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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소지왕(炤知王)은 잦은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 각지에 성을 쌓고 군사를 양성했다. 그는 거소를 월성(月城)으로 옮기기로 하고 수리에 들어갔다. 이곳은 흙과 돌을 써서 높고 견고하게 쌓은 성이었다. 자연지세를 활용해서 반월 모양이었고,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주위에 해자를 팠다.
월성으로 궁성을 옮긴 후 정월 대보름이 다가왔다. 소지왕은 목욕재계를 위해 천천정(天泉亭)으로 향하던 길에 서출지(書出池)라는 연못에 이르렀다. 주위에 까마귀가 잔뜩 앉아 있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소지왕이 시위에게 명했다.
“까마귀 떼가 모여 있는 걸 봐서는 범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듯하다. 무슨 일인지 살피고 오너라.”
시위는 빠른 걸음으로 까마귀 떼가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사람이 다가오자 까마귀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잠시 후 돌아온 시위의 손에 서찰 한 통이 들려 있었다.
국왕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편지를 뜯어 살폈다. 거기에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射琴匣(사금갑)
거문고가 들어 있는 집을 쏘라는 의미였다.
소지왕은 잠깐 의아하게 여겼지만 곧 하늘의 계시로 받아들였다.
국왕은 가던 길을 멈추고 궁으로 돌아갔다. 갑작스러운 왕의 귀환에 궁인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중 하나가 급히 내궁으로 가려 하자 소지왕이 그를 막았다.
“그대로 있어라! 이곳에서 한 걸음이라도 움직이면 목을 베겠다!”
엄명을 받은 궁인들은 꼼짝할 수가 없었다.
소지왕은 수하들을 거느리고 내궁으로 들어갔다. 왕후의 처소로 들어서니 주인은 보이지 않고 병풍이 쳐진 구석에 금갑(琴匣) 하나가 놓여 있었다.
순간 국왕은 서찰에 적힌 글자를 떠올렸다. 그는 호위 무사에게서 활과 화살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금갑을 향해 활을 쐈다.
금갑에 화살이 꽂히자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그 속에서 비명이 들리더니 발가벗은 남녀가 뛰쳐나왔다. 여자는 선혜(善兮) 왕후였고, 남자는 독경과 포교를 핑계로 내전을 드나들던 성도(成道) 대사였다.
이들은 남의 이목을 피해 왕후의 처소에서 간통을 일삼다가 국왕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에 미처 피할 새가 없어 거문고 갑 속에 숨었던 것이다.
서력 486년, 왕후 치군이 죽자 소지왕은 이벌찬 내숙(乃宿)의 딸 선혜를 후비(後妃)로 맞이했다. 선혜 왕후는 이팔청춘의 나이로 호기심이 많고 매사에 열정적이었다.
갓 피어오른 목련과 같은 왕비를 맞이했지만 소지왕은 떠나간 치군을 잊지 못했다. 선혜 왕후는 자신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 국왕과 숨통을 죄는 궁중의 법도 때문에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면서 차츰 불법에 의지하게 됐다.
이 당시 신라의 도성에서는 왕실을 중심으로 불교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불교가 신라에 전해진 것은 고구려 승려 묵호자(墨胡子)에 의해서였다.
묵호자의 아버지는 북위 사람 아굴마(我堀摩)였다. 그는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을 때 아리따운 처녀 고도령(高道寜)를 만나 정분을 나눴다.
아굴마가 본국으로 돌아간 후 아들을 낳은 고도령은 그 이름을 도(道)라 지었다. 불교에 심취했던 그녀는 아도가 다섯 살이 됐을 때 불법을 익히게 하려고 초문사(肖門寺)로 보냈다.
아도는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천지 만물은 모두 근원이 있는 법이거늘 난 어찌 아버지가 없단 말인가!”
청년이 된 아도는 법당에서 독경하다가 상념에 빠져드는 일이 잦았다.
아들을 보기 위해 종종 초문사를 찾았던 고도령은 나날이 수척해지는 아도의 모습을 보면서 죄책감이 들었다. 많은 시간을 고민한 그녀는 결국 아들을 아버지에게 보내기로 했다.
“너의 아버지는 북위의 높은 관직에 있는 아굴마라는 분이다. 그분에게서 받은 목걸이를 징표로 줄 테니 찾아가거라.”
아도는 목걸이를 품에 간직한 후 바랑을 지고 석장을 짚으며 길을 떠났다.
북위의 도성인 낙양(洛陽)에 도착한 아도는 번화한 거리를 걸어 다니며 눈요기를 했다. 호기심 많은 청년에게는 이국의 풍경이 마냥 신기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아도가 낙양의 대찰인 백마사(白馬寺) 앞을 지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문 앞에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 주변에 물어보니 큰스님인 현창(玄彰) 선사가 이곳에서 강론한다는 것이었다. 호기심이 생긴 아도는 사찰 안으로 들어갔다.
