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 헤드라인 뉴스

 지하철로 보는 상권|빌딩|재건축 뉴스

뒤로 리스트 인쇄
news only email오류보내기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톡

중·일의 역사왜곡 어디까지 하고 있나 <159>

고조선의 기미정책을 모방한 당나라

당(唐)은 주변국 정벌 후 기미정책으로 통치했다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0-05-23 18:53:03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지나(支那)의 역사상 가장 강대한 시대가 진(秦), 수(隋), 당(唐)시대이었다. 진(秦)은 서기전403년~서기전221년 까지 제후난립의 춘추전국시대인데 800년 만에 지나를 통일해 국위를 크게 떨치게 했으니 지나 명칭이 진(秦)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강대한 오호(五胡)가 지나에 침입해 300년 동안 남북조(南北朝)로 분열시켰는데 이 남북조를 재통일한 자가 수(隋)로 지나(支那) 역사상 특기할 강국이다. 
 
당(唐)은 수(隋)보다도 더 강대해 세계사상 특기할 강국으로 지나 역사상 가장 강대한 시대가 진(秦), 수(隋), 당(唐)시대임은 이미 기술한 바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강대한 나라 예맥(銳麥;濊貊)이 진(秦)을 타도했고, 고구려가 수(隋)를 격멸하고 당태종(唐太宗)이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격파한 것은 세계 공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고구려·백제가 망한 후 당(唐)세력은 제2대 태종과 제3대 고종시대에 절정에 달하였다. 이 때 북서방면 이외에 남방에는 점파(占婆;交趾支那), 진랍(眞臘), 부남(扶南;캄보디아), 도파(闍婆;자바), 실리불서(실(室離仏逝;스마트라)의 제소국(諸小國)이 당(唐)에 조공(朝貢)을 바치려고 내조(來朝)하리만큼 세력범위가 광대했다.
 
동북(東北)에서는 북주(北周)의 양견(楊堅;文帝)이 남조(南朝)의 진(陳)을 멸하고(589년) 지나를 통일해 수도를 대흥(大興;長安)으로 해 수(隋)를 건국하고 문제(文帝)의 차남 광(廣;煬帝)이 형(兄)을 실각시키고 이어 부(父)를 살해해 제위(帝位)에 오른 후 3회에 걸쳐 고구려에 원정(遠征)했으나 실패해 망하게 된다.
 
이후 당(唐)이 그 뒤를 이어 당태종(唐太宗)은 645년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친정(親征)했으나 안시성 성주 양만춘(楊萬春)이 쏜 화살에 눈에 박혀 참패하고 돌아온 당태종(唐太宗)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함대를 건조하고 다시 친정(親征)을 준비하는 중에 눈병이 악화되어 사거(死去)한다.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高宗)은 부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신라와 연합해 660년 백제를 정복하고 663년에는 백제와 왜(倭)의 연합군이 나당의 연합군과 백촌강(白村江)에서 싸웠으나 패하자 백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것이다. 
 
당(唐)은 668년에 이적(李勣)이 대군을 이끌고 형제간의 분쟁을 하고 있는 고구려를 멸하고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서 그 전 영토를 다스리고, 동북에서는 거란(契丹), 해(奚), 실위(室韋), 말갈(靺鞨)등 제부족국(部族國)을 세워 조공하게 했다.  
 
오늘은 당(唐)이 오래전 고조선 시대에도 각 제후국들이 중앙정부에 위배되지 않으면 그 민족의 자치를 인정하는 기미정책(羈縻政策)으로 황제가 다스리는 토지에서 중앙정부로부터 파견된 도호부의 감독 하에 각기 그 민족의 자치를 인정하는 기미주(羈縻州)와 절도제(節度制)와 번진(藩鎭)등의 상황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당태종(唐太宗))의 정관(貞觀)의 치(治)
 
당(唐(618~907)은 고조(高祖)의 건국으로 부터 태종(太宗), 고종(高宗)의 치세까지 율령제도(律令制度)가 완비되어 외정(外征)에 의해서 대제국이 형성되었다. 특히 태종재위(626~649년)에는 재상(宰相)으로서 두여회(杜如晦), 방현령(房玄齡), 고문으로서 위징(魏徵), 왕규(王珪)를, 군장(軍將)으로서 이적(李勣)과 이정(李靖)을 등용했다.
 
