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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의 역사왜곡 어디까지 하고 있나 <165>

지나(支那) 환관(宦官)제도, 국가흥망 원인되다

당(唐)멸망원인 중 하나인 환관제도 금세기까지 존속했다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0-07-04 16:30:08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어느 나라나 차이는 있으나 환관제도가 있었다. 고대 지나(支那)에서도 특징적인 제도의 하나가 환관제도(宦官制度)이다. 국력이 안정되고 황제권력이 강대했던 은(殷)나라에서는 22대 황제 무정(武丁)의 시대가 되면 44명의 처(妻)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궁정(宮廷)의 내부의 황제의 주변에는 체력적으로는 여성노예를 능가하면서 후비(后妃)들과의 성적관계를 가질 수 없는 중성(中性)의 보조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여기에 발생한 것이 남성의 성기(性器)를 절제한 환관(宦官)이 최적이었다.   
 
여기서 강족(羌族)의 포로(捕虜)는 성기가 절제되어 남성기능을 상실(喪失)한 채 은왕족(殷王族)의 가내에 노복(奴僕)으로서 사역(使役)하게 되었다. 원래 환관제도(宦官制度)는 지나뿐 아니라 서아시아와 유럽의 유목민족 제국(諸國)에도 존재했다.
 
지나에서는 은대(殷代)로 부터 20세기의 청(淸) 시대까지 계속 이어지며 그것도 성행(盛行)된 것이 특징이다. 유럽에서는 기독교의 수용(收容)과 함께 폐지되었다. 그러나 고대 은(殷)나라에 있어서는 범죄자에 대한 형벌로서 남성의 성기(性器)의 절제(切除)가 행해져 궁형(宮刑)은 대대(代代)의 왕조(王朝)에 이어졌다. 
 
그런데 지나에서는 수(隨)나라 이후 범죄자에 대한 궁형(宮刑)은 금지 되었으나 생활수단과 권력주변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남성의 성기(性器)를 절제한 환관이 최적이기 때문에 그 수효가 날이 갈수록 증가한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지나 역대왕조의 환관(宦官)수를 살펴보면 주(周)나라에서는 수백 인에 불과 했으나 시대가 내려오면서 그 수는 증대해서 당(唐)의 시대에는 4000명, 명(明)의 말기에는 10만명 이상으로 환관이 증가했다. 
 
청(淸)나라의 경우도 1653년에는 9000명이었고 건융제(乾隆帝)때에는 2800명, 선통제(宣統帝)가 퇴위하는 1911년에도 800명이 있었다. 이들 환관(宦官)은 남성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대신 궁정내(宮廷內) 깊숙이 거(居)하는 왕후(王后)나 여관(女官)의 측근이 되기 때문에 황제권력에 관여하는 것이 비교적 용이(容易)했다. 
 
때로는 국가정책결정에 참획(參劃)하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황제권력의 대리인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되자 야망에 불타는 사람은 스스로 거세(去勢)해서 자궁자(自宮者)가 끊이지 않고 시대에 따라서는 이민족(異民族) 환관을 상회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권력을 쥔 환관(宦官)은 대부분의 경우 왕조(王朝)가 교체되는 때에는 숙청되는 일이 많았으며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경우 어느 나라에서나 많았음을 본다.   
 
오늘은 내시(內侍)와 환관(宦官)은 어떻게 다르며, 우리나라의 내시(內侍)와 환관(宦官)의 다른 점을 살펴보고 또한 지나 역사에서 보는 그들의 잔인성으로 인하여 인구감소가 급속히 이뤄진 원인이 어떻게 된 것인가에 대하여도 살펴보고자 한다.
 
내시(內侍)와 환관(宦官)은 어떻게 다른가
 
어느 나라나 왕(王)의 주변과 궁중에는 왕과 왕족을 위해 잡역을 하는 노비(奴婢) 외에 보조자(補助者)가 필요함에 따라 내시(內侍)또는 환관(宦官)이 항상 왕과 왕족주변에서 각기 맡은 일을 해왔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내시(內侍)와 환관(宦官)은 ‘거세한 남자’로 구분이 없었으나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구분하고 있음도 볼 수 있다. 예컨대 우리나라 고려 때는 내시(內侍)는 엘리트 집단이었다고 한다. 한편 환관(宦官)은 액정국(掖庭局)이라는 관청(官廳)에 소속되어 궁중의 잡역(雜役)을 담당했다. 당시 이들은 7급 이상은 오를 수도 없었다. 
 
