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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 어디까지 하고 있나! 96

세계문명 시원국 역사, 반도사관 벗어나야

고대 대륙에 건재한 우리 민족국가 왜곡 가관(可觀)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9-01-06 12:03:00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중원정벌, 정복하고 지배한 우리 강대한 국가건설
 
환국시대부터 환인(桓因)은 한반도는 물론 유라시아를 아우르며 9개의 환족(桓族)12개의 분국을 천산 동방에서 동서 문명의 시원국(始源國)을 이뤘다. 이를 망각한 반도사관은 우리역사를 반도 안에 가두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연방국가 형태로 환국(桓國)53() 3301년을 지내고, 배달국 18(37) 1565년을 신시(神市)에서 시작했으며 단군이 다스린 조선은 아사달에서 472096년간 다스렸다.
 
우리 역사는 대륙역사이기에 이제는 반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민족은 본래 대륙에서 시작해 조선조 초기까지도 대륙의 역사이지 반도의 역사가 아니다. 중앙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 이집트, 그리스문명도 환족(桓族)을 통해 나왔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 역사는 환국에서 뻗어나간 세계문명의 시원국(始源國)임을 바로 아는 것이 급선무다. 북미 인디언 문화와 마야, 잉카문화까지도 우리의 선조들이 뻗어나간 것임이 증명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반도가 아니라 대륙은 물론 세계사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중앙아시아의 민족과 오대양 육대주 문명과 문화가 어디에서 어디로 흘러간 것인지를 추적하면 과학적으로 우리 환족의 뿌리를 찾아 올라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역사를 반도에 가두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천체관측과 자연현상에서도 우리가 반도가 아니라 중원대륙을 지배한 민족의 뿌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곡된 역사에만 길들여져 있다. 필자 역시 왜곡 역사책만을 보다가 연구를 거듭할수록 우리 역사가 대륙의 역사요 위대한 역사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이룩한 문명과 지금은 각 국가로 되어 있는 요(), (), ()나라와 중앙아시아 국가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추적하면, 우리 역사가 얼마나 자랑스럽고 위대한 것인가를 알게 된다. 필자도 연구를 하면 할수록 우리 역사의 위대함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역사가 열등한 중국과 일본의 자격지심에서 역사를 왜곡하고 변조한 것을 알지 못하고 그들의 왜곡하고 변조한 역사를 그대로 믿고 우리를 폄하(貶下)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상고시대(上古時代)부터 고대(古代)에도 그들을 정벌(征伐)하고 정복(征服)하여 지배(支配)했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다.
 
필자는 본고를 통해 중국과 일본이 우리 역사를 폄하하나 우리가 앞선 문물제도를 전수시킨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 환족(桓族)은 고대부터 한족(漢族)을 지배했다
 
서기전 3세기부터 9세기 중반까지 1200년간 흉노(匈奴), 선비(鮮卑), 유연(柔然), 위굴(回鶻), 토번(吐藩)등 유목민족(遊牧民族)이 강대한 왕국을 건설하여 중원 대륙을 지배했다. 한민족(漢民族)왕조에 위협일 뿐만 아니라 그들을 정벌하고 정복하여 지배해온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나라가 고조선을 멸하고 우리를 지배한 것 같이 조작하나 이것은 허구에 불과하다. 우리 민족이 한()은 물론 중원(中原)을 지배했다는 것은 일반상식이다. 예맥(銳麥=濊貊;(匈奴), 부여(夫餘), 고구려가 주축을 이루는 우리 유목민족(遊牧民族)은 한족(漢族)을 압도하며 지배했다.
 
예컨대 그 대표라 할 수 있는 흉노(匈奴)의 모돈단우(冒頓單于)는 대륙을 호령하며 동호(東胡), 월씨(月氏), 정령(丁零), 견곤(堅昆)등을 차례로 격파하며 한()나라도 때로는 침입, 지배했다.
 
