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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의 역사왜곡 어디까지 하고 있나 <164>

당(唐)나라 멸망원인과 송(宋)·요(遼) 건국배경

唐멸망은 환관전횡과 조신(朝臣)들 분쟁이 원인이었다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0-06-27 11:29:04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당(唐)나라는 지나(支那)의 역대왕조 중에서 중앙집권적인 정부기구를 완비해 그 법제도 후대의 모범이라고 말해지나, 당(唐)의 말기(末期)에 있어서는 환관(宦官)의 횡포에 휘둘려져서 정권이 붕괴되는 큰 원인이 되었다.   
 
변경(邊境)에서는 절도사(節度使)가 할거(割據)해 국내에서는 계속되는 전쟁에서 중세(重稅)에 시달리는 농민이 반란을 일으키는 상태이었다. 그런데 궁중(宮中)에서는 연회(宴會)에서 노래와 춤을 추는 궁인도 2만명을 넘고, 궁녀(宮女)는 그 2배이며, 관료수도 팽대(膨大)해서 그 봉급만도 대단한 거액으로 국가재정에 문제가 되었다.  
 
또한 당시 당나라에서는 불교사원의 증대로 그 세력은 막대해, 사원(寺院)이 축적한 부(富)는 거액으로 올랐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불교에 대해서 탄압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845년의 조령(詔令)에 의해서 4600의 사원(寺院)을 무너뜨리고 20만명이 넘는 승려를 강제적으로 환속(還俗)시키기까지 했다. 
 
그런데 불교의 신앙에 의지하고 있던 일반대중은 당연히 정부에 대한 정신적 정치적 불만을 강하게 품게 되어, 아주 적은 계기로 반정부활동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고 있었다. 특히 그 중에도 소금의 전매제도(專賣制度)가 문제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재정난을 타결하기 위해 소금을 전매제(專賣制)로 한데서 소금의 전매자인 황소(黃巢)등이 수만의 병을 일으켜 875년~884년까지 10년간에 걸쳐 ‘황소의 난(亂)’을 일으켜 지나(支那)전토가 전란에 휩쓸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당제국(唐帝國)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게 되는 결과를 가져 왔다. 
 
황소 등은 번진(藩鎭)의 군(軍)과 10년간에 걸쳐서 지나 전체에서 분란이 계속되었다. 이 난(亂)은 황소의 사후(884년), 그의 부하였던 주전충(朱全忠(852~915년)은 당에 귀순해서 반란진압에 공을 세웠으나 907년에 와서는 당에 반기를 들어서 당을 멸망시켜서 후양(後梁)을 건국해 태조(太祖)가 되었다.
 
오늘은 20대(代), 290년간 이어온 당(唐)이 907년 멸망해서 송(宋)이 지나를 통일하는 960년까지 54년간 낙양을 중심으로 5개 왕조, 오대십국(五代十國)의 발흥(勃興)과 쇠망을 다루고자 한다. 우리도 지나 역사를 알아야 지나 역사도 비판할 수 있기에 화북의 역사를 살펴본다. 
 
오대십국(五代十國)이란 어떤 나라였나
 
먼저 오대(五代)란, 후양(後梁)의 주전충태조(太祖)가 당소선제(唐昭宣帝)의 양위를 이어 제위(帝位)에 오른 907년부터 송태조 조광윤(趙匡胤)이 후주(後周)의 군사에 추진된 959년까지의 54년간 중원(中原)에 5개의 왕조가 흥망한시대를 일컫는 것이다. 
 
또 변경(邊境)과 중원(中原) 이남에서는 10개의 지방정권이 할거(割據)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라고 불리고 있는데 즉, 후양(後梁), 후당(後唐), 후진(後晋), 후한(後漢), 후주(後周)시대를 오대(五代)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오왕조(五王朝)의 지배는 황하유역(黃河流域)과 그 주변에 한정되어 강남지방에는 전혀 지배력이 미치지 않았다. 당시 강남지방에는 많은 번진(藩鎭)이 세운 정권이 존립하였다. 즉, 오(吳), 남당(南唐), 오월(吳越), 민(閩), 형남(荊南), 초(楚), 남한(南漢), 북한(北漢), 전촉(前蜀), 후촉(後蜀)으로 이를 십국(十國)이라 한다. 
 
