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 헤드라인 뉴스

 지하철로 보는 상권|빌딩|재건축 뉴스

뒤로 리스트 인쇄
news only email오류보내기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톡

중·일의 역사왜곡 어디까지 하고 있나 <168>

요(遼)의 강대한 나라건국과 이중의 통치체제

요(遼)나라는 우리나라 역사에 편입되어야 할 나라다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0-07-26 11:42:08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우리는 요(遼)나라가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고, 지나(支那)의 나라 중 하나로 보고 있는데 요나라는 우리나라 역사에 편입되어야 할 국가이다. 이들은 거란족(契丹族)으로 상고시대인 환국시대 12부족과 깊은 관계가 있는 부족 중의 하나다. 
 
이들은 상고시대(上古時代)부터 우리와 무관치 않다. 필자는 2016년 8월 초 김세환 선생을 비롯해서 24명의 학자와 함께 지나에 역사탐방하면서 요나라 박물관을 방문하고 진열된 유물과 사적을 보며 우리가 너무 역사에 무관심이 문제인 것을 느꼈다. 
 
요나라는 지나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서기907년~960년)에 고대 예맥조선(銳麥朝鮮), 고구려(高句麗)가 터 잡고 있던 북변(北邊)에 916년~1125년 건국한 나라이나 우리역사에 편입되어야 할 나라이기에 그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들은 요하상류(遼河上流)의 시라무랜 유역에는 원래 거란족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당(唐)나라 말기 위구르(回鶻)가 키르기스의 압박을 받아서 분산해 중앙아시아에 이동한 후, 급속히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해 916년 수장(首長)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872년~926년)가 부족(部族)을 통일해서 건국한 것이 요나라이다. 
 
야율아보기는 요나라 건국 이전부터 당(唐)의 화북지방(華北地方)을 수시로 침입해서 한인(漢人)을 포로(捕虜)로서 자국영토 내에 옮겨 농경(農耕) 일을 하게 한다든가 성곽건축에 종사하게 했으며, 또 한인을 사대부(士大夫)에 등용한다든가 해서 행정기구(行政機構)를 갖춰갔다.  
 
이 야율아보기는 10세기 초 부족을 통합해 906년 가한(可汗)이 된 후, 요를 건국해서 시라무랜 유역 일대에 성곽도시를 구축해 이곳을 국도(國都)로 해서 몽골 제부족과 동 트로키스탄을 배하(配下)에 두고 926년에는 이웃인(東隣) 발해(渤海)를 멸망시키고 후에 연운(燕雲) 16주(州)까지 점령해 국호를 대요(大遼)라 했다. 
 
우리가 상고시대부터 고대와 삼국시대와 그 이후의 역사도 알아야 하기에 요(遼)나라와 당시 주변의 송(宋), 금(金)과 우리나라와의 관계도 살펴보고자 한다.
 
요(遼)건국과 야율아보기의 이중국가체제(二重國家體制)
 
이때는 황하유역과 그 주변에 후양(後梁), 후당(後唐), 후진(後晋), 후한(後漢), 후주(後周)가 발흥과 쇠망을 거듭하고 강남지방에는 많은 번진(藩鎭)이 정권이 존립했다. 즉, 오(吳), 남당(南唐), 오월(吳越), 민(閩), 형남(荊南), 초(楚), 남한(南漢), 북한(北漢), 전촉(前蜀), 후촉(後蜀)으로서 이들을 총칭해서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907~960년)인데 이 때 북방에 강력한 요(遼)가 건국한 것이었다.
 
거란족(契丹族)인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만주지방으로부터 외몽골지방 일대를 영유하는 거대한 초원국(草原國)을 건설했던 것이다. 야율아보기는 유목생활만으로 중원(中原)의 문명을 이용은 했으나 모든 것을 모방하면 지난날 북방민족이 연약(煉藥)하게 되어 멸망한 것과 같은 운명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한민족(漢民族)보다 우위에 있는 무력 유지하기 위해서는 유목생활을 유기(遺棄)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해 거란(契丹)에 동화할 수 있는 이민족(異民族)은 될 수 있는 한 한화(漢化)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중국가체제(二重國家體制)를 낳게 했다. 그것은 관제(官制)를 남북(南北) 이면(二面)으로 나누어 통치했다. 
 
