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 헤드라인 뉴스

 지하철로 보는 상권|빌딩|재건축 뉴스

뒤로 리스트 인쇄
news only email오류보내기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톡

성헌식의 대고구리

의자왕을 당나라로 넘긴 역적 예식진

예식진이 반역 대신 사수를 선택했다면 백제는 망하지 않았을 것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9-01-05 19:33:00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도성을 포위하자 의자왕은 사비성을 버리고 북쪽에 있는 웅진성으로 피신했다. 사비성에 남게 된 왕자들의 의견이 서로 달라 설왕설래하다가 애당초 당나라와 싸울 뜻이 없었던 왕자 부여융과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제2왕자 부여태가 성문을 열고 나가 무릎 꿇고 항복하며 목숨을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의자왕은 사비보다는 험준한 웅진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며 지방에서 올라온 지원군의 도착을 고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제의 의자왕이 피신해있던 웅진성도 머지않아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곧 함락될지도 모를 위기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소정방은 웅진성을 포위만 한 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 뭔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이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의자왕이 태자와 웅진방령군 등을 이끌고 웅진성에서 나와서 항복했다, ‘백제본기에는 왕과 태자 효와 여러 성들이 모두 항복했다라고 기록돼 있는데, 웅진방령군은 지금의 용어로 웅진방어사령부의 개념일 것이다.
 
그런데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는 위 <삼국사기>와는 다르게 의자왕은 곰나루(웅진)성을 지키고자 했으나, 성을 지키는 대장이 임자(任子)의 무리인지라 오히려 왕을 붙잡아 당나라에 항복하려고 했다. 의자왕이 자결하려했으나 동맥이 끊어지지 않아 결국 왕은 태자 효() 및 어린 연()과 함께 포로가 되어 당나라 진영으로 끌려갔다. 소정방은 거의 죽게 된 왕을 이리저리 굴리며 이래도 대국에 항거하겠느냐며 장난을 쳤다고 기술돼 있다.
 
임자는 백제의 좌평으로 한 때 신라의 부산현령이었던 조미압을 종으로 데리고 있었다. 조미압이 양국의 존망을 알 수 없으니 만약 백제가 망하면 그대가 우리에게 의지할 것이요, 우리가 망하면 내가 그대에게 의지할 것이다라는 김유신의 말을 전해주자, 김유신에게 백제의 실정을 상세히 알려줌으로써 김유신이 655년 백제를 공격해 도비천성을 쳐서 이길 수 있게 도와준 역적을 말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의자왕이 태자 융이나 태처럼 자발적으로 항복한 것이 아니라, 웅진성 수비대장의 배신과 반역에 의해 체포당하자 더 이상의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자결을 택했으나 실패하여 억지로 끌려가 항복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위 <삼국사기>에는 의자왕 항복 직전에 뭔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 KBS 역사저널에 소개된 백제의 역적 임자 [사진=필자 제공]
 
과연 그것이 무엇인지 중국의 관련 사서를 보도록 하겠다
. <신당서> ‘소정방 열전에는 그 장수 예식과 의자가 항복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예식의 이름이 의자왕보다 앞서는 주체로 기록되어 있으며 <구당서>에 기록된 의자왕 항복장면은 그 대장 예식이 의자를 와서 항복했다(其大將禰植又將義慈來降)”인데, 여기에서 주어는 예식(禰植)이고, ()은 동사이며, 의자(義慈)가 목적어가 되며, 래항(來降)은 목적동사가 된다. 신하인 예식이 주어가 되고 주군인 의자왕이 목적어가 되는 해석이 나온다.
 
여기서 장()이 동사로 쓰일 경우 그 의미는 거느리다, 인솔하다 기르다, 양육하다 동반하다 행하다, 행동으로 옮기다 나아가다, 발전하다 가지다, 취하다 받들다 지키다 등이다. 이 중에서 문맥상 사용가능한 의미는 거느리다와 행하다의 의미로 예식진이 의자왕을 거느리고·인솔하고·동반하고 와서 항복했다로 해석된다. “예식이 의자왕을 받들고 와서 항복했다고 해석될 수도 있으나, 훗날 그의 행보로 볼 때 받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구당서 기록에서 동사로 쓰인 이 글자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진=필자 제공]
 
과연 의자왕을 체포해 당나라로 넘긴 예식진은 어떤 자일까
. 2007년 낙양에서 발견된 그의 묘비명에 의하면 예식진(禰寔進)의 가문은 조부와 부친이 백제에서 좌평을 지낸 명문가로 614년 웅천(熊川)에서 태어났다. 이방인으로는 김일제(金日磾)보다도 높은 공적을 올려 16위대장군의 하나인 정3품 좌위위(左威衛) 대장군과 종2품 주국(柱國)을 지내다가 67258세로 사망한 인물로 바로 <당서>에 기록된 예식(禰植)과 동일인이다.
 