조선조에서는 [액정서(掖庭署)]라는 부서(部署)를 둬서 대궐 안에서 임금의 분부를 받들고 신하들의 입궐하는 것을 주선(周旋)하고, 임금이 쓰는 문방구(文房具), 궁중의 자물쇠 등을 관리하고 궁궐의 보수(補修)와 수리(修理)등을 맡아 하는 기관이었다.
 
그런데 내시(內侍)와 환관(宦官)은 전혀 다른 존재임에도 내시(內侍)하면 ‘거세한 남자’를 떠 올리게 되는 것은 고려말(高麗末) 원(元)나라의 영향권에 들면서 내시(內侍)와 환관(宦官)은 혼동되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보면 고려 무신정권기(高麗武臣政權期)와 원(元)의 간섭기(干涉期)에 왕의 신임을 얻은 환관(宦官)이 내시(內侍)로 임명되는 예가 생겨났으며 환관(宦官)의 정치적 영향력이 큰 원(元)나라를 본떠 고려에서도 환관이 득세하게 되었다. 
 
고려 때 환관으로 내시가 된 최초의 인물은 의종(毅宗) 때의 정함이다. 의종(毅宗)은 자신을 젖 먹여 키워준 유모의 남편이요 자신이 친동생에게 밀려 왕위를 놓칠 뻔 했을 때 보호자로 활약해준 환관 정함을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시(內侍)에 임명했다. 
 
이는 환관(宦官)이 내시(內侍)가 되는 물꼬를 텄고, 공민왕(恭愍王) 5년(1356년)에는 내시부(內侍府)라는 관청이 생기면서 내시부 소속의 환관과 본래의 내시는 혼동되어 불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최고의 엘리트집단을 지칭했던 내시(內侍)는 환관의 별칭이 되고 본래의 내시는 이름은 물론이요 고유(固有)의 역할과 지위(地位)까지 잃어 버렸으며 조선조 세조12년(1466년)에는 내시원(內侍院)이 되면서 영영 사라졌던 것이다. 
 
이후 내시(內侍)는 환관(宦官)의 동의어(同義語)가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내시(內侍)라는 이름으로 환관(宦官)을 기억하는 까닭이 되었는데 내시(內侍)라고 불리는 환관(宦官), 그들은 조선왕조(朝鮮王朝) 500년 내내 존재했다. 
 
따라서 조선시대 환관(宦官)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품위(品位)는 종이품(從二品) 상선(尙膳)이었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정한 환관의 수는 모두 140명이고, 18세기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 <성호사설(星湖辭說)>에서 말한 숫자는 335명이다. 
 
이 환관(宦官)이 법률상 완전히 폐지된 것은 19세기 말인 1894년 갑오개혁 때이었다.(以上은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51~53. <한국사 바로잡기> 유인물, ‘내시와 환관은 어떻게 다른가? 外 多數 書冊을 參照, 本文을 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지나(支那)역사에서 본 인구 대 격감원인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학사관교육(自虐史觀敎育)을 받아오며 지나(支那)의 <사기(史記)>, <삼국지(三國志)>, <25사(史)>, <십팔사(十八史)> 등 고대의 역사서나 <논어(論語)>를 비롯해서 <사서오경(四書五經)>, 두보(杜甫)와 이백(李白)을 대표하는 ‘한시(漢詩)’ <서유기(西遊記)>, <수호전(水滸傳)>등의 소설을 보고 역사를 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나의 역사를 너무도 모른다는 것이 사실이다.
 
지나 역사, 소위 한족(漢族)의 어두운 부분을 보면, 한마디로 말한다면 주변 이민족(異民族)에 대한 침략과 말살, 국내에 있어서는 왕조(王朝) 교체 때마다 수백천만의 단위로 반복된 대학살로 이어지는 참으로 전율(戰慄)의 지나 4000년의 역사다. 
 
지나 인구의 변천을 보면 전한(前漢)때 서기 2년에 추정인구가 5959만4978명이었는데 후한(後漢)때 서기 57년에는 2100만으로 나와 있고, 서기156년에는 5006만6856명이 서기242년 삼국시대에는 763만명으로  나와 있다. 
 
