쪽 국경을 침공해 33개 성을 빼앗아 가자 신라 왕 김춘추가 다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당나라에서는 무측천이 왕후 왕씨에게 자신이 낳은 안정공주를 죽였다는 죄를 뒤집어씌워 폐서인시키고 왕후에 오르기 직전이었다.
 
이에 당 고종은 3월에 영주(營州)도독 정명진(程名振)과 좌우위중랑장(左右衛中郞將) 소정방(蘇定方)에게 군사를 이끌고 가서 고구리를 치라 명했다. 여름 5월에 고구리는 요수를 건너온 당나라 병사의 수가 적음을 보고 성문을 열고 귀단수(貴端水)를 건너가 맞받아쳤다가 정명진 등이 맹렬하게 반격하는 바람에 크게 패하고 말았다. 고구리 병사 1000여명이 죽거나 사로잡히고 외곽 성과 촌락이 불탔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 드라마 '무미랑전기' 중 측천무후의 왕후 등극 장면. [무미랑전기]
 
65510월에 왕후가 된 무씨는 당시 가장 막강한 정적으로 당 태종의 처남이자 재상인 장손무기에게 자결을 강요했고 그 일가를 몰살했다. 이어 656년에는 태자 이충을 폐위시키고 그 자리에 자신이 낳은 장남 이홍을 앉혔다. 이러한 전횡에 대노한 고종이 대신들을 은밀히 불러 측천무후의 폐위를 논의했다가 들켜 대신들은 이충과 대역죄를 모의했다는 죄로 모조리 처형당했다. 이렇듯 무자비한 숙청을 통해 측천무후는 절대권력을 다져 나갔다.
 
잔인하지만 무척 영리하기도 했던 측천무후는 자신이 구축해 놓은 최고 권력을 유지하는 최상의 수단으로 이웃 나라들과의 전쟁을 택했다. 658년 여름 6, 당나라의 영주도독 정명진과 우령군중랑장(右領軍中郞將) 설인귀(薛仁貴)가 병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고구리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고 이듬해 겨울 11월에 당나라의 설인귀 등이 고구리 장수 온사문(溫沙門)과 횡산(橫山)에서 싸워 고구리군을 격파했다.
 
6594월에 백제가 자주 신라의 국경을 침범하자 김춘추가 장차 그들을 치려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지원군을 요청했으나 10월이 되어도 아무런 회답이 오지 않아 근심이 가득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앞에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저희는 비록 죽어 백골이 되었으나 여전히 나라에 보은할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제 당나라에 가서 황제가 대장군 소정방 등에게 내년 5월에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백제를 정벌하라 명한 것을 알아냈습니다. 대왕께서 너무나도 심히 애태우며 기다리시기에 이렇게 알려 드리려고 왔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이미 죽은 신하인 장춘(長春)과 파랑(罷郞) 같았다고 한다. 김춘추가 매우 놀랍고도 신기하게 여겨 두 집안의 자손에게 후하게 상을 주고, 담당관에게 명해 한산주(漢山州)에 장의사(莊義寺)를 세워 명복을 빌게 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 최초로 당나라 양식을 받아들인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드디어 6603월에 당 고종이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김인문을 부대총관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등 수군과 육군 13만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도록 명했다. 또 칙명을 내려 신라 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병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지원하게 했다.
 
김춘추는 18년 전인 642년에 백제의 대야성 침공 때 죽어간 딸의 복수를 어떤 식으로 했을까?
 

 [스카이데일리 / skyedaily__ , skyedaily@sky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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