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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 어디까지 하고 있나91

중원 대륙 정복하고 지배한 기마민족의 공헌

잃어버린 역사의 복원 시급, 잠자는 사학계 분발해야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8-12-01 14:35:54

▲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역사를 존중하는 것은 그 민족과 국가의 활로를 개척하는데 있다고 본다. 그리고 역사는 사실을 사실대로 다뤄야 진정한 역사다. 거짓의 허구인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 따라서 역사는 과학적으로 다루어 진 역사가 올바른 역사이다. 거짓으로 조작된 왜곡된 역사는 역사라 할 수 없다.
 
오늘의 21세기는 거짓이 통용되는 사회가 아니다. 우리나라 역사는 천체(天體)의 관측과 홍수와 지진(地震) 등 자연현상에서도 그 진실이 다 판명되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도 사실을 숨기고 왜곡된 역사를 역사라 하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과연 이 사람들이 21세기의 사람들인가 의문이 간다.
 
역사를 위조하여 사대주의 역사로 국민의 열등의식과 패배의식을 조장하는 이단적인자가 교육의 행정자리를 잡고 있는 한 우리의 진정한 활로를 개척할 수 없다. 중국과 일본 사가들이 한국사를 패배와 수치의 역사로 왜곡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정신나간 자들이 아닌가!
 
우리나라 역사를 사대주의 역사로 만든 장본인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쓴 김일연(金一然)과 신채호(申采浩) 두 사람이 우리의 대륙역사를 반도에 맞추도록 조작된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이 김일연(金一然)과 신채호(申采浩)선생은 삼국사46과 중국의 남제서(南齊書)()58의 사실조차 제대로 연구해 다루지도 않았다. 김일연은 불교승(佛敎僧)이니 그렇다고 치고,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사학자로서 자주독립의 민족사를 찾아내려고 한다고 하였으나 그분의 역사는 사관(史觀)이 없고 생명력(生命力)을 잃은 위조된, 진실을 다루지 않은 역사이기에 아쉽다.
 
신채호 선생은 우리의 대륙역사를 동과 서를 바꿔서라도 반도 안에 맞추도록진실의 역사를 왜곡되게 하여 우리 역사가 대륙역사임에도 반도 안에 가둬 역사를 망치게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최치원의 상대상시중상(上大師侍中狀)고운집 제1장에 나와 있는 글들을 보지도 않고 우리 역사를 반도 안에 가두는데 1928년경 조선일보에 삼국사기 동서(東西兩地相換考證)의 우리 역사를 연재하면서 우리나라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주입하여 엄청난 피해를 가져 왔다.
 
이는 우리나라 역사를 근본적으로 그르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결과 강단학파의 사람들은 이 김일연, 신채호 두 사람의 반도사를 그대로 답습함으로 우리 역사는 거꾸로 뒤집혀져 있다.
 
오늘은 중국 역사에 다루지 않은 고대에 대륙에서 벌어진 중국의 면면과 우리 고대 민족역사 특히 기마민족(騎馬民族)의 공헌(貢獻) 등 인류사에 크게 기여한 역사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중원대륙 지배한 우리의 고대 역사 사실 밝혀야
 
우리 고대사(古代史) 동사강목(東史綱目), 규원사화(閨怨史話), 후한서동이전, 사기하본기(夏本紀), 사기주본기(周本紀), 춘추전국책(春秋戰國策), 사기흉노전(史記匈奴傳)은 고대사만 다루고 있다. 단군왕검은 서기전 2333년에 만주 송화강 유역에 단군조선(檀君朝鮮)을 세운다.
 
단군조선은 많은 제후국(諸侯國)100여국을 두었는데 그 중 진번(眞番)도 제후국의 하나였다. 이 단군조선의 진번후(眞番侯)가 서기전 2319년 하()를 공격하고, 서기전 1762년 현이(玄夷)의 후예(後裔) 상계(商契)14세손(世孫) ()이 하남(河南)에 은()을 세웠다.
 
그리고 서기전 1342년 단군조선 국도(國都)를 요동반도로 옮긴다. 서기전 1293년 단군조선의 남후(藍候)가 난하(灤河) 유역에 진출해서 암독홀(庵瀆忽;후에 위만조선의 왕검성(王儉城))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또 단군조선의 남후(藍候)와 구려후(句麗候)가 은()을 공격해서 대(;산동성~();하남성(河南省)지방에 진출했다고 하고 있다.
 