이들 현신(賢臣)들을 등용해 ‘정관(貞觀)의 치(治)’라고 불리는 선정(善政)을 행했다. 또한 관제(官制)를-율령제(律令制), 즉 율령(律令;刑法), 영(令;行政法), 격(格;令의 수정(修正)과 보완(補完). 식(式;令)의 시행규칙(施行規則)으로 했다. 
 
중앙관제는 삼성(三省), 육부(六部), 구사제(九寺制)로 각기 특정의 소관을 가져 6부 즉, 이부(吏部), 호부(戶部), 예부(禮部), 병부(兵部), 형부(刑部), 공부(工部) 상서(尙書)와는 독립한 관청을 이루어 독립국가를 지향하는 제국의 모범이 되었다. 
 
당(唐)은 수양제(隋煬帝)의 고구려 정벌의 실패와 군역(軍役)의 부담에 견딜 수 없는 농민의 반란으로 각지의 호족과 관료가 참가해 각기 나라를 세워서 지방정권에 성장했다. 수양제의 사후 지나의 전국에 걸쳐서 할거한 정권 간에 격렬한 전투가 계속 되고 있었다. 
 
특히 611년에 진전되는 큰 내란은 각지의 군벌에 의해서 할거하고 있었다. 이때 무용(武勇)에 뛰어난 이세민은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부(父)를 권해서 산서(山西) 태원(太原)에서 거병해 과감한 전투로 각 지방군벌을 620년에 완전 타도한다.
 
전국을 통일한 이세민은 이로 인해 그 인기는 점점 높아져서 다수의 명사(名士)와 투장(鬪將)들이 휘하에 모여 들었다. 그런데 이를 시기한 형 태자 이건성(李健成)은 아우 이원길(李元吉)과 조용히 이세민의 실각을 도모했으며 이에 이세민은 장안의 궁성 현무문(玄武門)에 군대를 매복시켜 두 형제를 제거한다. 이를 현무의 변이라 한다.
 
당고조(唐高祖)인 이연(李淵)은 할 수 없이 이세민(李世民)을 태자(太子)로 세워서 자신은 퇴위해서 태상황(太上皇)이 되고 이세민이 즉위해 ‘정관(貞觀)’이라 했다. 이가 당태종이다. 그리고 반란은 태종에 의해서 정관(貞觀) 2년(628년)에 완전히 통일되어 원상회복 되었다. 
 
정관원년(貞觀元年)부터 23년(627~649)까지의 태종의 ‘정관(貞觀)의 치(治)’라 칭해지며 22년간 그의 치세는 지나(支那)의 오랜 왕조사(王朝史) 중의 황금시대를 이루어서 이후 황제의 모범이 되었다. 그러나 수말(隋末)의 전후 18년에 걸친 대란(大亂)을 진정시켰으나 거의 황폐화된 경제를 재건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화(戰禍)로 유망(流亡)한 인구는 당의 최성기의 4분의 1에 불과했다. 통일 후 125년의 현종(玄宗)의 천보(天寶) 13년(753년)이 되어서야 겨우 수시대(隋時代)의 호구(戶口)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경제는 회복되지 않았었다. 
 
이에 태종은 경제부흥의 문제를 자문했다. ‘대란 후 가난한 인민은 평화롭고 부유 안락한 생활에 비해 고난의 생활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오히려 통치하기 쉽다’는  위징(魏徵)의 말을 따라서 시(隋)나라 때와 같이 강제에 의해서 조급하게 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중시한 것은 국민의 도덕의 수립을 우선했다.
 
태종의 인재 적재적소 등용과 법제 완비
 
뛰어난 군인이었던 태종은 즉위하자마자 교양있는 정치가가 되려고 노력했다. 궁중의 홍문전(弘文殿)에 20여만 권의 서적을 수집해 우세남(虞世南)을 비롯한 남조(南朝)의 문화인(文化人)에 홍문관(弘文館) 학사를 겸임시켜, 순번으로 숙직을 하게하며 역사상의 인물과 현대정치에 관해서 의견을 교환했다. 
 
