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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의 인문 책방…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 비판>

코카콜라병, 부시맨이 발견한 신의 선물

경험이 사고를 결정한다…같은 것을 보고 다른 생각을 하는 인간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6-11-06 19:25:57

 
 ▲ 문화평론가 정현. ⓒ스카이데일리
‘부시맨’(1980년)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영화가 시작되는 장면은 이렇다. 미군의 헬기가 아프리카 상공을 비행한다. 목이 마른 헬기 조종사는 코카콜라를 마신 후 빈 병을 아프리카 들판에다 던져 버린다.
 
병이 떨어진 아프리카 초원. 지나가던 현지 아프리카 원주민이 깜짝 놀란 눈으로 콜라병을 바라본다. 부시맨의 머릿속에서는 오만가지 상상이 교차한다. 하늘에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이 떨어졌다. 비도 낙엽도 아닌 단단한 외계 물체가 떨어졌으니, 이건 분명 신이 하늘에서 내린 선물이 아닌가!
 
부시맨은 이내 콜라병을 들고 가족들이 있는 마을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가 한 것은 콜라병을 올려 제사를 지내는 일이다. 부시맨은 마음속으로 비가 잘 오고 먹을 것이 풍족해지길 기원했을 것이다.
 
분명 그의 머릿속에 그 콜라병이 음료를 보관하는 물건이라는 관념은 없었을 것이다. 공장에서 기계를 통해 수천, 수만 개씩 대량생산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을 터. 화폐를 통해 거래된다는 것은 아예 상상 밖의 일이기도 하다.
 
1980년을 즈음한 당시에 코카콜라는 미국의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상품 중 하나였다. 대량생산돼 전 세계로 판매되는 이 상품은 기술의 진보를 일군 서양 문명의 위대함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헬기는 아프리카 ‘오지’와는 층위를 달리하는 문명의 저 높은 곳을 암시했다. 부족들의 일손을 모아 소규모로 생계를 일구어 가던 부시맨에게 이 대량생산 체계의 생산물이 이해될 리 만무하다. 그에게는 자신의 손이 닿는 ‘땅의 세계’와 자신이 가닿을 수 없는 ‘신의 세계’가 존재할 뿐이다. 미국으로 대표된 서양 ‘문명’과 아프리카 ‘오지’의 만남은 그렇게 상징적인 장면으로 시작됐다.
 
인간의 경험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부시맨들이 콜라병을 음료의 용기가 아니라 신의 선물로 인지한 것은 그들의 경험세계가 서구인들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인간의 경험은 그들의 사고를 결정한다. 잠시 과거 학교 교육에서 색상을 지칭하는 말 중 ‘살색’이라는 표현이 있었다는 것을 상기해 보자.
 
살색은 흰색(백인)인가, 검정색(흑인)인가, 살구색(황인)인가. 에덴동산에서 벌거벗은 모습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겠지만 오늘날 벌거벗은 모습은 온라인 공간을 오가는 순간 포르노그라피가 되기도 한다.
 
경험이 사고를 결정한다는 관념에 가장 먼저 천착한 철학자 중 한 명이 18세기 독일의 임마누엘 칸트였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눈앞의 사물을 인간은 얼마나 순수하게 인식할 수 있을까. 혹시 순수한 인식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의 경험방식이 사물 자체의 내용을 변화시키지는 않을까. 사람들마다 ‘살색’이 다르게 이해되듯이 말이다.
 
서구인들은 망원경이 발명되기 전까지 지구가 세계의 중심인 줄 알았다. 항해를 통해 새로운 대륙과 만나기 전까지 인간은 자기가 나고 자란 땅에서 사는 존재였을 뿐, 탐험이나 탐사의 주체가 아니었다.
 
따라서 칸트는 인간이 사물을 그 자체로 순수하게 인식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인간의 인식은 그들의 경험이 이루어지는 방식에 의해 결정된다. 칸트는 두 가지를 구분했다. 하나는 ‘선험적’인 조건이다. 기하학의 세계처럼 인간의 구체적인 경험 영역에 의해 변형되지 않는 추상적인 시공간이 존재한다. 1km 더하기 1km은 2km가 되고, 1시간 더 하기 1시간은 2시간이 되며, 그것은 경험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초월론적’인 것이다. 초월론적인 것이란 인간에게서 초월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 자체를 규정하는 어떤 매트릭스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살구색이 살색으로 인지된다면 그것은 그가 황인종이기 때문일 것이다.
 
악성댓글로 누군가가 고소를 당했다는 것은 그가 온라인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황인종이라는 인종적 배경과 사이버공간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그의 매트릭스, 즉 초월론적인 것이 된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의 사고는 이 초월론적인 것 위에서 형성된다. 그것은 역사적인 것이자 문화적인 것이며, 시간과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 그런데 문제는 각 문화권마다, 혹은 성별과 인종마다 이 매트릭스가 상이하다는 점이다. 모두가 각자의 매트릭스 위에서 자신의 세계를 이해한다면 서로 다른 배경을 갖는 이들은 어떻게 융화해야 할까.
 
최근 온라인 공간을 토대로 여성혐오 논쟁이 뜨겁게 불타올랐던 바 있다. 강남역에서 무고한 여성이 살해됐을 때 그 여성의 살해 동기는 여성혐오인가 아닌가. 한 온라인 게임의 성우가 여성혐오를 미러링하는 사이트를 사용했을 때 그 성우는 남성혐오자인가 아닌가.
 
부시맨이 콜라병을 발견하듯 두 개의 서로 다른 세 개가 온라인에서 만나며 불타올랐다. 그들은 일상에서 수없이 마주치는 이들이지만 서로 너무나 다른 생각을 했다. 그들의 경험이 이루어지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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