즉, 남면관(南面官)은 한식제도(漢式制度)와 한법(漢法)에 의해서 한인을 다스리고 북면관(北面官)은 북방고유의 관습이나 부족제(部族制)를 유지시켜서 유목민족의 지배를 했던 것이다. 이를 이중국가체제(二重國家體制)라 했다.
 
야율아보기는 외몽골지방일대를 영유하는 거대한 초원국(草原國)을 건설하고 이중국가체제로 훌륭하게 요(遼)의 기초를 쌓고 갔던 것이다. 
 
한편 요(遼)의 원조를 받고 건국한 ‘후진(後晋)’은 처음에는 금백(金帛)과 세폐(歲幣)를 요에 보냈으나 점차 약속을 지키지 않자, 요의 태종(太宗)은 군사를 이끌고 가서 후진(後晋)을 멸(滅)하고서  중원(中原)에 요를 세워서 한민족(漢民族)을 지배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민족왕조(異民族王朝)의 성립에 대해서는 한민족의 저항이 너무 격렬하고, 지방군벌(地方軍閥)은 게릴라전을 전개해서 요를 괴롭히기 때문에 요의 태종은 야망을 버리고서 철병(撤兵)했다.  
 
그리고 태종은 지나 경락(經絡)을 시작해 후진(後晋)을 도우는 대신에 연운(燕雲) 16주(州)를 할양(割讓)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화북(華北)에 침공할 때의 안내자는 늘 요국(遼國)에 이주한 한인(漢人)의 공로가 컸었다.
 
요(遼)의 서하진공(西夏進攻)과 고려, 여진, 송(宋)등의 정황
 
먼저 요의 시대에 주변 상황을 보면, 송(宋), 여진(女眞)등의 대두가 보이는데 이 당시 고려는 9세기경이 되면 신라(新羅)에서 중앙의 귀족과 지방호족 간의 분쟁이 치열해 전국시대의 군웅할거(群雄割據)시대가 된다. 
 
이 때 918년에 왕건(王建;877~943년)이 고려왕조를 건국해 요와 대치(對峙)하고 요와 자웅(雌雄)을 다투며 27년간의 전투를 하는 역사도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沿海州), 흑룡강하유역(黑龍江下流域)과 송화강(松花江), 목단강(牧丹江)등에서 대두해온 민족에 수렵민족인 여진(女眞)도 있었다.
 
여진은 발해국 시대에는 그 지배하에 있었으나 발해가 요에 멸망되자 많은 부족으로 분산해서 요의 지배하에 놓인다. 여진족의 흑수 말갈(靺鞨)은 요의 시대에는 두만강 쪽으로 이주해서 생여진(生女眞)이라 불려졌다. 이들을 도이(刀伊)라고도 했다. 
 
여기서 도이(刀伊)는 여진인(女眞人)을 무시해서 말하는 ‘오랑캐’로 부를 때 도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10세기경 부터 요녕성(遼寧省)과 길림성(吉林省) 서남부(西南部)에 있었던 여진은 숙여진(熟女眞)이라 불렀다. 
 
이들 여진족이 정치적 통일을 이루는 것은 12세기 초두(初頭)로서 완안 아골타(完顔 阿骨打;서기 1068~1123년)의 출현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한편 남방으로 눈을 돌려보면, 937년 태국계(泰國界)의 은씨(殷氏)가 ‘대리(大理)’라는 나라를 건국했으나 송대말기(宋代末期)에는 현재의 운남성(雲南省)을 중심으로 해서 귀주성(貴州省)과 사천성(四川省)일부를 영유(領有)하는 대국(大國)이 되었다.
 