당태종은 문화적으로는 남조(南朝)의 세련된 미적문화를 동경해 특히 우아한 진(晋)의 왕희지(王羲之)의 서(書)에 심취해 그 대표작의 [난정서(蘭亭序)]를 자기 묘(墓)에 묻어달라고 유언할 정도로 그 서법(書法)의 정통을 전해준 우세남(虞世南)과 구양순(歐陽詢)을 중용(重用)했다.
  
그러나 북조계(北朝系) 군벌의 실용주위의속에서 살아온 당태종은 유교를 경시한 수문제(隋文帝)가 강남의 사치생활에 빠져 농민의 반란을 초래한 양제(煬帝)의 실패를 생각하면서 정치의 기초를 유교 도덕상에 두어 스스로 엄격한 규율과 검소한 생활을 했다. 태종의 정치가로서 제1의 장점은 천재를 발견해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인재를 임명해 그 재능을 잘 발휘하게 한 점이다. 
 
그는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재상(宰相)에 두여회(杜如晦), 방현령(房玄齡), 고문으로서 위징(魏徵), 왕규(王珪), 군장(軍將)으로서 이적(李勣) 등을 등용했다. 제2의 장점은 이러한 명신(名臣)들의 충고를 왕이 잘 받아들인 점이다. 
 
그는 또한 수(隋)의 율령국가(律令國家)의 제도를 이어받아서 당제국은 법제를 더 잘 완비한 시대이기도 했다. 율(律), 령(令), 격(格), 식(式), 4부로 된 법제는 아세아 민족주의에 눈을 뜬 독립 국가를 지향하는 제국가(諸國家)의 모범이 되었다. 
 
당(唐) 중앙정부의 최고기관은 삼성(三省)이었다. 중서성(中書省), 문하성(門下省), 상서성(尙書省)으로서, 중서성(中書省)은 국가의 최고결정인 조칙(詔勅)의 초안(草案)을 만드는 것을 임무로 하고 장관은 중서령(中書令)이다.
 
문하성(門下省)은 중서성(中書省)의 기초한 조칙(詔勅)에 부당한 점이 있으면 ‘봉박(封駁)’이라는 수단에 의해서 반대의견을 말해서 철회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어 장관을 시중(侍中)이라 했다. 
 
위에서 언급한 상서성(尙書省)은 중서성(中書省), 문하성(門下省)의 결정을 받아서 이를 실시하는 행정의 최고기관이다. 장관은 상서령(尙書令)이나 차관(次官)은 좌복사(左僕射), 우복사  (右僕射)가 장관의 직분을 분장(分掌)해서 이 삼성(三省)의 장관들에 중서(中書), 문하(門下), 기타 고관들이 특히 자격을 주어서 참가해 문하성(門下省)의 회의실인 정사당(政事堂)에 모여서 국사를 토론케 했다. 
 
전한(前漢)시대에서는 재상(宰相)이 황제를 도와서 정치를 결정해 매우 자주성을 갖고 있었다. 그 후 황제의 비서인 상서령(尙書令)에 의해서 그 권한을 빼앗겼었다.
 
당태종(唐太宗)은 수(隋)의 삼성(三省)을 개량해서 될 수 있는 한, 다수의 고급관리의 의견을 경청(傾聽)해서 국무처리에 임하는 제도를 만들어 내치(內治)와 외치(外治)에 합리적인 행정을 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당(唐) 멸망의 원인은 이민족정책
 
한편 태종은 직접 인민과 접촉하는 지방관을 중요시 했다. 주(州)에는 자사(刺史)를 두고 현(縣)의 영(令)을 통솔하고, 전국 자사(刺史)의 성명을 병풍에 열기(列記)해서 언제나 주의를 태만하지 않았다. 전국을 10도(道)의 지구로 나눠 순찰사를 두어 그 감독을 하게 했다. 또한 영토의 확대에 의해 도호부를 설치한다. 
 
안동도호부를 시작으로 그 외에도 안북도호부, 단우도호부(單于都護府),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 안서도후보(安西都護府), 안남도호부를 설치했으나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제외하고는 모두 만리장성을 따라서 설치했다. 
 