이 오대(五代)와 십국(十國)을 총칭해서 ‘오대십국(五代十國)’이라 하고 이 시대를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라 하는 것인데, 이 때 당(唐)을 이어받은 양태조(梁太祖) 주전충(朱全忠)은 당왕조(唐王祖) 심부(深部)에 만들었던 환관(宦官)과 고급관료군(高級官僚群)을 일소(一掃)해 2대정치악(二大政治惡)을 제거하는 의욕을 가지고 관중(關中)과 관동지구 대부분을 세력범위에 넣었다. 
 
그리하여 주전충(朱全忠;852~915년)은 당에 귀순해서 반란진압에 공을 세웠으나 907년에 와서는 당에 반기(反旗)를 들어서 당을 멸망시켜서 후양(後梁)을 건국해서 태조(太祖)가 되는데 그는 황하유역의 통일기초를 만들어서 수도(首都)를 변경(汴京;현재 하남(河南)의 개봉(開封)으로 정했다. 
 
당시 개봉(開封)은 강남(江南)과 화북(華北)을 연결하는 대운하(大運河)가 황하(黃河)와 합류하는 요점(要點)으로 이미 개발된 화북(華北)은 중화(中華)의 중심으로 양자강유역의 경제는 ‘남북조시대(北魏(386~534)와 송(宋(420~479년)’에 점차 개발기초가 되어 있어서 당(唐)의 재정도 완전히 양자강유역에 의존할 정도였다. 
 
이는 수대(隨代)에 개설한 대운하와 실크로드의 교통이 발달로 남쪽 바다로부터 이슬람 상인 등이 와서 성행한 무역이 활발하게 행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이 크게 발전을 했고, 특히 광주(廣州), 천주(泉州), 양주(揚州)등 강남지방의 번영은 당에 재정(財政)을 지원했고, 당은 이곳 양자강유역에 의존했던 것이다.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는 과도기시대였다
 
당말(唐末)이 되면,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907~960년)는 토번(吐藩), 회흘(回紇)등의 번족(蕃族)과 황소(黃巢)등에 의해서 황폐한 관중지구(關中地區)로 부터 수도를 남북교통의 요충(要衝)인 개봉(開封)으로 옮긴 정책은 지나역사(支那歷史)에 새로운 국면(局面)을 열었다.  
 
그런데 당시 양(梁)을 세운 양태조(梁太祖)인 주전충(朱全忠)은 산서(山西), 태원지방(太原地方)에 사는 북족(北族)의 사타족(沙陀族)을 주력으로 하는 진왕(晋王)인 이극용(李克用)과 대립해 서로 격렬한 전쟁을 하기 때문에 형세는 불안정했었다.
 
이런 상황은 얼마 없어서 이극용(李克用)이 죽자 천재적인 군인이었던 이존욱(李存勗)이 진왕(晋王)이 되었다. 당시 하북 삼진(三鎭)이라고 하는 군벌은 안사의 난(安史의 난(亂)이후, 약 150년에 걸쳐서 하북성(河北省)에 할거(割據)한 독립의 지방정권화가 되어 있었다. 오대(五代)에 들어오면 양(梁), 진(晋)의 전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양태조(梁太祖) 주전충(朱全忠)은 하북삼진(河北三鎭)을 구하기 위해 출병(出兵)했으나 이존욱(李存勗)때문에 대패해 실의에 차있는데 그 자제들은 후계를 다투는 식자(息子)의 한 자제에 연루되어 즉위 후 겨우 6년 만에 죽임을 당한다. 
 
뒤를 이어서 양말제(梁末帝)가 위(位)에 오른다. 그는 하북(河北)에 진출해 자립해서 후당(後唐)의 장종(莊宗)이 된다. 이에 이존욱(李存勗)은 변경(汴京)을 급습(急襲)해서 양말제(梁末帝)를 죽이고 그를 대신해서 후당(後唐)의 장종(莊宗)이라 부르며 수도를 낙양(洛陽)으로 옮긴다. 이에 양(梁)은 2대(907~923년)17년으로 멸망한다.
 
