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74] 의사는 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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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진실은 모르는 척하라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4-18 06:30:10

최 박사가 두 손을 넓게 벌려 ‘펑’ 하고 폭발을 눈앞에 그려 보였다.

“죽는 게 뭔지 아나? 심장이 멎고 폐가 정지하는 거야. 그러면 영혼이고 마음이고 없어. 인생이 끝나는 거야.”

“박사님과 제가 포기하면 강무훤 씨는 기회조차 가질 수 없어요.”

“기회라고 했나? 생명은 주어진 만큼 살 수 있는 거야. 의학은 마법이 아니고 의사도 신이 아니야. 6개월의 삶은 소중한 거야. 보이지도 않는 걸 믿고 목숨을 걸어선 안 돼. ”

“사랑도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박사님은 사랑을 믿으셨잖아요.”

정하운이 고집스럽게 물러서지 않았다.

“자네가 뭘 안다고!”

최 박사는 다시 얼굴을 찌푸리며 그 어느 때보다 엄하고 완고하게 호통쳤다.

“그래서 밤마다 그분의 방에 불을 밝히는 거잖아요.”

정하운은 계속 최주결을 몰아붙였다. 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떤 진실은 모르는 척해 주어야 한다. 소리 내어 발설해 버리면 봉인되었던 슬픔이나 아픔을 터뜨리고 만다. 정하운의 말에는 진실이 담겨 있었지만 듣는 사람을 가혹하리만큼 상처 내는 채찍이 감춰져 있다는 걸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제발, 생각 좀 하게 두 분 모두 조용히 해 주세요. 살고 죽는 건 내 문제란 말입니다.”

버럭, 내가 소리 질렀다. 두 사람의 언쟁을 끝나게 하려는 의도만은 아니었다. 그들의 논쟁은 나의 결정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최 박사는 숨을 무겁게 내쉬고는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정하운도 팔짱을 끼고 벽난로 앞에 서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대체 뭡니까, 뜨거운 심장이란?”

내가 물었다.

“살아 있다는 느낌.”

고개도 돌리지 않았지만 정하운이 말했다.

“아니, 살고 싶었어요. 그게 날 살게 한 건 아닐까…….”

정하운은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내 자신만의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는 조금 전 최 박사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불안하게 창가를 서성거렸다. 바람이 거세졌는지 거실 창이 이따금 흔들렸다. 폭탄처럼 떨어진 굵은 눈송이들이 유리창에 부딪혀 이내 사라졌다.

눈을 도려 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흉측한 모습으로 통증에 시달리더라도 6개월의 보장된 시간을 살 수 있다면 인생을 정리할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남겨진 삶이 단 이틀뿐이라면, 6개월의 삶을 희생하고라도 얻을 가치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나에게 6개월이나 걸려 정리해야 할 인생이 있던가? 그것이 나를 더욱 비참하게 했다. 한가롭게 과거나 회상하고 있는 최 박사와 정하운이 원망스럽다는 듯 나는 쿵쿵 발소리를 내며 2층으로 올라왔다. 그녀도 박사도 나를 붙잡지 않았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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