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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다리 장애인에게 정상 아내 고맙습니다”

불철주야 헌신봉사 장애인계 대부 정원석 회장(장애인녹색재단)

안효준기자(hja@skyedaily.com)

기사입력 2012-06-18 23: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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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원석 회장
사단법인 한국장애인녹색재단의 정원석(52) 회장은 지체장애 2급 장애인으로 두 다리를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사회복지, 특히 장애인 복지를 위해 그동안 쏟아온 열정은 한 마디 말로 풀어내지 못할 정도로 대단하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그는 장애인은 연예인과 비슷하다고 설명한다. 생활면에서나 사람들의 인식면에서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장애인과 연예인은 지나가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또 결혼하기도 힘들며 취직이 힘들기 때문에 인생 자체가 불안의 연속이죠. 편의시설 이용이나 이동권에 있어서도 제약을 받는 상황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아이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소아마비로 두 다리 사용 못해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00일이 지나면서 소아마비를 앓게 돼 장애가 생겼다. 처음에는 고개도 움직이지 못할 만큼 전신이 마비된 상황이었다. 당시 그의 부모님은 ‘커서 신발이라도 제대로 신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정도로 염려했다고 한다.
 
“아버지께서 미군 부대에 근무하셔서 형편은 어렵지 않았어요. 하지만 어머님이 저를 데리고 전국의 용하다는 병원은 다 찾아다니실 정도로 고생을 많이 하셨죠. 혼자였다면 장애를 이겨낼 수 없었겠지만 가족들이 곁에서 항상 지지해 주었던 덕분에 학교나 사회생활에서 잘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몸은 점차 회복됐지만 목발을 짚어야 생활이 가능해졌다. 어머니는 그를 특수학교에 보내지 않고 일반 학교에 진학시켰다. 오히려 평범한 학생들과 어울리는 것이 그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 비롯된 결정이셨다.
 
그는 많은 선생님들 가운데 초등학교 1학년 담임을 맡으셨던 초부미 선생님이 기억에 남는다고 강조한다. 당시에는 장애인들에 대한 인식이 지금처럼 좋은 시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런 사회적 편견에 아랑곳하지 않고 줄반장을 맡겼다고 한다.
 
“학급 반장은 아니지만 어린 저로서는 직책을 맡았다는 것이 지금까지 제 인생을 살아오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몇 명 되지 않는 친구들이지만 이끌어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저에게 심어주시기 위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족과 선생님, 주위의 친구들의 따뜻한 배려 속에 그는 장애인이란 사실을 잊은 채 학교생활을 했고 지금도 학교 얘기를 하면 기분이 좋아질 정도라고 말한다.
 
고교 졸업 후 사회 진출…사업 실패 겪기도
 
 ▲ 전동휠체어 무료점검센터에서 장애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그는 대학에 진학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밝힌다. 부모님이 입학하라고 권하셨지만 ‘대학을 졸업하면 뭐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사회적으로 장애인들이 공부를 해서 성공했다는 모델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대학을 졸업하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조차 부족했어요. 대학 진학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이죠”
 
돈을 벌면서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해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는 정 회장. 1980년도에는 컴퓨터에 관심을 가지며 코볼 등의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웠다. 이 과정에서 컴퓨터 학원의 상담실장을 하기도 했다.
 
또 레저 관련 회사에 들어가 콘도 이용권을 판매하는 영업 파트에서 일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1995년도에는 환경사업에 뛰어들어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계를 만드는 회사에 투자를 했다. 정책적으로 물기 있는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지 못하게 하는 데서 착안한 사업이었다.
 
“정부 정책이 발표됐지만 현실적으로 제대로 규제가 되지 않았던 탓에 사람들의 수요가 없었고 이에 수 천만원을 투자했던 사업이 실패로 돌아갔죠. 하지만 여러 사업에 뛰어들면서 체득한 경험은 제가 시민운동을 하는 데 굉장한 보탬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결혼 반대, 좌절감 느껴
 
 ▲ 지난 2009년 ‘자랑스러운 한국장애인상’ 중 자립재활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바 있다.

그가 자신이 장애를 가졌다는 사실에 처음 좌절한 것은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는 과정에서였다. 25살 때 처음 만난 아내는 집안에서 유일한 딸이었기 때문에 엄청난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고 한다.
 
“군인 출신인 장인어른은 보훈대상자로, 발가락이 절단돼서 걸을 때 조금 다리를 절으셨어요. 장모님은 그것마저 장애라고 생각할 정도인데 딸이 목발을 짚은 장애인을 데려왔으니 오죽하셨을까요. 첫 대면자리에서 분명하게 반대를 하셨죠”
 
정 회장은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지만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아내의 집안에서는 그와의 교제를 막기 위해 딸에게 직장도 그만두게 하면서까지 외출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그는 어린 나이에 변변한 직업이나 특출난 기술도 없었기 때문에 일정한 봉급을 받는 형편이 아니었다. 모든 상황은 그를 방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아내는 반대를 무릅쓰고 저를 선택한다고 이야기를 해줬어요. 그리고 집을 나와 둘이 살림을 차리게 됐죠. 큰 딸이 6살 되던 해에 결혼식을 올렸지만 그 때도 장인, 장모님은 참석하지 않으셨습니다”
 
수많은 시민운동 단체에서 활동
 
 ▲ 정 회장은 다방면의 시민운동을 통해 사회 발전에 이바지해 왔다. 특히 잘못된 국가 정책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비판을 서슴치 않을 만큼 열정적으로 사회 복지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사업을 하면서도 봉사활동과 시민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그가 과거에 활동했던 내역을 살펴보면 광범위한 분야에서 사회를 위해 헌신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자원봉사 모임 ‘한울회’ 초대회장을 시작으로 ‘사랑의 메아리 합창단’ 활동, ‘환경과 복지를 생각하는 시민의 모임’ 부위원장, ‘국제기형아 예방협회’ 창립 및 이사, ‘흥사단 청소년 유해환경 감시를 위한 시민의 모임’ 운영위원 등을 역임했다.
 
