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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식의 대고구리

천하역적의 비문에서 밝혀진 환단고기의 진실성

<태백일사>에 나온 연개소문 이야기, 아들 남생 묘비명에도 명시돼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8-08-25 21:19:00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일제식민사학을 그대로 계승한 강단사학계는 자신들의 이론에 큰 장애가 되는 <환단고기>를 어불성설의 트집을 잡아 위서로 규정하고 있다. 환단고기에서 인용한 사서는 거의 현존하지 않거나 책이름만 남아있다면서 환단고기는 책이름만 도용한 위작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식민사학과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환단고기>의 핵심인 <태백일사>는 이맥 선생이 썼다. 발문(跋文)에는 이렇런 내용이 적혀있다. “갑자년(1506, 연산군 10)에 내가 괴산으로 유배를 가서 근신하고 있었기에 너무나 무료했다. 이에 고성 이씨 집안에 보관되어 있던 오래된 상자를 열어서 읽어보니 역사와 전기에 근거로 삼을만한 것이 있었고 또 평소에 노인들에게 들은 것을 함께 채록한 것이 있는데 책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그 후 16년이 지난 경진년(1520, 중종 15)에 내가 찬수관이 되었기에 궁궐 내 전각에서 비밀리에 보관되어 있던 책들을 많이 구해서 읽을 수 있었다. 이에 이전 원고를 순서대로 편집해 <태백일사>라 이름 붙였다. 하지만 감히 세상에 내지 못하고 비밀리에 소장하고는 문밖에 내놓지 않은 것이다. 일십당 주인이 쓰노라
 
이맥 선생의 발문에 따르면 조선 세조부터 성종 때까지 고서적 소지자는 참형에 처한다는 수서령에도 불구하고 고성이씨 가문은 목숨을 걸고 고서적들을 보관해왔으며, 민간에서 거둬들인 고서적들은 궁궐의 내각에 보관되었다가 일제가 조선을 점령하자 고서적들 중 중요한 책은 일본 궁내청 등으로 옮겨졌고 나머지 20만권은 불살라진 것으로 보인다.
 
▲ 조선일보 1985년 10월 4일에 나온 기사 [사진=필자 제공]
 
그러므로
<태백일사>의 내용은 그 당시 수서령으로 거둬들여 보관되어있던 책에서 인용한 문장들로 편집되었음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상황이 이러하거늘 원본 책이 나중에 없어졌다는 이유로 그 원본의 내용을 미리 그대로 인용한 <태백일사>를 위서로 규정해 그 내용 전체를 전면 부정하려는 것은 그야말로 억지 중에 억지라고 하겠다.
 
연남생 묘비가 밝혀준 환단고기의 진실성
 
<태백일사>가 위서가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하나 소개하겠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는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해 연개소문의 성은 연()씨이고 일명 개금(蓋金)이라고 한다. 선조는 봉성(鳳城) 사람으로 아버지는 태조(太祚)라 하고, 할아버지는 자유(子游)라 하고, 증조부는 광()이라 했는데 나란히 막리지를 지냈다. 영양제의 홍무(弘武) 14(603) 510일 태어났고, 나이 9살에 조의선인에 뽑혔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연개소문의 성을 천()씨라 하고, 조상들의 이름은 아예 언급되어 있지도 않다. 연개소문의 성씨 연()이 천()이 된 이유는 피휘(避諱) 즉 당나라 고조 이연(李淵)의 이름과 같은 글자 사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삼국사기>는 중화모화사대사상에 중독된 사서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1921년 낙양 북망산에서 발견된 연개소문의 맏아들 남생의 묘비명에 공의 성은 천()이며 이름은 남생(男生)이고 자는 원덕(元德)으로서, 요동군 평양성 사람이다. (중략) 증조부는 자유(子遊)이며, 조부는 태조(太祚)로서 다 막리지를 역임했고, 아버지 개금(蓋金)은 태대대로였는데, 조부와 아버지가 쇠를 잘 부리고 활을 잘 쏘아 군권을 아울러 쥐고 모두 나라의 권세를 오로지 하였다는 문구가 있어 <태백일사>의 기록이 옳다는 것이 입증됐다
 
▲ 드라마 연개소문에서 당나라의 선봉에 서서 조국을 치러가는 천하의 역적 연남생 부자 [사진=필자 제공]
 
연개소문의 부친 연태조는 누구일까. 수나라를 세운 양견은 복수를 위해 영주총관 위충을 요서(遼西)에 몰래 파견해 고구려의 관가를 부수고 읍락을 불 지르고 노략질했다. 이에 홍무 9(598)에 영양대제는 서부대인 연태조(淵太祚)를 보내 등주(登州)를 토벌하고 총관 위충을 잡아 죽이니 이에 산동지방이 다시 평정되고 해역은 조용해졌다.
 
같은해 양견이 왕세적 등 30만 군사를 파견해 싸우려고 했으나 겨우 정주를 출발해 요택에도 미처 이르지 못했음에도 물난리를 만나 식량은 떨어져 배고픔은 심하고 전염병마저 크게 돌았다.
 
 주라후의 수군이 동래(東萊)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성으로 오다가 풍랑을 만나 선박 대부분이 깨지고 침몰하니 가을 9월에 돌아갔는데 수나라 병사 80~90%가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연개소문의 부친 연태조는 바로 영주총관 위충을 죽인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과연 이렇듯 부친과 조부와 증조부 이름까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책을 감히 위서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할 말이 없게 된 강단사학계는 그렇기 때문에 <환단고기>는 적어도 1921년도 이후에 연남생의 묘비명이 발견된 이후에나 쓴 책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어불성설의 주장은 정상적인 초등학생에게 하라고 해도 하지 않을 그야말로 억지 수준인 것이다.
 
연남생 묘비명이 밝혀준 고구려의 영토
 
또한 묘지명의 내용 중 일찍 죽음에 갑작스럽기가 아침이슬보다 앞서니 그 죽음을 말함에 천자의 슬픔이 진실로 깊어, 마땅히 (그에게) 연솔(連率)의 반차(班次)를 더하여 추숭(追崇)의 모범을 삼노라. 가히 사지절대도독(使持節大都督), (((()4주제군사(四州諸軍事), 병주자사(幷州刺史)를 추증하며, 나머지 관직은 예전과 같이 할 것이다.”라는 문구가 있다
  
▲ 남생의 추증지역 산서성은 고구려의 강역으 볼 수 있다. [사진=필자 제공]
 
 
추증이란 당나라 조정에 지대한 업적을 세운 공신에게 생전에 식읍지역을 다스리는 벼슬을 사후에 하사하는 것이다. 당왕이 요동군 평양성 출신 연남생에게 추증한 병(((()4주는 산서성 남부로 이는 분명 고구려의 영토였다.
 
 만일 남생이 강단사학계가 고구려의 도읍이라는 지금의 대동강 평양 출신이었다면 굳이 죽은 남생에게 고구려와 아무 상관없는 산서성 남부를 다스리는 벼슬을 추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당(上黨)군이 속했던 병주는 산서성 동남부(장치시) 일대 아래로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 의하면 기()는 현 산서성 포현 일대, ()은 기()의 부쪽이고, ()은 태원 서쪽에 그려져 있다. 이 땅들은 원래 고구려의 영토였으나 역적 발기가 공손씨에게 넘겨주었다가 광개토태왕 이후 다시 고구려의 강역이 되었다.
 
 참고로 평양성은 임분시이고 압록수는 분하이다. 그렇게 비정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요서군의 상징인 백이숙제의 무덤이고, 낙랑군에 속한 패수의 우치가 명백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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