서기전 1192년 산동성의 곡부(曲阜) 지방에는 암국(奄國)을 건국하고 하남지방에 서국(徐國)을 건설하고, 1117년 주무왕이 은()을 토멸해서 주()를 세운다. 서기전 1114년 성왕(成王) 때에는 주공단(周公旦)의 자() 백금(白禽)이 암국(奄國)을 토멸해서 노()를 신설(新設)한다.
 
또 같은 해 산서성(山西省) 지방에 소공석(召公奭)의 연()을 설치하고 같은 해 제남지방에 태공망(太公望) 강여상(姜呂尙)이 제()를 설치하고 합서성(陜西省) 지방에 응한(應韓)()’을 설치한다. 또 서기전 1026년 주()나라의 목왕(穆王)이 서국(徐國)을 토멸(討滅)한다고 했다.
 
그리고 서기전 724년 춘추시대(春秋時代)를 맞이한다. 하남(河南산동(山東하북(河北)지방에 조선족의 세력이 강성화(强盛化)한다. ()의 환공(桓公)이 산동성(山東省) 지방에 있어서 조선족의 국가인 수(((() 등을 토멸했다고 하였다.
 
또 하북성(河北省) 지방에 있어서 영지(令支고죽(孤竹산융(山戎:번조선(番朝鮮)을 제압한다.서기전 280년 연()의 역왕(易王) 때 장군 진개(秦開)를 파견해서 번조선(番朝鮮)을 토멸(討滅)하고 기타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동(遼東), 요서오군(遼西五郡)을 설치한다.
 
유라시아를 정벌하고 정복하여 지배해온 우리 민족(民族)은 중국과 일본이 말하는 흉노(匈奴);예맥·선비(鮮卑유연(柔然돌궐(突厥견융(犬戎위굴(回鶻토번(吐藩) 등 유목 민족으로 서기전 3세기~9세기 중엽까지 약 1200년간 강대한 왕국을 대륙에 건설하였음을 숨길 수 없다. (以上, 文定昌, ‘韓國史延長-, ‘古代日本史’. 393~396參照, 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예맥은 1000년 이상 대륙을 지배하였는데 그 배경을 보면 유라시아 대륙의 우리 민족은 고대부터 전차와 하차(荷車)를 사용하고 또 사람과 짐을 운반하기 위해서 말이나 소 등 가축을 이용했다.
 
거칠지 않고 힘이 센 소와 말을 주로 쓰는데 수소()인 경우는 거세(去勢)를 하여 물자를 운반하는 군()과 일상생활을 했다. 특히 소와 말은 농사에도 이용하며 대륙을 지배하였다. 여기에 동이족이면서 소위 한족왕조(漢族王朝)인 은()과 주()에 큰 위협이 되었다고 했다.
 
이 은()과 주()는 기마민족(騎馬民族)인 강족(羌族)과 견융(犬戎)의 압박을 받아 도읍을 호경(鎬京)으로부터 낙읍(洛邑;오늘의 낙양(洛陽)에 옮긴 것은 그 위협 때문이었다. 그 당시 철기(鐵騎), (;쇠뇌) 등 앞선 무기를 사용하는 기마민족(騎馬民族)을 당할 수 없음에서 였다.
 
()도 동이족이 세운 나라로 서기전 1600년경 부족국가의 연합체로서 화북일대(華北一帶)를 지배했으나 은()의 수도가 시조(始祖)로부터 11대 탕왕(湯王)에 이르기까지 8, 탕왕(湯王)으로부터 19대인 반경(盤庚)대까지 5회나 천도(遷都)한 것은 이를 말해주는 것이다.
 
()의 뒤를 이은 주()는 서기전 770년에 견융(犬戎)의 침공으로 호경(鎬京)을 버리고 수도를 동쪽의 낙읍(洛邑;낙양(洛陽)에 옮겼다. 그래서 호경(鎬京)에서 약 330년 간을 칭해서 서주(西周)라 말하고 서기전 256, ()에 멸망하기까지의 514년 간을 동주(東周)로 부른다.
 
()는 동서를 합쳐서 800년 이상 계속된 것이 되나, 이것은 중국 역대왕조(歷代王朝) (((((((((((((() 중에서, 최장(最長)이고 두 번째의 한(),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을 합쳐도 약 400년 간으로 봐도 두드러진 것이다.
 
더욱이 10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는 1000년간은 북아시아와 우리에게 자랑할 만한 정복왕조인 요(;거란족(契丹族), (;몽골족), 그리고 청(;만주족(滿洲族)이 대륙에 침입해 와서 흥망을 거듭했다. 특히 예맥은 1000년 이상 대륙을 지배하였는데 이 역사도 지워져서 없다.
 
