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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식의 대고구리]
삼국사기는 일제가 불태우지 않았다
성헌식 필진페이지 + 입력 2022-09-25 10:19:04
 
▲ 성헌식 역사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 저널 편집인
조선총독부는 조선인들을 뿌리도 없는 우매한 민족으로 만들기 위해 단군신화를 조작해 우리의 유구했던 수천 년 역사를 말살해버렸다아울러 조선인들이 자신의 역사와 문화를 알지 못하게 교육함으로써 스스로 정체성을 잃고 민족혼을 상실시켰으며이 사업을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했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에 버금가는 분탕질을 쳤는데, 그것은 바로 20여만권의 역사책을 불살라버린 일이다. 분서된 책들은 아마도 조선왕조 세조·예종·성종 때 내려진 수서령에 의해 전국에서 수집되어 궁궐 어딘가에 보관되었던 환·단 관련 서적들이다.
 
일제강점기 35년간 조선총독부는 관보를 통해 조선왕조의 수서령과 같은 지시를 내린 적이 없다. 설사 수서령이 내려졌더라도 민간에서 잘 호응했을 리가 없었을 테니 제대로 수거하려면 아마도 여러 차례 내려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이유는 이미 조선왕조에서 행정력을 동원해 조선총독부가 필요(?)로 하는 환·단 관련 서적들을 잘 감금시켜놓았기에 민간에서 보관하는 책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왕조 덕분에 코도 안 풀고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리는 난제를 아주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 조선일보 1985년 10월 4일자 기사. [필자 제공]
 
조선총독부의 관보에 분서 지시가 없다는 이유로 일제가 20만권의 책을 불사르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기록이 철저했던 조선왕조에서 분서령 기록이 없었다는 것은 수거된 책들이 궁궐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물론 임진왜란 때 왜군의 약탈 또는 불타는 궁궐과 함께 사라졌을 변수는 있으나 그랬다면 무슨 기록이라도 남았을텐데 한 글자 언급도 없다는 것은 무탈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조선왕조의 수서령에 언급된 책들이 지금까지 단 한 권도 전해지지 않은 이유는 조선총독부가 조직적으로 한꺼번에 살처분을 했기 때문이다. 서적들을 불사르면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책들은 일본으로 보내 여러 군데 보관시켰는데, 아마도 일본왕실 궁내청서고가 가장 많았을 것이다. 그곳에서 12년간 근무했던 남당 박창화가 일본인 동료에게 들었다는 "조선의 고서는 다 가져왔기 때문에 여기 있는 것들은 조선에는 없는 것들이다"라는 증언이 이를 증명해준다.
 
당시 조선에 머물렀던 미국인 기자 Nathaniel Peffer(1890~1964)는 그의 독립운동의 진상이란 책에서 한국의 역사는 절대 엄금이다. 합병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일본인은 즉시 한국의 국사란 국사는 모두 압수해 불태워버렸다. (생략) 한국 국사는 가지고만 있어도 범죄가 된다. 나도 달포 전에 자기 나라의 역사를 본 죄로 구타당한 후 15일 이상 30일 이하의 구류를 당한 한국인을 목격했다고 적었다.
 
당시 조선사편수회에서 근무했던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그의 조선 고대사의 연구단군고(檀君考)에서 “(수서령에 포함된) 고조선비사·대변설·조대기·표훈천사·삼성밀기·삼성기 등의 서적이 왕씨 고려시대에 서운관을 중심으로 많이 존재했다. 이런 서적이 고려시대로부터 이조 초까지 구전되어 내려오는 단군고기에 연유해 도가(道家)에 의해 저술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마니시의 이 말은 위에서 언급한 책들의 내용을 읽어보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발언이다. 즉 조선사편수회가 활동할 때까지 그 책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과도 같은 뜻이다. 그런데 위 책들은 현재 단 한 권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들 어디로 가버렸단 말인가?
 
이렇듯 무수히 많은 우리의 역사책들이 일본으로 보내지고 불태워지는 와중에도 끝까지 살아남은 책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삼국사기삼국유사였다. 이 두 책이 조선총독부의 무지막지한 화염방사기 공격을 끄떡없이 견뎌낸 비결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불타지 않은 이유. [필자 제공] 
 
먼저 고려 인종 때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는 단군 관련 기록이 없는 데다가 중국의 임금은 황제라고 표현한 반면에 우리 삼국의 임금은 왕이라고 기술해 마치 우리 삼국이 중국의 제후국인양 책봉을 받고 조공을 바쳤다는 내용으로 도배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단재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진압한 김부식을 유가와 사대당과 보수사상의 대표라고 혹평했다. 그런데 김부식(1075~1151)이 유가의 대표라는 사실도 불확실하다. 그 이유는 남송 때 주자(1130~1200)에 의해 정립된 성리학이 고려로 도입되기 전이라 유교가 크게 성행하지 않았을 때였기 때문이다.
 
또한 사대주의자라는 사실도 확실치 않다. 당시 중국은 송나라로 1004년에 요나라에게 굴욕적인 전연의 맹약을 바쳤고, 1127년에는 금나라에게 도성 개봉이 함락당하고 휘종·흠종이 잡혀가는 정강의 변이 일어났는데, 당시에 무슨 사대주의가 있을 수 있었겠는가?
 
▲ 삼국사기의 원래 이름은 삼국사였다. [필자 제공]
 
삼국사기의 원래 편찬자는 김부식 등 10명의 고려 학자들이었으나 현재 전해진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쓴 원본이 아니라 조선왕조 유학자들과 사대주의자들에 의해 각색된 사서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김부식이 사대주의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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