현종(玄宗)의 대(代)가 되면 도호부 제도를 대신해서 지원제(志願制)의 ‘절도제(節度制)’가 복속지에 10정도 설치했다. 이들은 소위 황제의 명령을 가지고 파견된 사령관의 의미로서 몇 개의 군진(軍鎭)을 관할하는 지휘관이나 동시에 관찰(觀察)이나 재정의 권한도 갖고 있어서 군정(軍政), 민정(民政), 재정(財政)의 삼권을 장악했다. 
 
이 ‘절도제(節度制)’는 지원제이기 때문에 번진(藩鎭)에서는 다수의 병사를 모집했다. 이러한 지원병은 고용주인 절도사(節度使)와 밀접한 주종관계를 맺고 있어서 군벌(軍閥)이 형성하게 되었다. 
 
예컨대 하북삼진(河北三鎭;虜龍, 天雄, 成德)과 같이 수 대에 걸쳐서 절도사를 세습한다든가 부과된 세금을 중앙에 납부하는 것을 거부하는 등, 당(唐)의 중앙정부로부터 절반 독립한 군벌(軍閥)이 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번진(藩鎭)에 따라서는 1만~5만, 많은 경우에는 10만을 넘는 번진(藩鎭)이 넘는 경우가 나오게 되었다. 8세기말에 와서는 번진(藩鎭)의 수는 50이 넘었는데 서기 755년~763년, 9년간 계속된 안록산(安祿山(?~757년)의 난(亂)은 그가 3개의 절도사(節度使)를 겸한 데서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 난(亂)은 현종(玄宗)의 외척으로 재상의 지위에 있었던 양국충(楊國忠)을 배제한다는 명목으로서 이민족 출신의 절도사 안록산(安祿山)과 그 부하 사사명(史思明)이 사회불안을 계기로 안사(安史)의 난(亂)을 일으켜, 일시 현종을 장안으로부터 추격했으나 당조(唐朝)는 위글(回鶻)의 지원으로 반란은 진정되었다.
 
안록산(安祿山) 난(亂)이 일어나자 당(唐)에서는 이 난에 질려서 변경(邊境)뿐만 아니라 정주(正州;支那本土)에도 번진(藩鎭)을 두었으나 오히려 반당적(反唐的)인 군벌이 할거하게 되어 그 중에는 독립국과 같이 할거(割據)하는 자도 나타나게 되었다. 
 
결국, 당(唐)은 정주(正州)이외에 중앙정부로부터 파견된 도호부(都護府)의 군벌에 의해서 멸망을 초래하는 동인(動因)이 되었다. 다음 시대의 오대십국(五代十國)도 모두 번진(藩鎭)이 세운 나라였다.한족(漢族)이 아닌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각지에 군사기지를 설치한 것이 당의 붕괴(崩壞)로 이어진 것이다. 
 
글을 맺으며 
 
번진(藩鎭)이 폐절(廢絶)된 것은 960년 송(宋)의 건국이 되면서 없어졌는데 그 이전도 당(唐)이 평탄한 길로 간 것만이 아니었다. 예컨대 티베트에서는 13세에 토번(吐藩)의 왕위에 오른 손쓰엔 감보는 서방제국을 평정해서 계속해서 ‘소비(蘇毗)’가 다스리면서 ‘백란(白蘭)’과 ‘당항(唐項)’, 그리고 ‘다미(多彌)’를 쳐서 641년에는 티베트고원의 제족(諸族)을 모두 정복하여 티베트에 통일왕조를 만들어 냈다. 
 
또한 그 해, 당(唐)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친선과 공주(황족의 여자)의 항가(降嫁)를 요구했다. 당나라는 이 요구를 받아들여 문성공주(文成公主)를 티베트에 항가(降嫁)시켜 양국의 친선을 도모했다. 이를 볼 때 당(唐)의 역사가 화려한 것만은 아니었을 말해주며, 당시 티베트가 당(唐) 못지않은 강국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 예로 티베트 왕은 네팔의 공주도 왕비로 맞으며 지나와 인도의 문화를 수용해서 티베트의 문화도 향상시켰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663년에는 토곡혼(吐谷渾)을 쳐서 멸망시키고 청해지방(靑海地方)을 산하(傘下)에 둠과 동시에 중동의 투르키스탄에 진출을 시작하여 우전(于闐)까지 그 지배하에 두고 다스렸다. 
 
