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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은 누구나 맞을 노후의 생계비를 상호부조의 공공정신으로 십시일반 갹출해 국가가 그 운영과 관리 및 지급업무 등을 대행하는 대한민국 최대규모의 거대 금융복지 기간망 시스템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용돈연금’으로 치부됐던 국민연금을 명실공히 노후의 최소한 삶을 보장하는 전 국민 노후안정 시스템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문재인 정부의 개편방향은 일단 옳다.
사지선다형으로 제시된 개편방안은 세부 내용이 달라도 핵심 방향에서 인간답게 황혼을 마감할 수 있도록 해보자는 쪽에 모두 초점이 맞춰졌다. 그렇지 않아도 이는 당연히 해야 할 고민이었다. 작년만 해도 수급자 469만명이 받은 월평균 급여액은 고작 38만원 수준이다. 200만원 이상자도 9명 뿐이고 최고액 수급자는 204만원이라고 하니 국가 기간망 복지시스템의 초라하기 그지없는 민낯이다.
이 정도면 있으나 마나한 노후설계가 분명히 맞다. 수십년을 꼬박꼬박 쌓은 연금의 대가 치고는 너무 작다는 것에 누구 하나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특히 한 푼이 아쉬운 샐러리맨들에게는 매달 세금처럼 떼는 돈이 그야말로 떼인 돈으로 치부돼 온 것이 무리가 아니다. 당연히 국민연금에 대한 국민적 신뢰도는 지금 최저 수준이다. 국민연금을 노후설계로 기대하지 않아 온 국민들이 대다수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를 근본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네 가지 안으로 내놨으니 현 정부가 고민한 흔적을 보이기는 했다. 그 중에서도 ‘덜 내고 더 받는’ 이상적 방법이 없기에 ‘더 내고 더 받는’ 기본 방향에는 찬성한다. 상호부조의 정신에 입각해 더 많은 기금을 모아 조금씩 더 가져가는 구조가 우리의 현실에 틀리지 않다.
물론 출산율이 사망률보다 훨씬 높아지는 추세가 계속된다는 전제가 있다면 국민연금을 내는 지금의 세대는 ‘덜 내고 더 받을 수 있는’ 모델이 있을 수 있지만 저출산 문제에 직면한 우리에게는 그것은 이상적인 그림일 뿐이다. 오히려 저출산 구조 하에서 더 낸다고 해도 더 받는 구조에서는 필연적으로 기금고갈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닥뜨린다.
문제는 정부가 그것을 인정했다는데 있다. 국민연금 개편안이 그것을 골자로 했기에 알면서도 대책이 없는 것이 큰 문제다. 그런데 어떤 대책도 기금고갈을 전제로 해서는 안 된다. 기금고갈은 젊은 세대들에게 무조건 희생을 대놓고 강요하는 것의 다른 말이다. 정부 예상대로 기금고갈 시점을 2060년 전후로 감안할 경우 지금 태어나기도 전의 아이들이나 신생아들에게까지 향후 자신들은 받지도 못할 곳간에 쌀을 넣어 두거나 계속 넣어야 할 운명을 짊어지우는 상황을 만든다.
기금고갈은 또 수많은 피해자들을 발생시키는 부도상태와 다르지 않다. 속된말로 서민들의 사적 금고인 계모임에서 계주가 망하는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상상할 수 없이 큰 계모임이 망하는 그림을 상상하면 된다. 이에 대해 정부는 국가가 연금지급을 보장하도록 법개정을 추진하겠다고 하기는 했다. 연금기금이 망해도 국가가 보장하는 연대보증 시스템이다.
언뜻 보기에 국가보증 시스템이면 믿어볼 만 하지만 이 조차 한계가 분명하고 회생불가능한 식물형 연금을 연명시킬 뿐이다. 국가 보증은 망한 계주가 계원들의 호주머니 돈으로 보증을 서는 것을 상상하게 한다. 책임을 져야 할 국가가 되레 국민들의 호주머니로 보증을 서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결국 국민들이 책임지는 시스템이니 말만 화려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세금과 기금은 성격이 완전히 달라 기금을 세금으로 무제한 메울 수 없다. 기금의 독자성은 반드시 확보돼야만 상호부조 정신으로 영속성을 이어갈 수 있다. 세금은 상호부조 보다 단 한 푼이라도 국가설계 차원의 더 큰 그림에 사용되는 공익성 쪽에 무게중심이 가 있다.
