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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에서 한바탕 무력시위를 끝낸 후 영양왕은 군사를 수습해 귀경길에 올랐다. 그는 이번 원정을 통해 앞으로 펼쳐질 전황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국경의 성들은 높고 견고했고, 수많은 병기와 양곡을 비축하고 있었다. 더불어 군민들의 사기는 당장 수나라 도성을 쓸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드높았다.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은 육로가 아니었다. 광개토태왕 이래로 외적이 요하를 건너 침입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해로(海路)라면 얘기가 달랐다. 수나라 군사가 산동의 내주에서 출발해 황해(黃海)를 가로질러 패수로 들어온다면 평양성은 쉽게 위험에 노출될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영양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해로를 걱정하시는 겁니까?”
옆에서 수행하던 을지문덕이 속마음을 들여다보듯 물었다.
영양왕은 놀라면서도 겸연쩍었다.
“먼저 말을 꺼내는 걸 보니 이미 대책을 세워 놓은 듯하구나.”
왕의 말 속에는 을지문덕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이미 비사성(卑沙城)에서 새로운 선박을 건조하고, 해군을 조련하고 있으니 심려치 마십시오.”
“하지만 바닷길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지 않으냐.”
“소신이 예상하건대, 수주는 눈에 띄게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서 해로로 쳐들어올 겁니다. 그렇다고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해전의 승패는 전선의 수가 아니라 바람과 조류를 어찌 이용하느냐에 달렸으니까요. 이에 대해서는 우리 군사들이 밤낮으로 대비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바다를 맡기는 게 좋겠는가?”
“건무 장군이 합당할 줄 압니다.”
영양왕이 의아하여 물었다.
“건무는 자네와 사이가 나쁜 걸로 아는데, 어찌 그를 추천하는가?”
“적임자를 말하라 하셨지 저와 친한 사람이 누구냐 물어보신 게 아니지 않습니까. 왕제께서 저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입니다. 소장은 단지 나라를 위해 필요한 인물을 추천했을 뿐입니다.”
국왕은 을지문덕의 사심 없는 태도에 감탄했다. 영양왕은 새삼스럽게 을지문덕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빛나는 눈은 천하를 꿰뚫어 보고 단단한 가슴은 웅대한 포부를 담고 있었다.
국왕은 맑게 웃으면서 명을 내렸다.
“앞으로 닥칠 수나라와의 전쟁은 사전에 철저히 준비했기에 큰 문제가 없으리라 본다. 자네를 북로성(北路城)의 성주로 임명할 테니 북방으로 가서 실위나 말갈이 들썩이지 못하도록 조처하라.”
수나라와의 전쟁에 앞서 북방의 동요에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실위나 흑수말갈 같은 족속이 수나라와 손을 잡으면 실로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소장은 목숨 걸고 성을 지켜 냈습니다. 저들은 결국 유성(柳城)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막강한 고구려군을 상대하면서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문제가 이를 곧이곧대로 믿은 것은 아니었다. 그로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고구려를 칠 명분을 얻었기 때문이다.
수문제는 위충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도열해 있는 대신들을 둘러봤다.
“드디어 때가 왔다. 고구려를 정벌하겠다.”
4백여 년간의 분열과 갈등을 겪었던 중원이었다. 자신의 대에 와서 마침내 통일을 이루고 질서와 권위를 찾았는데 이를 다시 잃고 싶지 않았다. 중원의 평화를 위협할 수 있는 고구려와 같은 나라는 초장에 꺾어 두어야 했다. 그래야만 수나라가 자손만대까지 번창할 수 있었다.
“당장 군사를 집결시키고 출진을 준비토록 하라. 이번 원정의 지휘는 한왕 량(양량)이 맡고, 왕세적(王世績) 장군은 원수를 보필하라.”
왕세적이 나서며 물었다.
“출진의 시기는 언제로 하시겠습니까?”
“준비가 끝나는 대로 바로 떠나라.”
왕세적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장마철이 다가옵니다. 자칫하면 싸우기도 전에 큰 피해를 볼 수 있습니다.”
“저들 또한 그리 생각할 테니 허점을 파고들 좋은 기회가 아닌가. 비가 무서워 전쟁을 피한다면 무슨 수로 고구려를 제압하려 하는가.”
문제는 장군의 의견을 일언지하에 묵살하고 출전을 준비하도록 했다. 그 역시 신하들의 걱정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가 이번 원정에서 선택한 길은 요하 하류를 건너는 것이었다. 이 일대는 요택(遼澤)이라 불리는 늪지로 비만 오면 심한 진창길로 변해서 수레와 말이 다니기 어려웠다. 그리고 습기가 많아서 병장기가 녹슬기 쉽고, 전염병이 돌 위험도 컸다. 그런 문제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출진을 강행하는 이유는 허점을 노려야만 승리할 수 있을 만큼 고구려가 만만치 않은 상대였기 때문이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문제는 한왕 양량과 왕세적에게 3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임유관을 거쳐 요동으로 나아가라 명했다.
