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데일리 단독기사

 지하철로 보는 상권|빌딩|재건축 뉴스

뒤로 리스트 인쇄
news only email오류보내기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톡

위대한 정복군주 광개토호태왕의 전공들

위로는 후연·연을 정복하고 아래로는 백제·왜까지…20년 영토확장의 기록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7-04-16 20:57:06

 ▲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스카이데일리
374년에 소수림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담덕은 386년(고국양제 3년)에 정윤에 올랐다가, 391년 18세의 나이로 숙부 고국양제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르면서 영락(永樂)을 연호로 평안(平安)을 휘호로 한다. 호태왕은 재위기간 내내 정복사업을 펼쳐 당시 사해(四海)를 평정해 군림하는 위대한 정복군주가 된다. 춘추 39세의 젊은 나이로 단명했던 호태왕의 찬란했던 공적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본다.
 
◈ 영락 2년(392) 임진년
① 7월에 호태왕은 친히 4만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를 정벌해 석현(石峴)성에서 적장 진가모를 참수하고 네 길로 나누어서 그들의 성과 성채 12개를 빼앗는다. 진가모는 당시 백제의 최고 권력자인 가리왕후의 오라버니로, 그는 여동생의 힘을 믿고 임금인 진사왕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② 9월에 백제를 공격하던 군대를 옮겨 거란을 공격해 남녀 3500명을 사로잡았고, 거란에 있던 고구리 유민과 잡혀갔던 만여명도 데리고 돌아오니 백성들 모두가 머리에 수유(茱萸)나무 가지를 꽂고 축하했다.
 
③ 10월에 호태왕은 수군과 육군을 일곱 길로 나눠 관미성(関彌城)을 20일 동안 주야로 쉴 새 없이 공격해 빼앗았다. 관미성은 사면이 가파르고 험하며 해수(海水)로 둘러싸여 있었기에, 백제 진사(辰斯)왕은 함락되지 않으리라 여겼다. 이에 진사왕은 왕후 가리(佳利)와 함께 구원(狗原)에서 열흘을 사냥하며 호태왕이 물러나길 기다렸다. 진사왕은 관미성의 함락 소식에 놀라자빠지더니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죽는다. 이후 가리왕후는 침류(沈流)왕의 아들 아신(阿莘)을 왕으로 세웠다.
 
 ▲ KBS 드라마 광개토태왕에서 CG로 만든 관미성 모습 [이미지=필자제공]
 
◈ 영락 3년(393) 계사년
④ 7월에 거란(契丹)을 쳐서 천서(川西)를 빼앗았다.
 
⑤ 고구리가 거란을 정벌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백제 아신왕은 고구리의 내부가 비었을 것으로 여겨 8월에 장수 진무(眞武)로 하여금 석현성을 공격하고 관미성을 치게 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진무는 화살처럼 날아오는 돌을 무릅쓰고 몸소 병사들의 진두에 서서 공격했으나 고구리 병사들이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는데다가 군량미가 이어지지 않자 결국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고 한다.
 
◈ 영락 4년(394) 갑오년
➅ 7월에 백제의 장수 진무가 또 쳐들어오니 호태왕이 기병 5천을 수곡성 아래에서 매복시켰다가 맞싸워 백제의 군사 거의 모두를 참살했다. 남은 무리들은 산골짜기에 숨어 있다가 야밤에 달아났다.
 
◈ 영락 5년(395) 을미년
➆ 비리(卑離)가 점차 호태왕의 가르침을 어기기에 2월에 친히 파산(叵山)·부산(冨山)·부산(負山)을 정벌하고 염수(鹽水)까지 이르면서 그들의 부락 700여 곳을 깨뜨렸고, 노획한 소·말·양·돼지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호태왕 비문에 있음)
 
➇ 8월, 호태왕이 비려를 정벌하고 있는 사이 백제의 장수 진무가 또 빈틈을 노려 쳐들어왔다. 이에 호태왕이 기병 7천을 휘몰아가서 패수(浿水) 북쪽에서 싸워 8천여 수급을 베었다. 패수는 황하북부 하남성 제원시를 흐르는 강이다.
 
➈ 11월에 백제 아신왕이 패수에서의 치욕를 씻기 위해 7천의 병력으로 한수(漢水)를 건너 청목령에 이르렀다가, 큰 눈이 내려 많은 병사가 얼어 죽자 군사를 돌려 한성(漢城)으로 돌아가 군사들을 위로했다.
 