기금소진이 불가피하면서 대책이 없는 것은 막연하게 당장의 불을 끄고보자는 식과 다를 바 없다. 이런 대책없는 대책이 우리 후손들에게 얼마나 큰 죄를 짓는지를 생각한다면 장기적으로는 그릴 수 없는 설계가 그려졌다. 640조에 달하는 초거대 기금의 40년 빚잔치 계획과 무엇이 다른가. 후손들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도무지 이런 망하기를 작정한 굿판의 설계가 나올 수 없다.
빚잔치를 하지 않을 대안이 있음에도 그것은 생각하지도 않는 것이 이상하다. 정상적이지 않은 생각을 하는 것이 한숨을 짓게 한다. 개편방안을 보면 작금의 있으나 마나한 국민연금을 만든 문제의 근본 원인에 대한 진단이나 대책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원인의 진단없이 나온 대책이니 그야말로 제대로 된 대안이 될리 만무하다.
근본 대책은 국민연금 기금을 부실하고 방만하게 낭비해 온 요인을 제대로 파헤치고 조사해 그것을 철저하게 미연에 막는 방식으로 출발해야 한다. 그동안 국민연금은 적지 않은 낭비사례들이 적시돼 왔다. 권력형 기금으로 변질된 국민연금이 속칭 눈 먼 돈으로 전락한지 오래 됐다.
어느 정권이고 권력만 쥐면 국민연금을 직·간접 활용하려 눈독을 들였다. 실제 권력형 기금으로 잘못 사용된 경우가 허다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운용수익률에서 손해 볼 일이 없을 안정형 설계가 작게는 수십·수백억에서 많게는 수십조씩 손해보는 권력형 투자를 한다는 것 자체가 괴물이다. 권력형 투자로 민간기업을 좌지우지할 생각만 한 채 수익률이 차선이거나 뒷전인 막후 계산법이 국민연금의 부실운용을 키웠다.
국민연금공단은 기금운용의 투명성을 국민들에게 낱낱이 공개해야 한다. 기금의 소중함을 감안해 부실·방만·낭비 요인이 철저히 예방되도록 하는 차원에서 과거의 사례들까지 전방위적으로 공개돼야 한다. 이를 통해 단죄가 필요한 사안은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는 연금기금 뒤주에 쌀이 항상 쌓여있도록 하는 근본대책이다.
이 과정이 전제되지 않으면 아무리 이상적인 연금기금 개편방안이라고 해도 언제든 기금소멸은 예정된 비극이 되고 만다. 실제 우리는 권력형 비리를 과거 ‘카더라 통신’으로 수없이 들어왔고 그중 제한된 사례만 언론을 통해 겉핥기 수준의 뉴스로 접해 왔다. 이제 그 카더라 통신의 내막을 밝혀야 할 때다. 국민연금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 절차가 이것이다.
적폐청산을 국정과제로 내세운 정부가 유독 국민연금 적폐에 대해서는 왜 함구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대법원도 최근 국민연금이 민간기업에 투자한 내역은 정보공개의 대상이 된다고 판결하기도 했다. 하물며 사적인 모임의 계주도 계돈을 편취하거나 운용을 잘못해 손해를 보면 응당한 처벌을 받는다. 비유의 간극이 있기는 하지만 국민연금의 계주라고 할 국가가 수없이 다양한 얼굴로 기금을 갉아먹고 있는 상황을 스스로 눈 감는 것에서 나아가 국민에게 눈감기를 사실상 강요하고 더 나아가 국민의 호주머니로 보증을 세우는 기막힌 코미디 상황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여전히 국민연금은 ‘권력형 여의주’(如意珠)로 비교되는 말들이 회자된다. 권력만 잡으면 도깨비 방망이를 휘두르듯 무엇이든 자신이 뜻하는 대로 만들어 내는 유혹의 중심에 국민연금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 유혹을 떨쳐내고 국민연금을 진정으로 국민에게 돌려 줄 때 기금은 고갈되지 않는다. 황혼의 목숨 값을 놓고 벌이는 권력형 국민연금 게임은 후손 대대로 씻을 수 없는 가장 큰 죄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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