이 기간 이 북방민족은 대륙에 이질(異質)의 유목(遊牧), 수렵문화권(狩獵文化圈)을 형성했다. 그것은 북아시아문화(北亞細亞文化)라고 할 수 있는 이동(移動), 이주문화(移住文化)를 구축해서 중국 문화에 자극을 주는데 여기서 유목민족으로부터 기마전술과 병법을 익히게 된다.
 
기마민족(騎馬民族)의 공헌(貢獻)은 무엇인가
 
중국에 있어서 기마민족(騎馬民族)이 한족사회(漢族社會)에 기여(寄與)한 공헌(貢獻)을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은 거의 모든 중국 역대(歷代) 왕조말기(王朝末期)에 조정(朝廷) 내의 관료(官僚)에 의해서 관위(官位)나 재산이 독점(獨占)되어 귀족(貴族)도 세습(世襲)되고, 하층계급에서는 농노적지위(農奴的地位)가 고정화(固定化)되는 등, 사회전체가 경직화(硬直化) 되어 있었다.
 
여기에 기마민족이 이러한 체제(體制)를 타파하고 신체제(新體制)를 성립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3세기 삼국시대 말기 북방 기마민족인 강족(羌族)과 티베트족이 대거해서 대륙으로 이동하여 소위 오호십육국시대(五胡十六國時代)4세기~5세기 경에 현출(現出)시킨다.
 
이로 인하여 지금까지 한민족(漢民族)이라는 인종을 거의 절멸(絶滅)시켜 이민족(異民族)과의 혼혈에 의해서 새로운 한족을 출현시킨 것은 특필 할 일로서 이것이 첫째 공헌이다. 따라서 수()(581~619)부터 현재의 중국인은 신종(新種)이라 말 할 수 있는 한족(漢族)인 것이다.
 
또한 주변 이민족(異民族)에 두 번째 공헌은 특히 유목민족인 흉노(匈奴;예맥)로 대표되는 기마전술(騎馬戰術)’이 한족(漢族)에게 전하여 진 것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중국에서는 춘추시대(春秋時代;서기전 770~서기전 403)에는 기마민족이 가져다 준 농구(農具)의 사용에 의해 농업도 크게 진보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소위 농경민족의 기초가 확립된 것이었다.
 
군대(軍隊)는 전차(戰車)가 이끄는 보병중심의 군대가 전장(戰場)을 질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흉노(匈奴;예맥)의 기마전술에 골치를 앓은 전국시대 조()나라 무령왕(武靈王)은 호복기사전술(胡服騎射戰術)을 수입하여 그 습득에 노력하고 이로 인해 이때부터 전투양상이 달라졌다.
 
이 기마전술은 점차 전국시대에도 넓혀져서 전차전술(戰車戰術)을 무용(無用)하게 하여 진왕(秦王;진시황(秦始皇)은 기마전술을 인용해서 한민족사회(漢民族社會)를 통일했던 것이다.
 
더욱이 후한(後漢) 이후의 역대왕조(歷代王朝)도 기마전술(騎馬戰術)을 가지고서 국가통일을 이룰 뿐 아니라 3000km, 때로는 4000km의 적지(敵地)까지 원정(遠征)을 시도(試圖)하여 판도확대(版圖擴大)에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신한족(新漢族)이 된 수() 이후의 중국인에는 남부의 농경민족(農耕民族)도 포함해서 유목기마민족(遊牧騎馬民族)으로서의 체질이 농후(濃厚)하게 되었다. 또 한편 기마민족(騎馬民族)이 제3의 공헌(貢獻)으로서는, 한민족(漢民族)에게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게 한 것이다.
 
이 장성(長城)은 이미 기술한 대로 북방(北方)의 유목민족(遊牧民族)의 침입으로부터 국토를 방위하기 위해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열후(列侯)들이 황하(黃河)의 대굴곡부(大屈曲部)의 외측(外側)에 만리장성을 구축하기 시작하여 그 후 진왕(秦王;진시황제)이 이어서 쌓은 것으로 이 공사는 명 왕조(王朝)까지 건설이 계속되어 완성한 것이지 진()때 된 것 아니다.
 
만리장성은 동()은 산해관(山海關)으로부터 서(西)는 가욕관(嘉峪關)까지 지분(枝分)되어 있는 부분도 포함해서 총연장 6000km에 미치는 인류역사상(人類歷史上) 최장(最長)의 건조물로 말해지고 있다.
 