또한 당(唐) 때 서기755년 인구가 5291만9309명이 송(宋)때인 976년에는 1800만명이고 명(明)때 6010만5853명이 청(淸)때인 서기1644년에는 1063만명으로 나와 있다. 얼마나 인구가 변동했는가를 잘 알 수가 있는데 이는 대학살이 자행된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以上은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61面 支那人口變遷表 參照)
 
이같이 지나는 지난날 수천 년 역사에서 어떻게 침략, 지배, 약탈, 학살, 말살, 차별, 학대를 반복해 왔는가를 알 수 있다. 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그 이유는 지나의 어두운 부분을 배우지도 가르치지도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나가 제멋대로 역사를 조작(造作)하고 미화(美化)해 허망(虛妄)의 지나상(支那像)은 실상과 다르게 함으로 제대로 된 지나 역사를 제대로 인식 하지 못하고 있다. 지나는 대집단의 민족도 무수히 절멸(絶滅)시켜 왔다.  
 
타이완(臺灣)의 유명한 평론가인 백양(白楊)씨는 지나 4000년 역사와 문화에 관해서 “지나의 역사는 정말로 박해(迫害)의 역사이며, 지나의 문화는 인간의 존엄과 포용력이 매우 결여되어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지나 역사에서 어찌해서 왕조교체가 있을 때마다 수천만인이 살육되었는가. 왜 한족(漢族)이 거주하고 있지 않은 원격지(遠隔地)를 황제가 지배할 수 있었는가. 왜 조공제도를 20세기까지 행해졌는가. 이에 대한 책이 매우 적은 것은 왜인가.
 
그것은 이에 대한 가해자의 자료(資料)와 피해자 측의 사적(事跡)을 제대로 기술을 할 수 없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책에 나타난 관련 하는 다른 분야에서 적게나마 그 실체를 알 수 있다. 그러면 왕조교체기에 수천만이 격감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첫째로 전쟁이나 항쟁(抗爭) 의해서 농업노동의 주역인 남자가 병사(兵士)로 착출(捉出)되기 때문에 농지가 황폐되어서 대기근(大饑饉)이 하나이고, 둘째는 전란에 의해서 목숨을 잃은 자의 수가 수십만인 점과 승자가 패자를 철저히 짓밟아 군인뿐만 아니라 성(城)을 공략한 다음 일반인도 살륙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진(秦)을 멸한 항우(項羽)나 후한(後漢)을 멸한 조조(曹操)는 대군(大軍)을 포로로 한 경우, 그냥두면 위험으로 판단한다든가, 수만의 포로에 식량이 없으면 처형보다 쉬운 매장(埋葬)으로 수만, 수십만명의 살륙(殺戮)을 자행했던 것이다.  
 
특히 서기전 5세기~3세기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많은 살륙(殺戮)이 사실(史實)로서 남고 있다. 전국시대 말기 진군(秦軍)과 조군(趙軍)이 싸운 ‘장평(長平)의 싸움’에서 조군(趙軍) 40만명이 항복했으나 진군(秦軍)은 이들을 생매장해 버린다. 
 
또한 지나의 성(城)들은 도시를 모두 안고 있는 성곽이기 때문에 침공군이 성곽 내에 돌입하면 구 왕조군(舊王朝軍)에 협력했다는 이유로서 일반시민도 살륙(殺戮)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이를 입증한다. 이런 경우는 20세기 초까지 반복되었다.
 
또한 진(秦)을 파한 항우(項羽)도 진군(秦軍) 20만명을 생매장하고 있다. 이 역시 인간의 존엄과 포용력이 매우 결여되어 있음을 여실히 말해주는 것이다. 
 
지나(支那)는 전 왕조의 유품도 남기지 않았다
 
지나의 역사를 보면, 전 왕조를 넘어뜨린 신왕조의 황제는 전왕조에 소속하는 인간을 철저히 살육하는데 그치지 않고, 건물과 비품, 미술품, 그리고 분묘(墳墓)에 이르기 까지 전왕조의 영향이나 보호를 받는 모든 것을 파괴의 대상으로 했다.
 