 ▲ 패수는 황하북부 하남성·제원시를 흐르는 강이다 [이미지=필자제공]
 
◈ 영락 6년(396) 병신년
➉ 3월에 호태왕은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토벌했다. 군사들이 중심부까지 진군했는데도 도성을 지키는 적들이 굴복하지 않고 감히 나와 백전을 불사했다. 이를 본 호태왕이 크게 노해 압록수를 건너 군사를 성에 접근시켜 마구 공격하니 적들이 급히 퇴각했다. 호태왕이 도성을 포위하자 백제 아신왕은 곤핍해져 남녀 1000인과 세포 1000필을 내어 바치면서 호태왕에게 무릎을 꿇고 이후로는 영원한 종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58성과 700촌을 빼앗았고, 백제왕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볼모로 데리고 군대를 이끌고 도성으로 개선했다. (호태왕 비문에 있음)
 
 ▲ MBC 드라마 태왕사신기에서 백제 아신왕이 호태왕에게 항복하는 장면 [이미지=필자제공]
 
◈ 영락 8년(398) 무술년
⑪ 3월에 호태왕은 별동대를 파견해 백신(숙신, 북맥)의 땅과 골짜기를 살살피다가 기습하라 하교해 막사(莫斯)국과 가태(加太)국을 초략했더니, 남녀 300인이 소와 양으로 세공을 바치기로 약속했다. (호태왕 비문에 있음)
 
◈ 영락 9년(399) 기해년
⑫ 백잔(百殘·백제를 낮춰 부르는 말)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서로 내통했다. 5월에 왜가 신라의 변방을 침범하니 다급해진 신라왕이 하모(霞帽)를 통해 호태왕에게 “왜인들이 국경에 가득 차있고, 성과 해자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노객(종=신라왕)은 백성이 되기로 태왕께로 귀의했사오니 명을 청하나이다”고 하며 군대를 보내 구해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호태왕은 신라왕의 충성을 거듭 칭송하며 은혜를 베풀었고, 신라 사신에게 돌아가서 병력출동을 윤허했음을 특별히 전하라고 했다. 호태왕은 서구에게 명해 5000기병을 보내려고 했는데, 신라 내물왕이 다시 사신을 보내와 왜가 이미 물러갔다고 알렸다.
 
◈ 영락 10년(400) 경자년
⑬ 2월에 후연의 모용성(慕容盛)이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신성(新城)으로 쳐들어오고 선봉 모용희(熙)가 우회해 남소(南蘇)성으로 들어왔다. 이에 호태왕은 정예기병 8000을 이끌고 곡림(鵠林)에서 모용희를 쳐서 대파하고 붕련(朋連)과 룡신(龍臣)이 신성에서 큰 싸움을 벌이고 추격하여 황하변에서 참살하고 빼앗은 것이 무수히 많았다. 호태왕은 장무(章武) 서쪽을 쳐서 700여리의 땅을 넓혔으며, 5000여호를 옮겨놓고서 돌아왔다.
 
⑭ 이어 왜가 신라에 침입했다는 보고를 받은 호태왕은 서구와 해성에게 보·기병 5만을 이끌고 가서 신라를 구원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남거성에서부터 신라성까지 왜병들이 성 가운데에 가득했는데 고구리군이 도착하니 왜적들이 모두 도망쳤다. 고구리군은 신라를 따라 바짝 추격해 임나가라에 이르기까지 배후에서 급박하게 신라성과 염성을 공격하니 왜구가 모두 패해 달아났다. 성을 크게 정비하고 우리가 공격해 남김없이 쓸어 없애자 왜가 드디어 나라를 들어 항복해왔으며, 죽은 자가 열에 여덟아홉이요 남은 신하들을 데리고 오매 신라인으로 수비병을 세웠다. (호태왕 비문에 있음)
 
왜는 겉으론 안 그런 척 하면서 마음을 바꿔먹고 감히 싸우려고 훼, 기탄, 탁순의 여러 도적들과 다시 일어나려고 모의했다. 관병이 먼저 이를 제압하고자 탁순을 아우르고 좌군은 담로도를 거쳐 단마에 이르고, 우군은 난파를 지나서 무장에 이르자 왕께서 직접 배로 축사로 건너시니 모든 도적들이 죄다 스스로 무너졌다. 이를 나누어 군국(식민지)을 만드니 임나(任那)·안라(安羅)·가락(加洛) 등 모두가 사신을 보내 입조했다. 이로써 남방이 모두 평정됐다.
 