이것은 얼마나 북방 이민족과 한족간(漢族間)에 명확한 국경선의 증거로서 현재 장성(長城)을 넘어서 중국인이 이주(移住)하고 있는 것은 침략의 증거로 밖에 볼 수 없다. 한족(漢族)130여 년 전부터 만주(滿洲)에 이주(移住)하고 있다. 그 이전에 한족(漢族)이 이곳에 살지 않았다.
 
끝으로 기마민족이 고대중국의 발전에 기여한 것에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는, ()을 가져다 준 것이다. 중국에는 서기전 500년경부터 철 생산이 시작되었다. 한무제(漢武帝)가 연전연패(連戰連敗)에서 연전연승(連戰連勝)이 된 것 같이 말하는 역사 왜곡도 철기사용에서부터다. ()이 연전연승했다고 하나 이는 과장된 것으로 위만조선 하나도 정복하지 못했다.
 
한무제(漢武帝)가 위만조선을 침범했으나 이기지 못한 사실은 이미 다 아는 사실로. 위만조선(衛滿朝鮮)은 우거 때 내분(內紛)에 의해서 멸망한 것이지 한무제(漢武帝)가 정복하지 못했다.
(以上崔仁 ‘(韓國學講義)’72~74, 杉山徹宗,‘眞實中國四千年史’.89~92面參照 引用).
 
한무제(漢武帝), 동이공략 위해 중원 산, 독산(禿山) 만들어
 
한무제(漢武帝)는 기마군단으로 나오는 기마민족의 전술에 굴욕적인 관계를 참아 왔다. 전한(前漢)은 그 후, 국내의 지배가 안정화되고 서기전 141년에 무제(武帝)가 즉위하기에 이른다.
 
이 때 상황을 보면 한무제(漢武帝)는 즉위(서기전 156~서기전 87)하고 나서 임기동안 동이족과 역학관계(力學關係)를 역전(逆轉)하기 위한 정책으로 바꿔서 우선 서기전 139년에 부하의 장건(張騫(?~서기전 114)을 대월씨(大月氏)로 보내, 강대한 기마민족인 흉노(匈奴;예맥)를 동서(東西)로 협공하는 전략을 세우려 장건(張騫)을 파견한다.
 
그러나 장건(張騫)은 한나라를 나오자마자 기마민족에게 붙잡혀 10년간 가둬지는 신세가 된다. 그 후 장건(張騫)이 그곳을 탈출해 대월씨(大月氏)에 도착한 것은 서기전 129년경이다.
 
그런데 대월씨(大月氏)는 강한 기마민족에게 맞서 싸울 의사가 없었기에 장건(張騫)1년간을 그곳에서 보내고 귀로(歸路)에 다시 흉노에 붙잡혀 장안에 돌아온 것은 서기전 126년이었다.
 
장건(張騫)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되지 않았으나 13년간에 걸친 서역(西域)에서의 곤란한 여행을 통해서 서역제국(西域諸國)의 지리(地理기후·민족·풍속 등의 정보를 한나라에 가져오게 되었다. 여기서 무제(武帝)는 대규모의 서역지배의 야망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 후의 왕들에게도 상권과 교역(交易) 루트 확보를 위한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고금을 통해 그 어느 시대나 정보(情報)는 국가발전에 모체(母體)가 된다.
 
전한(前漢)의 무제(武帝)는 장건(張騫)이 귀국하기 3년 전에 흉노 토벌의 군세(軍勢)를 일으켜 차기장군(車騎將軍),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 등을 북방에 파견해서 11년간을 흉노와 싸워 7번 승리했다고 했다. 이것은 중국의 주장이고 흉노는 한()에 밀리지 않았다.
 
그러나 흉노(匈奴;예맥)도 내부의 갈등과 분열로 인하여 약화된 때가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예컨대 일족(一族)의 태자(太子) 어단(於單)이나 혼사왕(渾邪王)이 전한(前漢)에 망명 등 분열로 사막의 북방에 내 쫒기는 일이 있었던 것을 말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연전연패했던 대() 흉노;예맥 전()에서 연전연승하여 흉노(匈奴;예맥)을 음산산맥(陰山(山脈) 남록(南麓)까지 물리칠 수 있었다고 하고 있으나 이는 허구이다. 예맥이 동주(東周)시대부터 한무제 시대까지 중원에 남출(南出)하여 한족을 정벌하고 정복한 것을 숨길 수 없다.
 
