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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95] 생명은 사랑의 열매인가
마음 가장자리의 비릿한 슬픔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5-23 06:30:10
 
 
 
토요일 오후, 차를 놓고 지하철을 타고 병원에 간 날이었다. 강남역 부근은 제대로 걸을 수 없을 만큼 사람이 많았다. 사람들 물결에 휩쓸리다 하운은 현기증이 나서 벽을 짚고 멈춰 서야 했다.
 
내겐 허락되지 않는 이 많은 생명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이들이 만들어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섹스와 합의가 존재했을까. 이들 중 남자와 여자의 완전한 동의에 의해 태어난 사람은 얼마나 될까. 자연이 허락한 충만한 섹스로 태어난 사람은 몇 퍼센트나 될까.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섹스로 생겨난 이들은? 취중 섹스와 꿩 대신 닭 같은, 화풀이 섹스나 대타 섹스로 태어난 이들은?’
 
언제부턴가 하운은 많은 사람들 속에 서면 의문이 생겼다. 예를 들어 동우가 주말마다 시청하는 야구 경기에서 방망이를 두드리며 함성을 지르는 수만의 관중을 볼 때, 남대문 시장에 갔을 때, 신도림역에서 엄청난 승객들 사이를 비집고 나올 때, 그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다양한 섹스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하면 좀 서글펐다. 그래서 세상은 임신을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이라고 강조하고 주입시키는 거라 결론지었다.
 
어쩌면 여자와 남자가 최고의 오르가슴을 얻은 뒤에 생겨난 아이는 그렇지 못한 아이보다 더 행복한 인생을 살 확률이 높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인류의 행복 증진을 위해 오르가슴 없는 임신은 금지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인류는 조만간 멸종될 것이므로 절대 그런 법이 생길 리 없었다.
 
두 남녀가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하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아이와, 다만 섹스를 완전하게 즐기는 커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중 누가 더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될까. 섹스 없이 인공수정으로 태어난 아이도 행복할 수 있을까.
 
붉은 신호등이 켜지기 직전, 덤프트럭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옆을 스쳐 달려갔다. 거대한 바퀴들이 만들어 낸 바람의 소용돌이가 멈춰 선 하운의 자동차를 집어삼킬 듯 흔들었다. 잠깐이었지만 바람은 머리카락을, 머릿속을 온통 헝클어 놓았다. 온몸을 칭칭 휘감고 있던 올가미가 한순간 느슨해졌다. 단단하게 묶여 있던 것들이 그녀의 몸을 떠나 창문 밖으로 튕겨 나갔다.
 
한계에 다다라도 부풀어 오르기를 멈추지 않는 풍선처럼, 뭉쳐 있던 것들은 건물 위로, 무수한 지붕들 위로, 구름 속으로 차츰차츰 멀어졌다. 조금만 더 오르면 그녀와 연결된 줄을 모두 끊고 멀리, 허공으로, 어쩌면 대기권 밖으로, 끝없는 우주 바깥으로 떠나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가벼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렇지 않은 듯 활짝 웃으며 동우를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뒤차가 경적을 울리며 독촉했다. 초록 신호등이었다. 하운은 눈을 뜨고 숨을 들이마셨다. 팽팽하게 당겼다가 놓쳐 버린 스프링처럼 생각의 뭉치들이 그녀의 가슴 안으로 재빠르게 다시 끌려 들어왔다. 바람이 빠져나가 쭈글쭈글해졌던 마음 가장자리엔 비릿한 슬픔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동우는 결코 병원에 함께 가지 않을 것이다. 하운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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