요(遼)와 송(宋)의 전쟁은 어찌해서 일어났나
 
송(宋)나라에 있어서 무서운 강적은 요나라였다. 이로 인해 송태조(宋太祖)는 건국(建國)해서 채택한 정책은 철저한 문치주의(文治主義)와 군주독주형(君主獨裁型)의 관료육성이었다. 여기서 문치주의(文治主義)란 군인으로부터 행정권을 빼앗아 군벌(軍閥)의 도양(跳梁)을 억제해 행정을 문관(文官)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 군주독주형의 관료육성이란 관료에 필요이상의 권한을 주지 않고 이를 분산화(分散化)해 권한의 대부분이 황제에 집중하게끔 한 것이었다. 또 과거시험(科擧試驗)도 최종적으로는 황제 스스로 전시(殿試)를 행해서 관료에 충성심을 심는 등 이를 제도화 했다.  
 
이는 송나라에 가장 중요한 과제이기는 하나 송태조(宋太祖)는 외환(外患)보다 더욱 중시한 것은 내우(內憂) 즉 국내문제이었다. 서하(西夏)의 내지(內地)침략에 의해서 송왕조(宋王朝)의 재정난에 송태조는 요와 우호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아우 태종시대(太宗時代) 979년에 북한(北漢)을 멸하고 지나의 통일이 거의 완성되자 태종은 북한국(北漢國)에 정벌군을 일으킨다. 그런데 북한(北漢)은 요의 후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요와 송이 전쟁이 계기가 되었다.
 
송태종(宋太宗)은 북한의 수도 태원(太原)을 함락하고 그 기세로 요가 점령하고 있는 연운(燕雲) 16주(州)의 중심인 북경(北京)을 향해서 진격을 계시했다. 보병을 주력으로 한 송군(宋軍)은 산서성의 산악지대에서는 요군을 제압했으나, 화북(華北)평원에 내려오니 요군이 자랑하는 기병 이동력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송은 북경성(北京城)을 공략해서 일단 손에 넣은 것이, 고량하(高粱河)의 일전(一戰)에서 요 원군(援軍)인 기병대(騎兵隊)에 포위되어 대패해 송태종은 겨우 탈출하게 되어 죽음을 면했다. 이 패전(敗戰)은 심각한 충격을 주었다.
 
송왕조에 요의 뒤를 이은 금, 몽골등 북방민족(北方民族)의 무력(武力)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줘 외교정책을 소극적으로 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글을 맺으며
 
송(宋)태조 조광윤(趙匡胤)은 지나를 통일했다고 하나 국내는 또 6개의 나라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재위 16년간은 이러한 나라들의 평정(平定)에 시간을 보냈다.  
 
2대 태종시대에 북한을 멸망시켜 통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건국으로부터 통일까지 19년이 걸린 셈이 된다. 이후 태종은 979년 본래 한민족(漢民族)의 영토이면서 이전에 요에 할양(割讓)한 연운(燕雲) 16주(州)의 탈회(奪回)에 나갔으나 요의 명장(名將) 야율휴가(耶律休哥)에게 산산(散散)히 무너지고 말았다.  
 
이것은 송군(宋軍)이 보병인데 반해 요군은 군마(軍馬)에 탄 기병대이기 때문이다. 왜 송군에 군마가 없었는가? 이를 말한다면 송왕조(宋王朝)는 한(漢)이나 당제국(唐帝國)과 같이 북방지대나 서역지방에 영토를 갖지 못해 한민족 거주지인 정주(正州)뿐인 국가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군마라고 하면 북방이나 서역(西域)으로부터 보급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군사력에 자신이 없는 송나라는 경제력에 의해서 요를 굴복시키려고 국경폐쇄와 통상단절의 조치로 나왔다.
 
이에 요의 성종(聖宗)은 송과 일거에 자웅(雌雄)을 가리려고 1004년 대군을 이끌고 송의 국경을 압박했다. 한편 송의 진종(眞宗)도 대군을 이끌고 대치했으나 요는 송이 고심한 소택지(沼澤地)의 방어시설을 깨고 황하북안(黃河北岸)에 가까운 단주(壇州)까지 진군했다. 
 