중국은 진()시대까지도 화살촉은 동()이었고, 한고조(漢高祖) 시대에 와서 약간의 화살에 철제의 족()이 사용했고 있으나 전술적으로는 종래와 같은 방법이기 때문에 적의 수가 많으면 동이족, 흉노(匈奴;예맥)의 기마군단(騎馬軍團)을 당할 수가 없었다. 중국은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그런데 무제(武帝) 시대에 주철(鑄鐵)기술이 개발되어 대량 생산이 가능하게 되어 적에게 철제의 화촉을 사용하기 때문에 사정(射程)이 길어져서 흉노(匈奴;예맥)의 기마군단도 격파할 수 있다고 말하며 동이족의 나라들을 화북(華北)에서 철수하는 일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러지 않다.
 
당시의 기마민족, 특히 흉노(匈奴;예맥)은 강대(强大)하여 위만의 상전인 한고조(漢高祖)를 지원하고 위만(衛滿)을 책동하여 한고조를 배반하게 할 정도였다. 제왕운기(帝王韻紀)에 고시라(故尸羅), 고례(高禮), 남북옥저(南北沃沮), 동북부여(東北夫餘), 예맥의 단군(檀君)의 수()라 하였다.
 
이는 모든 부족의 족장을 다 단군(檀君)이라 칭한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모든 부족중(部族中) 주체는 예맥조선이다. 주무왕(周武王)이 은()을 정벌한 역사를 기록한 서전(書傳) 무성편(武成篇)에 화하예맥(華夏濊貊)이라 하였다. 즉 안으로 중국과 밖으로 예맥이라 기록하였다. (以上崔仁 ‘(韓國學講義)’72~74, 杉山徹宗,‘眞實中國四千年史’.89~92面 參照 引用하다).
 
글을 맺으며
 
지금 우리나라 역사교재에는 한무제(漢武帝)가 우리 민족을 정복하고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는 중국사의 위조를 그대로 번역하여 한무제(漢武帝)가 우리를 지배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한무제(漢武帝)가 우리 민족을 정벌하고 지배한 일이 없었고, 중국 역사서에도 분명히 명기(明記)되어 있다. (三國志 第三十 東夷傳), 崔仁, ‘韓國學講義’ 69~71, 參照 引用하다).
 
중국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부터 우리 역사를 왜곡, 조작했음을 외국의 학자들도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말을 하고 있다. 러시아 역사학자 유엠 부틴은 그의 저서 고조선(古朝鮮)에서 한대(漢代) 이전에 현토와 낙랑지역에 이르렀던 조선의 영역은 한번도 중국의 제후국(諸侯國)이 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연()나라, ()나라에 예속된 적이 없다.”했다.
 
일본의 아고 기요히코(吾鄕淸彦)사마천의 사기(史記)25권은 단군조선의 중원대륙을 지배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가지고, 마치 중국이 단군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작업을 해놓은 것이다.”고 우리나라 역사는 고대사부터다 왜곡됨을 지적하고 있다.
 
구소련의 역사학자 시로코 고르프는 중국사(中國史)에서 서기전 3000년 경, 동이족은 이미 황하·양자강·서강의 중류이동의 중간지역에 살았으며 지나족(支那族)은 이보다1 500~2000년 후에 동방천자(東方天子)치우가 다스리는 동이 나라인 강회(江淮)지방에 진출했다고 했다.
 
외국의 모든 학자들도 우리가 대륙에 먼저 선주(先住)해서 중원을 지배하여온 사실을 아는데 어찌 자기나라의 역사를 왜곡된 역사만을 고집하는 식민사관자는 그 진실을 모른단 말인가!?
언제까지 우리역사를 망가트리려는 것인지! 한심하기 짝이 없는 그 죄악 어찌 감당하려는가!.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再考證 韓國思想新發見’.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吳在成,‘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百濟中國에 있었다.’.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東夷歷史 ’. (右犂)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九犂系, 新羅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九犂系, -日本史’. 윤진영, 編集 三國史. 苻都誌’. 김동락, ‘천부경과 문디, 거시기’. 황순종,‘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반재원,‘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단군과 교웅-단군의 호적등본’. 이강민,‘대한국고대사’.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李進熙’ ‘好太王碑’. ‘石井進外3, 智勝, ‘우리上古史’-발로 확인한 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바이칼 민족과 홍익인간세상’.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歷史’. 石井進外3, ‘詳說日本史,. 文定昌, ’韓國史延長-, ‘古代日本史’. 秋山謙藏, ‘日本歷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津田秀夫, ‘ひとりでべる日本史’. 杉山徹宗, ‘眞實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歷史.,. 李民樹,'朝鮮傳‘.외 다수(多數)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을 인용(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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