명을 받고 대전을 물러 나오는 왕세적은 마음이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참 농번기에 군사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백성의 원성을 피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장마철에 요택을 지나야 하는 상황까지 생각하면 문제의 판단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궁문을 나서던 왕세적은 말에서 내리는 주라후와 마주쳤다. 그는 풍채가 당당하고 눈빛이 날카로웠다. 본래 진나라의 총관으로, 한때는 수나라 군대에 대항해 창해(滄海)를 수호하던 인물이었다. 비록 압도적인 병력을 내세운 수륙 양면 작전에 패배의 쓴맛을 보긴 했지만 끝까지 수군의 진격을 막아 한때나마 문제의 애를 태웠던 장수였다.
진나라를 정복한 문제는 주라후의 재능을 높이 사서 해군(海軍)의 총관으로 삼고 강남의 장정을 모아 조련하게 했다.
왕세적은 주라후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한번 배신한 사람은 다시 배신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를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주라후 또한 눈치가 없지는 않았기에 왕세적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노회한 인물이었기에 문제의 총애를 받는 자를 적으로 돌릴 행동은 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방인이 살아남으려면 우군(友軍)을 늘려 가는 수밖에 없었다.
왕세적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소이다. 총관도 폐하의 명을 받고 오셨구려.”
“그동안 강녕하셨는지요. 장군과 함께 출전하게 되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저로서는 크나큰 영광입니다.”
왕세적은 천연덕스럽게 상대를 추켜세우는 상대를 보며 심사가 뒤틀렸지만 태연히 대답했다.
“이번 원정에서 총관에 대한 폐하의 기대가 크십니다. 우리 힘을 합쳐서 동이(東夷)를 응징하도록 합시다. 그럼 출진 준비로 바빠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멀어져 가는 왕세적을 보며 주라후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위인인데 오늘따라 얼굴에 심란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번 고구려 원정 때문일 거라는 예감에 주라후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익숙지 않은 해역으로 나아가는 것은 물에서 수십 년 동안 잔뼈가 굵은 그로서도 꺼려지는 일이었다.
주라후는 한꺼번에 달려드는 번민들을 떨쳐 내고 문제가 기다리고 있는 편전으로 나아갔다. 문 앞에 이르니 막 어전 회의가 끝났는지 대신들이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총관은 그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에 편전 안으로 들어섰다.
문제는 옥좌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주라후가 들어서자 시위가 그의 입시를 알렸다.
“신 해군 총관 주라후, 폐하를 뵙습니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소.”
문제는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폐하의 명을 받고 강남의 해군 선단을 동래(東來)로 이동하게 조치했습니다. 명령만 내리시면 곧바로 비사성으로 진격하겠습니다.”
주라후는 문제의 명에 따라 강남의 민간에서 길이가 세 길 이상 되는 배를 모두 징발하고, 물에 익숙한 장정을 모아 군사로 조련함으로써 해군을 강화했다.
“그 일로 그대를 불렀소. 이리 가까이 오시오.”
총관이 다가서자 문제는 주위를 둘러본 후에 은밀한 어조로 속삭였다. 주라후는 미동도 없이 듣고 있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의 지시는 비사성 쪽으로 방향을 잡는 척하다가 고구려의 패수로 직접 향하라는 것이었다. 소위 동쪽에서 소란을 피우고 서쪽을 치는 성동격서의 전법이었다.
“한 치의 실수도 없게 하겠습니다.”
문제는 총관의 다짐을 받고서야 굳은 얼굴을 풀었다.
“오늘은 술 한 잔 마시고 푹 쉬도록 하시오. 내일부터는 힘겨운 날이 될 거요.”
주라후는 무거운 짐을 어깨에 올려놓은 듯했다. 문제의 계책이 성공한다면 자신은 영웅이 될 테지만 만에 하나 실패한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첩자로부터 수군의 동향이 속속 보고되자 고구려의 요동성에서는 병마도원수 강이식의 주도하에 전략 회의가 열렸다. 도원수는 둘러앉은 장군과 성주들의 면면을 살폈다. 막리지 연자유를 비롯해 요동성주와 신성·개모성·안시성 등 주요 성의 수장이 모두 참석해 있었다.
강이식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첩보에 의하면 수나라 군사들이 수륙 양면으로 진격할 듯하오. 한왕과 왕세적이 이끄는 30만의 군사는 임유관으로 향하고 있고 주라후가 지휘하는 5만은 산동의 동래에서 비사성으로의 항해를 준비하고 있다 하는구려.”
그러자 요동성주가 호언장담하고 나섰다.
“아무리 대군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우리 성은 높고 견고하여 쉽게 함락당하지 않을 겁니다. 성끼리 긴밀하게 연계하면 저들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다른 성주들 또한 투지를 불태웠다.
강이식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양량은 수주가 아끼는 왕자이기는 하지만 실전 경험이 부족할 뿐 아니라 성미가 급하고 독단적인 자요. 그리 크게 걱정할 건 없는 위인이오. 문제는 그를 보좌하는 왕세적이오. 그는 수나라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진나라를 정복하는 데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오. 하지만 그 역시 요택을 무사히 빠져나오기는 어려울 거요. 곧 장마가 닥치면 저들은 자멸의 길에 들어서게 될 것이오. 오히려 걱정스러운 쪽은 주라후가 이끄는 해군이라 할 수 있소.”
그러자 비사성주가 위풍당당하게 기염을 토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래전부터 조련해 온 일당백의 우리 해군이 황해를 완벽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저들의 침입을 추호도 허용하지 않을 겁니다.”
도원수는 다른 걱정을 하고 있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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