이 장종(莊宗)은 하북삼진(河北三鎭)을 완전히 장악하고 후당(後唐)의 장종(莊宗) 지배지역은 양(梁)의 장종(莊宗)보다도 매우 확대해 황하유역을 통일했으나 만주(滿洲)에 발흥해 남하의 세력을 과시하는 거란(契丹)과 직접 충돌하게 된다. 
 
여기서 거란(契丹)에 관하여 보면, 해(奚), 실위(室韋)등이 되어 동 몽골의 중부, 흥안령 산록(山麓)에 사는 퉁구스민족으로서 서요하(西遼河)에서 발원(發源)은 서라목륜(西喇木倫)과 노음하(老吟河)의 합류지점이 발상지라고 되어 있다. 
 
한편,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도 말기가 되어 화북(華北)지방에서는 강대한 군벌(軍閥)이 약소의 군벌을 흡수 합병해 최후의 후주(後周)의 시대가 되었다. 오대제군주(五代諸君主)중에서는 걸물(傑物)이라고 말해지는 후주(後周)의 세종은 외교, 내치에 놀라운 사적(事績)을 쌓았으나 북방의 요(遼)를 향해서 원정도상 병사한다.
 
그 후 즉위한 것은 7세의 공제(恭帝)였기에 이를 안 요(遼)는 북한(北漢)과 연합해서 후주(後周)를 공격해왔다. 이에 후주(後周)왕실호위군장관인 조광윤(趙匡胤;927~976년)이 이를 영격(迎擊)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수도의 대양(大梁)을 출발했다. 
 
그런데 조광윤(趙匡胤)이 뒷날 아침 눈을 뜨니 장병들이 달려와서 놀랍게도 천자(天子)의 의복인 황포(黃袍)를 입히고 황제만세를 부른다. 그는 장병의 의도를 받아서 황제취임을 승인하고 수도로 돌아가서 누구도 이해 할 수 없는 공제(恭帝)로 부터 위(位)를 선양(禪讓)되어 즉위해 국명을 송(宋)이라 했다. 때는 690년이었다. 
   
북방의 강국 요(遼)의 건국과 통치체제
 
그런데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 초(初)에 북방에 살던 유목민이 요(遼(916~1125년)를 건국한다. 당시 요하(遼河)상류에는 거란족(契丹族)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급속히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해 916년 거란족(契丹族)의 수장(首長)인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872~926년)가 부족을 통일해서 건국한 것이 요(遼)이다.
 
야율아보기는 요를 건국하기 이전부터 당(唐)의 화북지방(華北地方)을 자주 침입하며 성곽건축과 행정기구를 정비하고 국가의 기틀을 정비했을 뿐만 아니라 몽골 제부족(諸部族)과 키르키즈스탄 을 배하(配下)에 두고 다스리며 926년에는 동린(東鄰)의 발해(渤海)를 멸(滅)했던 것이다. 
 
이 같이 거란인(契丹人) 야율아보기는 만주(滿洲)지방으로부터 외몽골지방 일대를 영유하는 거대한 초원국(草原國) 요(遼)를 세웠던 시조가 되었고. 또한 뒤를 이은 요(遼) 태종(太宗)은 지나 경로(經路)에 나와서 후진(後晋)의 건국을 도와주는 대신에 요에 인접하는 연운(燕雲)16주를 할양(割讓)시켰다.
 
요를 건국한 야율아보기는 구가체제를 이중국가체제(二重國家體制)를 취해 관제(官制)를 남북이면(南北二面)으로 나눠서, 남면관(南面官)은 한식제도(漢式制度)와 한법(漢法)에 의해서 한인(漢人)을 다스리고, 북면관(北面官)은 북방고유의 관습과 부족제(部族制)를 유지시켜서 유목민의 지배를 행했던 것이다.
 
