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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식의 대고구리

백제를 멸하려는 소정방의 출발지는 어디인가

중국 사서에는 성산으로, 삼국사기에는 래주로 명시돼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8-12-01 21:29:00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백제가 고구려의 지원을 믿고
659년 여름 4월에 신라를 침범하니 신라왕 김춘추는 다시 당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드디어 660310일 당나라는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신라 김인문을 부대총관으로 임명하여 13만 대군을 동원하면서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지원하도록 했다.
 
<자치통감>에는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에서부터 바다를 건너니 백제는 웅진강 입구를 점거하고 이를 막았다는 문구가 8월에 있는 기록인 반면에,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당나라는 래주(萊州)를 떠나 천리에 이어지는 많은 전선을 이끌고 물길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6월에 기록되어 있다.
 
소정방의 출발장소는 중국 사서에 성산(成山)으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래주에서 출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중사학계에서는 성산을 래주라고 하면서 산동성 연태시로 지리비정하고 있으나, 래주는 하남성 위휘현의 동쪽인 탕음현일 가능성이 크다고 지난 연재에 설명했다. 성산이 래주라는 비정에는 무슨 근거가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산해경 남산경>성산의 동쪽 5백리에 회계산이 있는데 작수가 나오는 곳이며 남쪽으로 흘러 격수(湨水)로 들어간다라는 문구가 있어, 성산은 격수의 북서쪽 약 500리에 위치하고 있는 산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격수의 위치를 찾으면 성산의 대략적인 위치를 밝힐 수 있는 것이다.
 
격수는 <수경주(水經注)> 7권 제수(濟水) 서두에 제수는 하동(河東)군 원()현 동쪽 왕옥산(王屋山)에서 나오는데, 연수(沇水)라고도 한다. (중략) 그 물길 하나는 지진(枝津) 남쪽을 흘러 격수(湨水)로 들어간다. 격수는 원성(原城) 서북 원산(原山)에서 나오는 소위 백간수(白涧水)이다. 원성 서쪽을 지난다는 문구가 있어 북부 하남성 제원시를 지나는 강임을 알 수 있다. 하동군은 산서남부이고, 원현은 현 원곡(垣曲)이며, 원성은 제원(濟源)시를 말한다.
 
▲ 격수가 패수, 추수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산해경 주. [사진=필자 제공]
 
격수
(湨水)는 글자가 비슷한 추수(溴水)로도 기록되어 있으며, 우리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지명인 바로 패수(浿水)이기도 하다. 격수=추수=패수였다는 사실은 동진의 곽박(郭璞)이 위 산해경 남산경의 ()’일작패(一作浿)”라는 주를 붙여 확실해졌다. 지금까지 패수를 청천강으로 비정한 이병도를 위시한 식민사학계의 엉터리 학설은 이제 모두 폐기처분되어야 할 것이다.
 
북부 하남성 제원시를 흐르는 패수(=격수, 추수)의 또 하나의 발원지이기도 한 회계산을 중국에서는 하나라를 세운 우(夏禹)의 가짜무덤까지 조성해놓고 현재 절강성 소흥시라고 선전하고 있다. 이는 역사왜곡을 위해 지명이동으로, 회계산은 치수(治水)에 성공한 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산이라 하나라 도읍인 안읍(安邑)이 있고 대홍수가 났던 산서성 남부 근처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정벌을 위해 떠났다는 성산은 하남성 제원시 북쪽에 있는 산에서 서쪽으로 약 5백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산인데, 당시 5백리가 현재 거리로 얼마인지 추산하기가 어려우나 황하와 합류지점에서 가까운 위수 주변에 있는 산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제해(濟海)는 바다가 아니라 황하이거나 내륙 호수였던 발해를 건넌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 성산은 패수 북쪽에 있는 회계산 서쪽 500리, 대홍수가 발생한 산서남부와 하도 안읍. [사진=필자 제공]
 
또한
당나라는 래주(萊州)를 떠나 전선을 거느리고 물길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라는 기록에서 당나라 전선들은 바다를 지난 것이 아니라 해()로 기록되기도 했던 황하의 흐름을 따라 하류인 동쪽으로 내려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당나라의 움직임에 백제는 웅진강의 입구를 점거하고 이들을 막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의 웅진강은 도대체 어느 강일까.
 
반도사관에 마취되어 있는 식민강단사학계는 이 웅진강을 충청도 공주를 흐르는 금강이라고 한다. 조선왕조의 반도사관에 의해 저술된 <동국여지승람>에 금강은 상류에서부터 여러 이름으로 불리다가 공주에 이르러서는 웅진강, 부여에서는 백마강, 하류에서는 고성진강으로 불렸다고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강 입구의 명칭을 하류인 고성진강의 입구라 하지 않고 왜 하필 멀리 떨어진 중류에 있는 웅진강의 입구라고 했을까. 이는 어불성설로 한마디로 웅진강은 지금의 금강이라는 건 억지춘향이란 말인 것이다.
 
당나라 소정방을 만나러가는 신라 김춘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기록된 날짜가 <자치통감>8월과 상당한 차이가 있으나, 전자의 전투상황일자가 보다 구체적이고 상세하므로 이를 따르도록 하겠다. 소정방이 도착하기 전인 “526일 신라왕 김춘추는 김유신 장군을 대동하고 군대를 이끌고 도성을 떠나 618일 남천정에 주둔했다. 621일 왕(김춘추)이 병선 100척과 함께 태자를 보내 덕물도(德物島)에서 소정방을 영접하게 했다
 
사학계에서는 남천정을 경기도 이천으로, 덕물도를 인천 앞바다 덕적도로 비정했다. 신라왕 김춘추가 526일 도성을 떠나 618일 남천정에 주둔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경상도 경주에서 경기도 이천까지 가는데 20일이 넘게 걸리는지 모르겠다. 군대의 행렬은 일반인보다 더디므로 그렇게 걸릴 수도 있다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신라가 이천으로 가서는 인천 앞바다에서 만나기로 한 소정방을 만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미 642년에 백제에게 당항성(화성)을 빼앗겨 당나라와의 통로가 막혀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이천에서 배를 보내 인천 앞바다 덕물도(덕적도)에 갈 수가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이천에서 한강을 통해 배를 보냈을까. 만일 그랬다면 그 배는 상류 신라 땅에서 가지고 왔단 말인가. 도저히 필자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지명비정이라 할 수 있다.
  
▲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백제패망지도. [사진=필자 제공]
 
게다가 만일 덕물도가 인천 앞바다였다면 당나라 수군은 고구려 수군의 공격을 먼저 받았을 것이다
. 왜냐하면 당시의 선박과 항해술로 황해를 횡단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분명 육지를 끼고 가는 연안항해를 해야 했기에 당나라 배들은 고구려 앞바다를 경유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당시 신라 배 100척이 백제 앞바다를 통과해왔다면 백제와도 교전이 벌어졌을 텐데 그런 전투조차 없었다는 의미는 소정방과 신라군이 만난 덕물도가 인천 앞바다가 아니라는 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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