사찰 중앙에는 단이 쌓여 있고 수많은 사람이 그 밑에 서서 선사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 저잣거리처럼 시끌벅적하던 일대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주름투성이에 뼈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한 승려가 제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단으로 올라섰다. 그가 걸친 다 해진 가사가 눈길을 끌었다.
금빛 가사를 입고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모습을 기대했던 아도는 선사의 초라함에 실망했다. 하지만 강론이 시작되자 그의 낙심은 부지불식간에 사라졌다.
“부처를 찾으려 애쓰지 마라. 마음이 곧 부처이니라.”
선사의 가르침은 한여름에 더위를 날리는 산들바람처럼 아도의 막힌 가슴을 뚫어 주었다. 속세의 인연과 욕심, 그리고 불법에 대한 고민이 사라지는 듯했다.
아도는 강론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현창 선사의 처소로 무작정 찾아갔다. 선사는 오랜 설법으로 힘겨웠는지 숨을 몰아쉬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아도는 선사 앞으로 달려가 엎드려 간청했다.
“저를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선사는 고요한 눈으로 아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있고 싶으면 있고, 가고 싶으면 가라.”
선사의 말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해서 어리둥절했지만 머물러도 좋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아도는 절간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면서 큰스님의 옆에 머물렀다. 그는 어떤 것도 내놓고 가르쳐 주지 않았기에 스스로 배우고 깨달아야 했다.
수년이 지났지만 아도는 처음 들었던 설법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하루는 용기를 내어 선사에게 물었다.
“스님은 어찌하여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신 겁니까?”
“우는 아이를 달래려고 그랬지.”
“아기가 울음을 그치면 어떻게 됩니까?”
“생사 고뇌가 사라지겠지.”
이 말을 듣고 아도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고 나니 더는 선사 곁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아도는 스승에게 큰절을 올리고 고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선사는 무표정하게 한 마디 남기더니 돌아섰다.
“왔으니 가는 것이다. 앞으로 네 법호를 묵호자(墨胡子)라 해라.”
아도가 아닌 묵호자는 아버지를 만나러 낙양으로 가지 않고 고구려로 돌아갔다. 이때 그의 나이가 열아홉이었다.
묵호자는 어머니를 찾아뵙고 신라로 가겠다고 말했다. 몇 년 만에 돌아온 아들이 다시 먼 곳으로 떠난다고 하자 고도령은 극구 만류했다. 하지만 묵호자의 결심은 단단했다.
“불법을 널리 전하여 사람들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게 저의 본분입니다.”
고도령은 마지못해 신라행을 허락했다.
묵호자가 괴이한 행색으로 나타나자 신라 사람들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살폈다. 그런 신라 사람들에게 불법을 설파했지만 그들에게 그는 수상한 이방인일 뿐이었다.
당시는 눌지왕 시절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을 때였다. 고구려에서 들어온 사람은 일단 간자라는 의심부터 받았다.
몇 차례 봉변을 당하고 가까스로 도망친 묵호자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묵호자가 일선군(一善郡)에 이르렀을 때였다. 어느덧 주위가 어두워져 있었다.
길가에서 밤을 맞게 된 승려는 머물 곳을 찾기 위해 사방을 둘러봤다. 이때 어디선가 방울 소리가 들렸다. 묵호자는 소리 나는 쪽을 바라봤다. 길 저편에서 나귀를 탄 사내가 술에 취한 듯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간격이 좁혀지자, 사내도 묵호자를 봤다. 그는 급히 나귀에서 뛰어내리더니 승려에게 다가갔다.
“스님, 이런 곳에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사내가 스님이라고 부르는 말에 묵호자는 안심했다. 그 역시 불법을 알고 있는 자가 분명했다.
“소승은 고구려 사람입니다. 신라에 불법을 전하러 왔습니다.”
사내는 황급히 주변을 살피더니 묵호자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는 하인들에게 문단속을 단단히 하라 지시한 후 고구려 승려를 별당으로 이끌었다.
“저는 모례(毛禮)라 합니다. 지난날 장사를 위해 평양에 간 적이 있는데 우연히 불법을 접하고 깊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시절이 하 수상해서 나라에서 불교를 금기시하고 있습니다. 스님이 함부로 돌아다니면 큰 봉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당분간 이곳에서 숨어 지내면서 때를 기다리시는 게 좋겠습니다.”
모례는 마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집 근처에 굴을 파고 묵호자를 숨겼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을 때 눌지왕이 애지중지하는 성국(成國) 공주가 병에 걸려 자리를 보전하고 누웠다.
눌지왕은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용한 의원을 불러 보았지만 누구도 공주의 병을 고치지 못했다. 시간이 갈수록 병은 악화했다.
초조해진 눌지왕은 공주의 병을 낫게 하는 사람에게는 큰 상을 내리겠다고 전국에 방을 붙였다.
이 소문을 들은 묵호자가 모례에게 말했다.
“내 지난날 스승에게서 의술을 배웠소. 공주의 병세를 볼 수 있게 주선해 주시오.”
불교의 선사는 의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모례는 묵호자의 부탁을 받아들여 함께 도성으로 떠났다. 승려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게 하인으로 변복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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