이에 송은 요군에 대해서 저항의 자세를 취하면서 또 한편에서는 국사(國使)를 요에 보내어 교섭을 시작했다. 그 결과 송은 요에 매년 면(綿) 20만필(萬匹), 은(銀)10만량을 보내고 국경에는 무역장(貿易場)을 설치해서 통상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 화약(和約)은 그 후 120년간 요가 멸망하기 직전까지 계속했다. 
 
요도 1115년 완안 아골타(完顔 阿骨打)가 ‘금(金)’을 건국해서 요와 송을 멸해 회수이북(淮水以北)을 빼앗아서 만주와 화북(華北)을 영토로 했다. 그런데 남송(南宋)이 건국한 것을 안 금은 강남지역을 피해 도주하는 강왕(康王;고종(高宗)을 추격해서 각지에서 남송군(南宋軍)과 전투를 했다.
 
그러나 남송군(南宋軍)도 필사적으로 저항하자 장기원정으로 식량부족에 빠진 금군(金軍)은 결국 추격을 포기하기 때문에 남송의 고종(高宗)은 항주(杭州)에 도읍(都邑)을 정할 수 있었다. (이상은 杉山徹宗,「眞實の中國四千年史」.164面,~180面, 貝塚茂樹, ‘中國の歷史’.137面~139面을 참조하고 본문을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여진족(女眞族) 혹은 여직족(女直族)은 원래 반수렵(半狩獵) 반유목민족(半遊牧民族)이었으나 대륙에 700년 이상 세력을 화장한 고구려도, 또 8세기에 건국한 발해도 고도의 농경기술을 갖고 있어, 여진족은 그들의 지배 하에서 농업기술을 봐 왔다. 
 
따라서 여진족인 금은 농경을 주체로 하는 하남(河南)땅에 매력을 느껴 만주보다 서방이나 북방에 관해서는 목초지로서는 적지이나 농업에는 부적지가 되기 때문에 대초원은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 이것이 겨우 100년 후에 유목민족인 몽골인 징기스칸의 출현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 원(元)이 건국하고 유라시아를 지배하게 된다. 
   
(參考文獻, 최태영, ‘한국고대사'.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朴鐘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한국인 자부심 더 알씨사랑’ ‘한국인 자부심 물이랑’ ‘한국인 자부심 더 코어랑’ ‘한국인 자부심 더 아리랑’. 吳在成 「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 ‘校勘十八史’,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윤진영 編集 「三國史」, 「우리역사(東夷傳」. 朴昌和 찬술, 金星謙) 번역, ‘숨겨진 역사를 찾아서’. 朴昌和 筆寫 金星謙 번역, ‘고구리 창세기’. 정희철 저 ‘중국은 없다’. 檀檀學會編輯), ‘桓檀古記’. 카터 코벨 저,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백지원, ‘고려왕조실록’. 杉山徹宗,「眞實の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文定昌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外 다수 서책을 참조하고, 본문을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다음에 계속)

  • 좋아요
    1

  • 감동이예요
    0

  • 후속기사원해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

<저작권자 ⓒ스카이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스타의 집&빌딩

중고 시장을 선도해가는 당근마켓의 '김재현' 대표이사가 사는 동네의 명사들
김재현
당근마켓
신필순
키이스트
최정우
포스코
뒤로 리스트 인쇄
email오류보내기 트위터 페이스북 밴드 카카오톡
독자의견 총 0건의 댓글이 있습니다.
등록하기

미세먼지 (2020-08-12 12:00 기준)

  • 서울
  •  
(양호 : 38)
  • 부산
  •  
(최고 : 15)
  • 대구
  •  
(좋음 : 21)
  • 인천
  •  
(좋음 : 26)
  • 광주
  •  
(좋음 : 29)
  • 대전
  •  
(보통 :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