특히 1998년에는 전국 180여개 시민단체들이 모인 ‘전국시민단체연합’ 기획분과위원장을 맡게 됐고, 1999년에는 ‘국민화합을 위한 만화 한마당 전국대회’를 기획해 성공적으로 행사를 진행시켰다.
 
이외에도 ‘서울NGO 세계대회’ 조직위원회 자문위원, ‘농업 및 환경과 생명을 위한 WTO협상범국민연대’ 준비위 공동대표, ‘칭찬의 전화’ 공동대표 등 그의 이력은 다 나열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다.
 
“시민운동을 하면서 느꼈던 것 중에 하나가 장애계 내에서 서로 반목하고 다툼이 있다는 사실이었어요. 힘을 합칠 수 있도록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장애인유권자 운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했고, 1999년도에 ‘한국장애인유권자연맹’을 조직하게 됐습니다”
 
장애인들을 위해 노력하면서 그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기념해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이 함께 참여하는 ‘사랑의 이어달리기’를 추진했다. 서울시청에서 출발해 25개 자치구청을 순회하는 것으로 참여인원 또한 2002명이었다.
 
불혹의 나이, 장애인 복지발전에 전념
 
 ▲ 지난 2월 숭실대 사회복지대학원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사진은 학위수여식 당시 모습.

그가 본격적으로 장애인을 위해 일하게 된 것은 ‘장애인 직업재활시설’을 맡게 되면서부터다. 다양한 시민운동을 해왔지만 시설을 운영하려면 전적으로 신경을 써야했기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다.
 
“당시 나이가 40이 넘어서 너무 늦은 나이이지 않나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해왔던 활동을 바탕으로 장애인들의 생활환경이 좀 더 나아질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다는 의지로 전력을 다해 왔어요”
 
시설에는 마침 인쇄기가 있었기 때문에 인쇄업을 시작했고 남성 장애인보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던 여성들을 위해 봉제업도 함께 했다. 말하자면 장애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립하는 일을 돕는 중요한 일이었다.
 
특히 그는 ‘한국장애인 직업재활시설협회’ 초대 서울회장으로 추대된 후, 2007년 서울시가 5억원을 들여 직업재활 지원센터를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 센터장과 종사자들의 교육을 진행했다.
 
장애인들을 위한 보호시설 운영에도 적극적이었다. 장애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주간보호센터와 여성전용단기보호시설 등을 운영해 편의를 돕고 있다.
 
“장애인들을 보살피는 부모들은 관절염이나 디스크 발병이 많습니다. 수술을 해야한다던가 가족이 병에 걸려 입원해야 하는 경우 긴박한 상황에서 장애인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시설 마련이 시급했죠. 특히 성추행과 같은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여성전용 시설도 필요했어요”
 
장애인들의 복지를 위해 일하면서 전문적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 그는 2003년도에 사이버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후 50세에 숭실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을 입학, 올해 2월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게다가 사회복지사를 비롯해 보육교사,요양보호사, 노인교육사, 심리상담사, 성폭력 전문상담원, 가정폭력 전문상담원 등 11개 자격을 취득하는 등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장애인들 간 세계적 네트워크 형성하고 싶다”
 
 ▲ 전 세계를 아울러 환경오염이 심각해짐에 따라 알 수 없는 이유로 장애를 입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이에 지난해 8월 ‘한국장애인녹색재단’을 설립하고 환경 문제에 관심을 촉구하고 나섰다.

지난해 8월 환경부의 승인을 받아 ‘한국장애인녹색재단’을 설립하고 환경 운동에도 힘쓰고 있는 정 회장.
 
“지난해 정전이 되면서 산소호흡기가 멈췄던 탓에 장애인 한 분이 돌아가신 일이 발생했습니다. 자연재해를 비롯해 각종 재난에서 장애인은 제 1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요. 또 환경요인으로 인해 우리가 모르는 질병으로 장애가 발생되는 경우가 있어 이를 개선하고자 단체를 만들게 됐죠”
 
최근에는 강의 요청도 많이 들어와 전국을 다니고 있다. 그야말로 1인 10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는 그는 몸살에 걸려도 아플 시간조차 모자란다. 지난해에는 장애인들과 함께 여름 해변캠프를 다녀오던 중 사고를 당해 어깨 인대가 끊어지는 일도 있었다고.
 
“현재 15개의 단체에 속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 역량이 된다면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 당연히 찾아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쉬는 만큼 다른 장애인들이 피해를 본다는 생각이죠”
 
시민운동은 일이 굉장히 많지만 수익을 창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정 회장은 자신의 돈을 들이기 일쑤였다고 한다.
 
“집에는 고정적인 월급을 갖다 주지 못했습니다. 아내가 화장품 대리점 운영이나 보험영업을 하는 등 돈을 벌어 아이들을 키웠죠. 제가 못하는 가장 역할을 대신 한 것입니다. 아내가 저를 이해해 주고 지지를 해 줬기 때문에 지금까지 활동을 할 수 있었어요.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이미 한민족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 있는 만큼 정 회장은 향후 장애인 복지와 관련해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다. 특히 장애인들을 위한 특화사업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 첫째 목표라고 한다.
 
“돈이 되는 사업은 비장애인들이 쥐고 있습니다. 장애인들도 특화사업을 통해 생산적인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인식을 개선하고 싶어요. 1%의 희망만 있다면 포기하지 말고 그것을 향해 달려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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