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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에 도착한 모례와 묵호자는 궁궐로 나아가 찾아온 뜻을 밝혔다. 보고를 받은 왕은 묵호자를 안으로 들이게 했다.
눌지왕은 상대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묵호자를 공주의 처소로 데려갔다.
국왕은 서늘한 얼굴로 다짐했다.
“공주를 낫게 하지 못하면 너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다!”
묵호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공주의 상태를 살피더니 국왕에게 물었다.
“지난날 동진(東晋)의 사신이 향목(香木)을 가져왔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혹시 아직도 보관하고 계십니까?”
눌지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용도를 몰라 보고에 넣어 두었다.”
“공주님의 병을 낫게 하려면 그 향목이 필요합니다.”
“공주의 병이 무엇인지 알아냈단 말이냐?”
“이 병은 부인병의 일종으로 몸이 냉한 데서 옵니다. 대부분 여인이 의원에게 보이기를 꺼려서 병을 키우다가 속절없이 목숨을 잃습니다. 그런 사정으로 보통 의원은 이 증상을 볼 기회조차 없기에 병명이나 치료법을 알 수 없습니다.”
왕은 묵호자의 손을 덥석 잡았다.
“공주의 병만 낫게 해 준다면 자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 들어주겠네.”
왕은 당장 시위에게 향목을 가져오라 일렀다.
“이 향목은 신성목(神聖木)이라 하는데, 태우면 강한 향과 양기를 발산합니다. 냉한 몸을 치료하는 데는 더없이 좋은 약이지요.”
주위를 물리친 묵호자는 방 곳곳에 향을 피우고 독경(讀經)을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점차 기력을 되찾은 공주는 얼마 안 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눌지왕은 묵호자를 불러 크게 치하한 후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묵호자는 쓰고 있던 두건을 벗었다.
“소승은 고구려 승려 묵호자라 합니다. 신라에 불법을 전하고자 왔으나 사람들의 배척이 심해 본의 아니게 이리 변복하고 폐하 앞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빈도(貧道)에게 바람이 있다면 신라 땅에 절을 세우고 불법을 전파하는 겁니다.”
눌지왕은 포교를 쾌히 승낙하고 불사를 위한 역사를 일으켰다.
묵호자는 임시로 모옥(茅屋·억새를 얽어 지은 움막집)을 짓고 살면서 불법을 강연했다. 사찰을 짓는 동안 간간이 하늘에서 묘화(妙花)가 떨어졌다. 그래서 이 절을 흥륜사(興輪寺)라 이름 붙였다.
그러나 묵호자의 꿈은 제대로 피워 보지도 못하고 스러졌다. 눌지왕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자 평소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사람들이 들고일어나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다. 묵호자는 표연히 도성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신라는 자비왕을 거쳐 소지왕 시대를 맞았다.
모례는 묵호자를 소개한 공으로 사지(舍知)의 벼슬을 지내다가 은퇴한 후, 고향집에 내려와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묵호자가 홀연히 나타났다.
모례는 승려를 반갑게 맞이했다.
“누이 편에 소식은 듣고 있었습니다. 엄장사(嚴莊寺)를 떠나 전국을 돌며 불법을 전하고 계시다고요.”
모례의 누이동생인 사씨는 묵호자의 설법을 듣고 감복하여 출가한 후 영흥사(永興寺)에 머물고 있었다.
묵호자가 웃으며 말했다.
“인연이 있으니 다시 뵙게 되는군요.”
모례가 묵호자를 따라온 시자들을 보니 한 승려가 눈에 띄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귀티가 흐르는 얼굴이지만, 입술이 얇고 눈썹이 짙었다. 관상에 조예가 깊은 모례가 볼 때는 상서롭지 못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무리 다시 뜯어 봐도 큰 화를 불러일으킬 상이었다.
모례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어 묵호자에게 이 사실을 넌지시 일러 주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 아이의 법명은 성도(成道)라 합니다. 빈도도 그런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면 따르는 것이 순리겠지요.”
대사의 태평한 대답에 모례는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몇 년 후, 묵호자가 입적하자 제자인 성각·성일·성도 등이 뒤를 이어 불법을 전파했다. 특히 성도는 언변이 좋고 인물이 뛰어나 신도들 사이에서 명성이 드높았다.
성국 공주는 출가했다가 남편이 죽은 후로 다시 궁으로 돌아와 지냈다. 이제 내궁에서는 가장 웃어른이었다. 그녀는 묵호자의 영향을 받아 불법에 귀의했다. 왕궁 안에 불당을 차리고 성도를 초빙해 강론을 들었다.
성국 공주가 주관하는 강론에는 내궁에 속해 있는 모든 사람이 참여했다. 왕후라 해도 빠질 수 없는 자리였다.
선혜 왕후는 성도와의 첫 만남에서 욕망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는 색정에 빠진 왕후는 은밀히 성도를 자신의 처소로 불러들였다.
성도 역시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피를 진정시킬 수 없었다. 왕후의 요염한 몸짓은 불법 아래 억눌려 있던 정욕을 분출시켰다.