 ▲ 호태왕의 일본 정벌은 원폭을 투하한 미국(호태왕)에게 무조건 항복한 일본(왜)에 비유할 수 있다. [이미지=필자제공]
 
◈ 영락 12년(402) 임인년
⑮ 4월에 호태왕은 붕련·룡신·서구 등으로 하여금 거란을 정벌하고는 그 임금 오귀를 사로잡고 구려성과 대극성 등을 빼앗았다. 내친김에 연나라 모용귀(歸)를 숙군성에서 쳐서 그 선봉을 참했더니, 단개귀와 모용희가 성을 버리고 서쪽으로 도망쳐 요수(遼隧)를 지켰다. 이로써 요동(遼東)이 모두 평정됐다.
 
※ 9월에 동명대제(東明大祭)를 거행했다. 왜·신라·진(秦)·연(燕)·진(晉)·맥(㹮)·백제·가야의 여덟 나라 여인들이 춤사위를 올리고 곡을 불어 바쳤다. 나라가 있어 온 이래 처음으로 있었던 성대한 의식이었다. 호태왕이 왜의 사자에게 이르길 “너희 나라는 멀리 물 가운데 있으면서도 성심으로 공물을 가져오길 백년이 지났음에도 한 점 변함이 없었으니 충성스럽다 할 것이며, 오늘 춤사위 밟는 것으로 보아 너희 나라 풍속도 알 만하다. 돌아가거든 너희 왕에게 일러서 후궁에 딸을 바치고 아들을 보내와서 학문하게 하며, 영원한 신민이 돼서 너희나라에 널리 짐의 교화가 미치게 하라”고 했다.
 
◈ 영락 14년(404) 갑진년
⑯ 5월에 룡성(龍城=후연)이 반란했다기에 붕련에게 명해 토벌하려 했으나 모용희가 죽기로 지켜 빼앗지 못했다.
 
⑰ 이때 왜가 대방(帶方)을 침입했기에 붕련이 군사를 움직여 왜선을 공격해 목을 베고 사로잡은 수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들은 해적의 무리들이었고 왜왕 인덕(仁德)이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인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매, 호태왕은 서구를 왜로 보내 그 진상을 알아보도록 했다. (※ 만일 왜가 속국이 아니었다면 이런 행위를 할 수 없다.) 
 
◈ 영락 15년(405) 을사년
⑱ 정월에 후연의 모용희가 자기 처와 함께 장무(章武)성을 침입하러 왔다가 대패하고 물러갔다. 성이 함락될 즈음에 모용희가 장병들에게  “성에 먼저 오르지 말라. 성이 평정되면 내가 황후와 함께 가마를 타고 들어가리라.”라고 명령함으로 인해 성 안에서 대비를 철저히 할 수 있었기에 그들은 끝내 성을 빼앗지 못하고 물러갔다.
 
◈ 영락 16년(406) 병오년
⑲ 12월에 후연의 모용희가 거란을 습격하고 형북(陘北)에 이르더니 군병을 몰래 움직여 우회해 고구리로 들어와 목저(木底)성을 치다가 크게 패하고 물러갔다.
 
 ▲ KBS 드라마 광개토태왕에서 호태왕에게 무릎 꿇은 고운과 풍발 [이미지=필자제공]
 
◈ 영락 17년(407) 정미년
⑳ 2월에 호태왕은 붕련과 해성에게 명해 5만병을 이끌고 나가 모용희를 치라 했다. 장무성 서쪽에서 모용희와 싸워 모조리 죽여 쓸어내고, 개갑 만 벌을 노획했으며 군수물자 및 무기류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사구(沙溝)성 등 여섯 성을 빼앗았다. 풍발(馮跋)과 고운(高雲)이 모용희를 죽이고 찾아와 용서를 빌고 조공하겠다고 약속했다.
 
◈ 영락 20년(410) 경술년
㉑ 정월에 풍발(馮跋) 정벌을 의논하던 중에 동부여(東扶餘)가 반란했다. 이에 그 보답으로 부여(夫餘)성을 토벌하고는 그 왕 은보처(恩普処)를 붙잡아서 돌아왔다. 64성 1400여 촌락 우두머리 모두를 다른 이들로 갈아치웠고 이 일로 풍발을 치는 일을 멈췄다.

<저작권자 ⓒ스카이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뒤로 리스트 인쇄
email오류보내기 트위터 페이스북 밴드 카카오톡
독자의견 총 0건의 댓글이 있습니다.
등록하기

스카이 사람들

more
“정치가 아닌 국가를 위하는 게 진정한 보수죠”
“진정으로 애국하는 깨어있는 시민 중요…보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