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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언의 문화방담(放談)

일상으로 만개한 꽃들의 ‘옴니버스 이야기’

국내외 맹활약한 K아트의 ‘정초자’ 황주리 작가

이야기 여럿을 하나로 모은 그림 장르를 개척

삶이란 꽃은 누군가에게 아름다움과 방향 전해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1-02-19 10:37:26

 
▲이재언 미술평론가
우리는 살면서 정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 일상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그랬다가 이번 코로나 팬데믹으로 말미암아 일상에 대한 생각들이 많이 바뀌었다. 어느덧 1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지금, 일상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과거의 일상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이번 설만 해도 그렇다. 과거엔 설을 이렇게 조촐하게 지내본 기억이 없다. 
 
이중과세(二重過歲)는 낭비라 하여 구정을 폐지하려 했던 게 무려 약 1세기에 걸쳐 시도되었지만 결국 1980년대 말에야 복원되었던 것이다. 명절에 집요했던 우리지만, 코로나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언제 우리가 정상적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갇혀 있다. 코로나 이전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했던 것인지를 지금에야 절실히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런 답답한 상황에서 서양화가 황주리(63)의 그림들과 마주한다는 것은 오랜 추억의 사진첩을 펼치는 것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그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서의 온갖 경험과 다양한 감정들을 채밀꾼처럼 채취해 화폭에 이야기로 펼쳐온 작가이다. 작가치고 소소하고 진부하다 하여 일상을 소홀히 하는 이가 있겠는가. 보통 어떤 서사를 추구하느냐에 따라 거대서사의 작가와 미소서사의 작가로 구분되곤 한다. 그렇다면 일상을 주로 다루는 작업은 미소서사로 볼 수도 있겠으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거대든 미소든 서로 통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예로 탈북 새터민들의 처참한 생활상에 대한 이야기들은 미소서사일 수 있으나, 그 원인이 되는 이데올로기, 분단의 역사, 체제 등의 문제로 거슬러 올라가면 거대서사로 연결될 수 있다. 일상에 초점이 맞추어진 황주리의 그림들 역시 소소한 삶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보다 큰 범주의 세계로 확장되는 신축성을 띤다.
 
▲ 황주리 작가 [사진=필자제공]
작가는 학부에서 서양화, 대학원에서 미학 전공으로 석사과정을 마친 1980년대 중반부터 약관의 나이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화려하게 화단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시 그가 선보인 작업은 문자 문장이 들어가야 할 원고지에 삽화 같은 페인팅을 펼치는 독특한 회화 양식으로 화명을 떨치기 시작한다. 원고지 위에 일그러진 흑백 초상의 표현주의적인 인물화들이 끝없이 연결된 ‘가면무도회’는 어딘지 모르게 당시 어둡고 혼란스러운 우리의 사회상을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의 그림으로 기억된다. 그의 회화는 컴바이닝이나 유니트페인팅의 양식으로 시작된 것이다. 특히 문학성과 시각성의 결합, 셀과 셀들의 결합, 오브제와 페인팅의 결합 등이 당시 미학적 해체와 혼성화 등을 특징으로 하는 ‘탈(脫)모던’의 양상을 선구적으로 보여준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 황주리 작. 사랑의 풍경. 244x184cm-Acrylic on Canvas. [사진=필자제공]
 
그러다 1980년대 말 뉴욕으로 혈혈단신 유학을 떠나 10여 년의 체류를 통해 전과 비교해 도식화된 작가 특유의 옴니버스 페인팅 양식의 그림이 태어난다. ‘그대 안의 풍경’ 연작에서 보듯 사람 실루엣 안에 우리 일상에서 벌어지는 소소하면서도 잔잔한, 그러나 순간순간의 희노애락이 서린 이야기들을 여럿 엮어서 삽화처럼 펼치는 형식이다. 작가의 이러한 페인팅은 그가 실제로 집필한 수필 글쓰기와도 상관관계를 이룬다. 과거 원고지 위에 그렸던 이미지들을 따로 분리시켜 독립시킨 것이지만, 문자적 서사가 함께 병행되고 있다.
 
▲ 황주리 작. 미상. [사진=필자제공]
 
이후 작가는 ‘식물학’ 연작에 몰입하고 있다. 그의 옴니버스 형식은 꽃송이 이미지가 하나의 주제 아래 스테이지 역할을 하게 함으로써 상징과 이야기의 전개에 훨씬 단락화 된 느낌이다. 일상에 대한 서사들이 연결성을 갖고 성장하고 꽃피우는 식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일상은 애틋한 이야기의 꽃들로 무성한 식물원과도 같다. 작가가 삶을 꽃으로 비유하고 있는 데는, 근본적으로 그 안에 작동되는 생명에 대한 관조와 성찰들이 누군가에게 예쁜 색상만이 아니라 방향까지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식물학’(2021) 연작들 가운데 모택동 동상이 보이는 작품이 있다. 전체주의 체제 속에서도 꽃피어온 삶의 온갖 애환의 에피소드들이 꽃을 피우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황주리 작. 2017-100F [사진=필자제공]
 
작가는 형식주의의 따분함을 벗어나 따뜻한 교감을 나누고자 하는 1980년대 탈(脫)모던이라는 전환적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미학적 대중주의 편에 서서 대중과의 교감을 기본으로 여기는 작가이다. 이렇게 따뜻함과 향기까지 느낄 수 있는 그의 그림은 카툰이나 일러스트 화풍을 띠고 있으며, 이야기가 있는 그림으로서 대중들과의 교감이 수월하여 세대를 초월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작가의 화면들마다 여백에 깨알 같은 문자들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그림 속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사랑의 밀어들을 캐쳐링한 것처럼 느껴지며, 한편으로는 작가가 항상 그림을 글쓰기처럼, 글쓰기를 그림처럼 수행해온 입체적 태도의 연장선으로도 보인다.
 
수많은 국내외 유수의 미술관과 갤러리들에서 초대를 받아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으며, 해외 아트페어 등에서도 활발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 서사성을 담은 이야기 양식으로 말미암아 출판물에서도 널리 응용되고 있다. 평범을 비범, 즉 감동과 호소력을 주는 가치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예술에서 당연한 것임에도, 이런 마땅한 것이 우리 화단에서는 여전히 희소해 보인다. 이런 점에서 황주리의 서사적 미학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늘의 젊은 세대들의 보다 자유롭고 다양한 조형세계와 K-아트의 물결에 작가의 작업이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던 점들에 대해 좀 더 많은 조명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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