운명적으로 끌리게 된 두 사람은 결국 헤어 나올 수 없는 불륜에 빠져들게 됐다. 설법을 빙자한 만남이 잦아지면서 욕정의 밀도는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은 오래갈 수 없는 법이었다.
성도와 선혜 왕후는 간통한 죄로 차가운 칼날 아래 이슬로 사라졌다. 삶을 함께할 수는 없었지만 죽음은 한날한시에 함께 맞이한 것이다.
소지왕은 궁인들을 시켜 두 사람의 시신을 산에 내다버렸다. 그리고 왕명으로 불교의 포교를 금지하고, 불법을 따르는 자를 색출해 엄히 다스리게 했다.
소지왕은 참담한 기억을 씻어 내기 위해 더욱 정사에 매달렸다. 그는 민심을 살피기 위해 전국 순행을 떠났다. 각 군현을 돌며 어려운 백성을 돌보았다. 환자·과부·고아·혼자 사는 노인을 위문하고, 관아에 갇혀 있는 죄수 중에서 죄가 가벼운 자는 방면했다.
국왕이 열성을 다하는 모습을 본 백성은 더욱 힘을 내어 생업에 매진했다. 이로써 신라는 다시 기틀을 잡을 수 있었다.
서력 500년 9월, 소지왕이 순행을 나갔다가 날이군(捺已郡)에 이르러 날이 저물었다. 그는 호족인 파로(波路)의 집에서 하룻밤 머물기로 했다.
파로는 국왕을 상석에 모시고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대접했다. 그는 왕의 행차가 좋은 기회라 여겼다. 국왕의 눈에 들기만 하면 그토록 소원하던 조정으로의 진출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밤이 늦어서야 술자리가 파했다. 소지왕은 파로의 안내를 받아 침소로 향했다. 왕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침소에는 비단 금침이 깔렸고, 향기가 은은히 감돌았다.
집주인이 물러간 후에 소지왕은 의관을 벗고 침상에 몸을 뉘었다. 오랜 여정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소지왕이 막 잠에 빠져들려고 할 때 밖에서 시위가 아뢰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하여 밖을 내다보니 마당에 오색 비단으로 덮인 수레 한 채가 놓여 있었다.
시위가 천을 걷으니 붉은 비단옷을 입은 아리따운 소녀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이를 괴이하게 여긴 소지왕이 물었다.
“어인 일로 거기 있느냐?”
소녀는 주눅 들지 않고 대답했다.
“저는 파로의 딸 벽화(碧花)라 합니다. 아비의 명을 받고 폐하를 모시기 위해 왔습니다.”
아비가 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딸을 바친 것이었다.
소지왕은 소녀를 자세히 뜯어봤다. 십오륙 세 정도의 나이에 빼어난 미모가 돋보였다. 국왕은 욕망이 용솟음쳤지만 애써 눌렀다. 임금이 순행 중에 여색을 가까이하는 것은 백성 보기에 좋지 않았다.
“호의는 알겠으나 그 뜻을 받아들일 수는 없구나. 마음만 고맙게 받겠다.”
국왕이 수청을 사양했기에 소녀는 하릴없이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방방곡곡에 퍼졌다. 백성은 국왕의 무욕(無慾)과 청렴함을 칭송하고 성인(聖人)으로 떠받들었다.
궁으로 돌아온 소지왕은 벽화의 자태가 눈앞에 아른거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며칠을 고민하던 국왕은 미복을 한 채 시위만을 데리고 궁을 빠져나와 파로의 집으로 갔다. 파로는 왕의 출현에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집주인은 소지왕을 한적한 별실로 안내하고 벽화를 한껏 치장시켜 들여보냈다. 그는 식솔의 입단속도 잊지 않았다.
가까이서 마주한 여인의 모습은 갓 세공을 끝낸 보석처럼 빛이 났다. 소지왕은 함부로 만지면 깨질까 두려워 조심스럽게 벽화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수줍게 왕이 이끄는 대로 따랐다.
벽화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수렁이었다. 한번 발을 들이면 헤어날 수 없는 늪이었다. 왕은 열락의 늪에서 온 힘을 다해 허우적거렸다.
이날 이후로 소지왕은 최면에 걸린 듯 남몰래 벽화를 찾아갔다. 두 사람이 질긴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 서로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어둠 속에서 별이 촘촘히 빛나고 있을 무렵, 소지왕은 근시 두 명만 데리고 길을 걷고 있었다. 날이 추워서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국왕은 포근하고 따뜻했던 벽화의 몸이 떠올랐다. 금방 만나고 돌아오는 길인데도 벌써 그녀가 간절히 그리웠다.
길라잡이로 나선 시위가 당황한 목소리로 아뢰었다.
“폐하,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듯합니다.”
다른 날과 달리 벽화의 집에서 너무 늦게 나선 것이 화근이었다. 조회 전까지는 궁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서둘렀다. 그래서 평소에 다니는 길이 아닌 지름길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어두워서 방향을 잘못 잡았던 것이다.
근시들이 사방으로 길을 찾았지만 낯선 곳을 헤매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다급해진 소지왕이 근시들을 다그쳐 인가(人家)를 찾게 했다. 자칫하면 길에서 아침을 맞을 수도 있었다.
[글 임동주 그림 이영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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