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쓰는 역사 [9] “여기 개나리가 만발하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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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와 경구로 부당한 현실에 저항한 월남 이상재

스카이데일리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4-29 17:06:34

▲ 개나리의 ‘개’는 강이나 시내를 뜻하는 순우리말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윤상구 사진작가

우리말 중 접두사 ‘개’는 대개 아류·가짜·천덕꾸러기 등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개나리꽃도 ‘나리’라는 백합과 꽃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나리꽃처럼 크고 소담하지 않아서인지 그 이름에 ‘개’ 자가 붙었다. 그런데 개나리의 ‘개’는 강이나 시내를 뜻하는 순우리말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이때 ‘개’는 식물이 자라기 힘든 ‘척박한 땅’을 뜻하므로 접두사로 ‘개’자가 붙은 식물은 ‘야생’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교과서에 실린 이상재의 유머

하지만 낱말 앞에 붙은 ‘개’자는 사람을 멸시하는 말로도 쓰인다. 물론 죄 없는 개나리도 그 이름 때문에 종종 욕설로 사용된다. 개나리를 욕으로 사용한 경우로는 월남 이상재의 일화를 빼놓을 수 없다. 일제시대 어느 날, 이상재는 강연하러 갔다가 강연장에 순사와 형사들이 잔뜩 와 있는 것을 보았다. 이상재는 자신을 감시하러 온 그들을 보고 “여기 개나리가 만발하였구나!”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 순사에게는 ‘개’라는 별칭이 있었고, 형사는 ‘나리’로 불렸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에서 고위 관리를 지낸 정치가 이상재는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모든 관직을 내려놓았다. 이후 그는 교육 계몽 활동에 나섰고 청년들의 실력 양성을 통한 독립운동에 힘썼다. 그는 일제시대에 YMCA 전국연합회회장·신간회 창립회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이며 독립운동가이지만 그의 이름은 독설과 당당하고 탁월한 유머 감각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오래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일화의 영향인 듯하다.

교과서에 실린 일화

이상재는 겨울이면 갓 위에 방한용 모자인 남바위를 쓰고 다녔던 모양이다. 그러자 그를 감시하기 위해 따라다니던 일본 순사가 물었다.

“선생님은 왜 갓 위에 남바위를 쓰십니까?”

그러자 이상재는 “그럼 남바위 위에 갓을 쓸까?” 하고 쏘아붙여 순사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는 얘기다.

교과서에 실린 것뿐만 아니다. 단순한 유머라고 하기에는 단단하고 날카로운 뼈를 품고 있는 이상재의 당찬 발언은 어록을 만들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다양하고도 많다. 또 100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이내 웃음이 터지거나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재기가 넘친다. 여기 화제가 된 그의 재담 몇 가지를 소개한다.

조선의 무서운 영감

▲ 노오란 봄의 온기를 전하는 개나리꽃을 보면 월남 이상재가 떠오른다. 윤상구 사진작가

일본은 한일합방 무렵 조선미술협회를 조직하고 그 창립식에 이상재를 초대했다. 그 자리에 는 이완용·송병준 등 친일파들도 초대되었다. 이상재는 그 두 사람을 보고 “대감들은 도쿄로 이사 가시지요. 망하게 하는 데는 천재니까 대감들이 도쿄에 가면 일본이 망할 것 아니오?”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이상재가 시찰단원으로 일본에 갔을 때 관리가 총과 칼을 보여 주며 일본의 힘을 자랑하자 이상재는 “오늘 동양에서 가장 큰 병기창을 보니 과연 일본이 강국임을 알겠소. 다만 성경에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걱정이외다”라며 마태복음 구절을 인용하여 그들의 오만을 비꼬기도 했다.

일본의 유명한 정치가 오자키 유키오가 3‧1운동을 비판하기 위해 이상재를 찾아온 적이 있다. 이때 이상재는 뒷산 아름드리 소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펴고 ‘우리 응접실’이니 앉으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오자키가 “조선과 일본은 부부 같은 사이인데 남편이 조금 잘못했다고 아내가 들고일어나서야 되겠소?” 하자 이상재는 “지당한 말씀이오. 그런데 그 부부가 폭력으로 맺어진 사이라도 그렇겠소?”라고 되받아쳤다. 오자키는 일본으로 돌아가 “조선에서 무서운 영감을 만났다. 그는 세속적인 인간이 아니라 몇 백 년 된 소나무와 한 몸인 것처럼 느껴졌다”는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이상재의 넘치는 해학과 유머, 풍자 능력

이상재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식으로 성 뒤에 ‘상’을 붙이거나 미국식으로 성 앞에 미스터·미스를 붙여 서로를 부르는 것을 보면 매우 언짢아했다. 모임에서 그런 사람들을 본 이상재는 “요즘 웬일인지 상놈도 많고 미친놈도 많다. 일본 말 좀 할 줄 아는 사람들은 스스로 김상놈(긴상)·박상놈(복상) 하더니 미국 풍조가 들어와서 어떤 사람들은 미쳤다 김(Mr. Kim)·미쳤다 박(Mr. Park) 하니까 말이지!”라고 꼬집었다.

그는, 대한제국이 신문물 도입을 거부하고 외국과의 교류를 게을리한 것이 멸망 요인 중 하나라고 지적한 개화파였다. 하지만 우리 고유의 호칭을 두고 무턱대고 일본인이나 미국인 흉내를 내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상재는 험난하고 살벌한 시절, 해학과 유머로 사회를 따뜻하게 만들기도 하고 날카로운 풍자와 기지 넘치는 경구로 부당한 현실에 저항한 흔치 않은 인물이었다. 알맹이 없는 직설과 천박한 돌직구가 난무하는 요즘, 노오란 봄의 온기를 전하는 개나리꽃을 보면 월남 이상재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리고 그의 당당한 애국심은 물론 넘치는 해학과 유머, 거침없는 풍자 능력이 그리워진다.

[글 황인희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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