왜냐하면 전왕조의 사람이나 물건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에 의해서 신왕조와 구왕조와의 다름을 인민에게 나타내는 것이 지배를 위한 필수조건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풍조는 사원(寺院)이나 건조물도 파괴되어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비롯해서 석조의 건조물이 겨우 파괴를 면할 정도이다. 이 같은 수법은 역사왜곡에도 예외가 아니었다.(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58~71面 참조 인용하였음)
 
예컨대 지나의 4000년 전 순(舜)임금이 앙소문화(仰韶文化)를 일으킨 왕인 것은 동이원류사(東夷源流史)에도 동이인으로 나와 있으나 지나인으로 둔갑하고 있고 단군이 석가모니의 조상이라고 509면에 나와 있는데도 아니라 하는 그들이다. 
 
이런 풍조는 지나뿐 아니라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필자가 일본에 유학시 본 바로는 축제 때 춤추는 백제춤(アワ オドリ)과 그 노래 또한 백제노래인데 이를 숨기고 있었고,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얼마나 조작되고 왜곡되었는지는 상상을 초월한다. 
 
또한, 일본에는 신사(神社)가 11만개 이상이 있는데 그 중 600개의 큰 진자(神社)가 모두 우리의 조선(祖先)을 모시고 있고, 그 제사를 하는데 제문(祭文) 역시 우리말로서 지금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자기들 조상을 모셨다는 이세궁(伊勢宮)의 신위(神位) 36위(位) 모두 우리 조상인데 일본은 이를 숨기나 지금은 숨길 수없는 세상이다. 
 
한국과 일본도 같은 조상의 자손인데 일본은 대륙 양자강 이남에 있었던 왜(倭;衛), 왜인(倭人) 시대와 670년 타이완(臺灣)에서 일본(日本)이라는 국호(國號)를 쓴 것을 숨기기 위해서 이도 숨길 수없는 서책과 자료가 있기에 이를 숨길 수 없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자학반도식민사관자(自虐半島植民史觀者)들은 우리역사를 반도 안에 가둬놓고, 지나와 일본이 역사 왜곡을 묵인하고 있음에도 수치스러움도 덮고 자신의 안일(安逸)과 이기적 지위 때문에 우리의 역사를 뒤엎어 국가와 민족의 자랑스러운 조상에게 죄를 짓고 있다.
 
조선 말기에도 이완용 등 친일파는 4398명이었는데 우리는 일제암흑기에서 광복이 되었으나 이들은 아직도 자학반도식민사관(自虐半島植民史觀)의 굴레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인데 문제는 그들의 가치관의 변질이다. 
 
우리의 역사가 얼마나 찬란하고 유구하며, 위대함은 서구의 사학자들에 의해서도 다 밝혀진 일을 언제까지 일제(日帝)가 조작한 쓰레기 역사를 고집하려는지. 눈을 똑똑히 바로 뜨고 우리역사와 세계사(世界史)를 바로 연구하고 익히기 바라진다.
 
세계사는 석기시대가 1만년 전이라고하나, 필자는 우리는 선진민족으로 1만년 전에 이미 철기시대라 했는데, 미국의 캘리포니아대학의 브라운 교수는 “인류의 역사는 99,9%가 구석기시대이고, 우리나라는 1만8000년 전(前)이 신석기시대”라 했다. 
 
이러함에도 자학반도식민사관자(自虐半島植民史觀者)들은 우리역사를 반도역사라 고집을 하려는지! 인류의 시원국(始源國)이요 시원문화를 창조한 우리역사의 정체성을 외면하려는 것인가. 너무나 황당하고 국가 망신을 안겨주는 한심함을 감출길이 없다. 
 
(以上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국가형성의 사회사’.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 「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 ‘校勘十八史’,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윤진영 編集 「三國史」「우리역사(東夷傳」. 智勝, ’우리上古史‘-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반재원, ‘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황순종,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권진규 ‘조선사’.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이강민 「대학국고대사」.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文定昌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二十一世紀出版社集團, ‘山海經’.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石井進外, ‘詳說日本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Georges Duby : L'HISTOIRE CONTINUE, 松村剛 譯 ‘歷史は續く’.劉泳,海燕,‘赤蜂博物館’. ‘各國別 [世界史の整理].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西島定生 護雅夫, 木村常三郞, 猿谷 要 編著,世界歷史の基礎知識’.외다수의서책(書冊)을 참조하고,본문을 인용하였음을밝힙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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