예식진은 비문에 새겨놓은 특별한 공적은 없는 대신에, 흉노 왕자로 한나라에 잡혀왔다가 무제를 자객으로부터 구해내 훗날 시중과 고명대신과 투후(秺候)에 봉해졌던 김일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은 공적을 세웠다고 새겨놓았다. 백제부흥운동의 주역이었다가 투항해 훗날 정2품 상주국(上柱國)에까지 오른 흑치상지에 버금가는 공적일 것이다.
 
당나라에서 예식진에게 높은 벼슬을 하사한 이유는 아마 웅진성에서 의자왕을 체포해 당나라에 바친 공적을 아주 높게 평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 다른 것으로는 이방인인 그가 12년 만에 종2품 벼슬에까지 오를 수 있다는 게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참고로 당나라 때 종2품 주국 벼슬은 현재 대한민국에서의 부총리급으로 볼 수 있다. 무신의 최고관직인 대도독·대도호 또는 진군대장군 등이 이에 속하고, 6부의 수장인 상서(판서)16위 대장군이 정3품이었으니 당시 예식진의 지위가 어느 정도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공주박물관에 전시중인 예식진묘지명 [사진=필자 제공]
 
660
년 웅진성주 예식은 머지않아 밀려올 18만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자신의 왕을 체포해 당나라에 바쳐 그 대가로 출세를 보장받는 만고역적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의자왕이 웅진으로 오자 예식진은 당나라와 뭔가를 협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랬기에 소정방이 웅진성 공격을 명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대역무도한 짓은 <일본서기>소정방 등이 붙잡은 백제왕이라는 문구가 있어 확실하다 하겠다.
 
의자왕이 붙잡혀 항복하고 압송됨으로써 700년 사직의 백제는 나라의 구심점을 잃고 말았다. 660년 백제의 멸망 이후 보신과 도침의 부흥운동과 흑치상지가 이끈 부흥군 등이 한때 큰 세력을 떨치기도 했으나 결국 무산된 이유는 국가의 왕이라는 확실한 구심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으로 볼 때 당나라 입장에서는 예식의 공적이 결코 작지 않다 할 것이다.
 
그가 역적의 길을 택하는 바람에 자손들은 편하게 잘 살았겠지만, 13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예식진은 만고의 역적이라는 굴레를 뒤집어쓰고 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없지만 만약 예식진이 의자왕을 도와 험난한 지형을 이용해 시간을 최대한 끌면서 지방에서 보낸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었다면, 백제는 아마 망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예식진은 계백장군처럼 만고의 충신이 되어 있을 것이다. 게다가 고구려 멸망이라는 민족 최대의 위기도 없었지 않았겠는가. 

  • 좋아요
    0

  • 감동이예요
    1

  • 후속기사원해요
    0

  • 화나요
    2

  • 슬퍼요
    2

<저작권자 ⓒ스카이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스타의 집&빌딩

전직, 현직 국회의원들이 사는 곳은 어디일까?
김세연
자유한국당(부산 금정구)
이용희
민주통합당
황인자
새누리당
뒤로 리스트 인쇄
email오류보내기 트위터 페이스북 밴드 카카오톡
독자의견 총 0건의 댓글이 있습니다.
등록하기

스카이 사람들

more
“청년 주거문제는 사회가 함께 고민하고 풀어야해요”
서울 1인 청년가구 3명 중 1명은 ‘지옥고’ 거...

미세먼지 (2019-06-26 00:00 기준)

  • 서울
  •  
(좋음 : 23)
  • 부산
  •  
(좋음 : 19)
  • 대구
  •  
(양호 : 37)
  • 인천
  •  
(좋음 : 24)
  • 광주
  •  
(양호 : 40)
  • 대전
  •  
(양호 :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