당시 당(唐)은 구자(龜玆)에 안서도호부를 두어서 서역을 지배 관리하고 있었으나 당(唐)과 토번은 이 방면에서 전면적 충돌상태로 670년에는 구자(龜玆)가 토번(吐藩)에 의해 함락되어 당으로서는 잠시 안서사진(安西四鎭)을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 
 
당(唐)에 있어서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의 실함(失陷)은 서역경영의 파탄(破綻)을 의미하기 때문에 9년 후, 대군(大軍)을 청해지역(靑海地域)에 보내어 679년에야 겨우 안서사진(安西四鎭)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토번(吐藩)은 당(唐)과 전투를 빈번히 주고받았으나 763년에는 국도(國都) 장안(長安)을 함락시켜 14일간 점령을 한 후, 철퇴했는데 당(唐)의 수도를 함락하고 점령한 것은 토번(吐藩)이 처음이었다. 
 
이후 강세를 자랑하는 토번(吐藩)에 대해 당(唐)은 동맹을 맺고 ‘당번회맹(唐藩會盟)’을 했으나 오래가지 않았다. 당(唐)은 얼마 아니 되어 위글(回鶻), 남조(南詔)를 포섭하여 토번(吐藩)을 포위하는 작전으로 나와 이를 성공시킨다. 
 
토번(吐藩)에서는 그 후 병약한 왕 우왕(愚王)이 계속 국내가 분열했기 때문에 당(唐)을 공략했던 토번은 846년 자멸해 당(唐)은 그제야 구영토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미 살펴 본대로 수(隋)나라는 지나를 통일했으나 고구려에 원정으로 실패해서 그 후유증으로 멸망했고, 여기서 당(唐)은 수(隋)의 사업을 계승해서 율령정치(律令政治)를 행함으로 세계적인 제국을 완성했으나, 사회의 변혁과 이에 대응하는 정치의 불비(不備), 이민족의 정토(征討)와 끊이지 않은 호족(豪族), 군벌의 반란에 의해 당왕조(唐王朝)는 907년 건국한 지 285년 만에 멸망하게 되었다.  
 
( 以上은 최태영, ‘단군을 찾아서’.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최인, ‘한국학강의’,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 ’九黎系 倭-日本史‘.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우리역사(東夷傳」. 김부식 찬(撰) 「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九犂系 加羅史.’ ‘斯盧新羅史’.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황순종, ‘동북아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윤진영 編集 「우리역사(東夷傳」. (金東洛),‘천부경(天符經)과 문디 거시기.’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金吉萬), ‘上古朝鮮과 古韓國史’ ‘上古朝鮮의 歷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上, 中, 下. 三省堂編修所 編 ‘各國別 世界史の整理’.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文定昌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津田秀夫外 3人, ‘ひとりで學べる 日本史’. 石井進外, ‘詳說日本史, 田邊昭三,外 多數 書冊을 參照하고 本文引用했음을 밝힙니다.) 
 
<다음에 계속>
 

  • 좋아요
    1

  • 감동이예요
    1

  • 후속기사원해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

<저작권자 ⓒ스카이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스타의 집&빌딩

유통업계 최초 ‘여성CEO’ 홈플러스 임일순 대표이사 사장이 사는 동네의 명사들
강호동
SM C&C
구경회
서울대학교 의과대 의학과 정형외과학교실
임일순
홈플러스
뒤로 리스트 인쇄
email오류보내기 트위터 페이스북 밴드 카카오톡
독자의견 총 0건의 댓글이 있습니다.
등록하기

미세먼지 (2020-07-06 04:30 기준)

  • 서울
  •  
(좋음 : 22)
  • 부산
  •  
(최고 : 14)
  • 대구
  •  
(좋음 : 30)
  • 인천
  •  
(최고 : 14)
  • 광주
  •  
(최고 : 15)
  • 대전
  •  
(최고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