한편 요의 원조를 받아서 건국한 후진(後晋)은 처음에는 금백(金帛)과 화폐(貨幣)를 요에 보내고 있었으나 점차 약속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태종은 군사를 거느리고 후진(後晋)을 멸해서 중원에 요를 세워서 한민족(漢民族)을 지배하려 했다. 
 
그러나 기존의 한족(漢族) 주민들이 이민족왕조(異民族王朝)의 성립에 대해서 반기지 않고 저항이 격렬해 지방군벌(地方軍閥)은 게릴라 전을 전개해서 요를 괴롭힘으로 요의 태종(太宗)은 야망을 포기하고 철병(撤兵)했던 것이다. 
   
글을 맺으며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지나를 통일한 중앙정부인 당왕조(唐王朝)가 소멸했기 때문에 지방정권군(地方政權群)이 독립국화(獨立國化)한 것이었다. 여기서 후주(後周)의 세종(世宗)은 북벌군(北伐軍)을 지휘해 와교관(瓦橋關;(河北 保定) 이남을 회복했으나 병(病)으로 중도에서 병사했기에 공제(恭帝)가 7세에 즉위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안을 느낀 장사(將士)들은 인망(人望)이 높은 후주(後周) 왕실호위군의 장관인 조광윤(趙匡胤)를 공제(恭帝)로 부터 위(位)를 선양(禪讓)받아 즉위하고 국명(國名)을 송(宋)이라 했다(690년). 이로서 후주(後周)는 3대 9년 만에 멸망한 것이다.  
   
여기서 화북(華北)지방의 강대한 군벌(軍閥)들은 과도기적인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가 된 것이다. 이 오대(五代)의 존속은, 후양(後梁;907~923(16년간)), 후당(後唐; 923~936(13년간)), 후진(後晋;936~946(10년간)), 후한(後漢;947~950(3년간)), 후주(後周;951~960(9년간))으로 907~960년 사이에 난립했던 것이었다. 
 
당시 번진(藩鎭)이 세운 십국(十國)도, 오(吳;902~937(35년간)), 전촉(前蜀;907~925 (18년)), 오월(吳越;907~978 (71년간)), 초(楚;907~951(44년간)), 남한(南漢;907~971(64년간), 민(閩;909~945(46년간)), 남평(南平;924~965(31년간)), 북한(北漢;951~979(28년간)), 형남(荊南), 후촉(後蜀) 역시 907~960년 사이에 난립했던 소국들이었다. 
 
번진(藩鎭)의 용병(傭兵)들의 말기에는 절도사(節度使)를 내몰고 그들이 추대하는 자를 후임에 앉히는 등 5대의 정권을 낳게 했다. 이러한 정치정세 하에 군인도 관료도 한사람으로 구왕조(舊王朝)에 충성하는 자는 없고 신왕조를 맞아 이에 따랐다.
 
예컨대 후당(後唐), 진(晋), 요(遼), 한(漢), 주(周)의 오조(五朝)에 신임되어 3번 재상(宰相)에 오른 ‘풍도(馮道)’가 그 전형(典型)이다. 그는 당(唐)이 망하고 송(宋)이 서기까지 오대십국(五代十國)의 난세 속에서 5왕조(王朝) 8성씨(姓氏) 11명의 임금을 섬긴 고위관리로 30년, 재상으로 20년을 지낸 자로서 아부(阿附)의 이름을 남기고 있다.(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164~180面, 貝塚茂樹,‘中國の歷史’(中) 106~117面)
 
이같이 5대를 지배한 이민족(異民族)과 군벌의 손에 의해서 귀족, 문인, 고급관리와 환관으로 구성되고 있었던 당왕조(唐王朝)의 정치와 사회체제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이는 남북조부터 당대(唐代) 중기의 귀족제가 몰락하게 된 것이었다.
 
(以上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崔仁, 韓國學講義’.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 「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貝塚茂樹,‘中國の歷史’ ‘上, 中, 下’.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編, ‘詳解.世界史史料集’. 二十一世紀出版社集團, ‘山海經’. 各國別 [世界史の整理]. ‘西島定生 護雅夫, 木村常三郞, 猿谷 要編著,世界歷史の基礎知識’.外 多數의 書冊을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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