한 예로서 전한(前漢)의 고조(高祖);서기전247~서기전195)는 건국해서 2년 후인 서기전 200년에 흉노를 정토(征討)하기 위해 32만의 대군(大軍)을 화북(華北)에 집결시켜 운강(雲崗)의 석굴(石窟) 가까운 평성(平城;산서성 대동현(山西省 大同縣)까지 진군했으나 그때 흉노의 모돈단우(冒頓單于)가 이끄는 40만 기마군단이 나타나 여지없이 격파한 것은 이를 입증한다.
 
이 때 패전을 인정한 고조(高祖)는 일족의 딸을 시집보내고 많은 선물을 보낸 후에 형제의 약속을 맺음으로써 흉노(匈奴)와 화의를 맺을 정도였다. 화의(和議)의 내용은 양국이 서로 영토침입하지 않을 것, 한실(漢室)의 여자를 단우(單于)에게 시집보낼 것. 그리고 관시(關市)=교역장(交易場)을 개설할 것과 한()으로부터 흉노(匈奴)에 세폐(歲幣;선물)을 보낼 것 등이었다.
 
이 화의(和議)는 무제(武帝)가 취임하는 서기전 141년까지 60년간 계속 되었다. 이같이 한()의 후환이 없어진 흉노(匈奴)는 강력한 기마군단(騎馬軍團)을 가지고 대륙을 지배하면서 고비사막 넘어서 도르환 분지(盆地), 다그라마간 사막을 넘어서 서방지역까지 원정(遠征)했다.
 
서역(西域)에는 당시 루란(樓蘭)과 우전(于闐)36개가 되는 오아시스가 존재하고 있는데 이곳이 흉노의 군문(軍門)에 들어갔다. 따라서 흉노의 영토는 일본학자들도 동()은 서만주(西滿洲)로부터 북()은 바이칼 호수, 이에니세이 강, 오비강의 상유역(上流域)까지, (西)는 다그라마간 사막을 포함해서 파밀고원(高原)까지, ()은 천산(天山) 곤륜산(崑崙山)으로부터 사이담 분지를 거쳐서 전한(前漢)내의 난주(蘭州)를 거쳐서 만주(滿洲)까지라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학자(日本學者)도 주장하고 있다. 역사를 보면 중동(中東)과 서방지역인 유럽까지 원정(遠征)하여 이란, 터이키, 헝가리는 물론 유럽까지 광활한 영토를 갖는 나라가 된다. 중국의 학자도 배달시대 우리 영역이 유라시아의 80%를 차지하는 동이(東夷)라 했다. 이러한 우리나라 영역을 반도 안에 가두어서 역사를 논하는 자체가 정상이 아니다. 이제 바보짓은 그만 해야 한다.
 
고대 제후국(諸侯國)이었던 중동의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7개 이상의 스탄()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의 역사와 남방의 스리랑카 등 동남아 역사도 제대로 알고 역사를 말하여야 한다. 우리는 세계적인 역사를 가진 나라이지 반도영토에 메인 나라가 아니다.
 
기마민족이 한족에 끼친 공헌(貢獻)
 
우리 환족(桓族)이 유라시아를 정벌하고 정복하여 지배한 것은 우리의 앞선 무기와 기마군단의 힘이 컸다. 타민족이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에 머물때 우리는 철기시대(鐵器時代)를 맞아 치우천황(蚩尤天皇)의 투구며 우수한 철제무기(鐵製武器)는 당시로서는 대단한 것이었다.
 
환족(桓族)은 어느 나라보다도 선진무기(先進武器)와 전술로 다른 나라들을 압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중국은 예맥(濊貊), 부여(夫餘),고구려 발해를 동이족이라 하며 두려워했다.
 
즉 환족(桓族)의 기마군단과 기마전술은 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특히 3세기 말기에는 북방 제민족(諸民族)이 남하(南下)했고, 4~5세기에는 오호십육국시대(五胡16國時代)가 되면서 이민족(異民族)과의 혼혈(混血)에 의한 한민족(漢民族)이라는 인종은 절멸(絶滅)시켰다. 그러므로 새로운 한민족(漢民族) 출현으로 수(;581~619)부터의 중국인은 신종(新種)의 한족(漢族)이 되었다.
 
이들은 북방유목민(北方遊牧民)인 흉노(匈奴)=예맥(銳麥)=(濊貊)에 대표되는 철제사용(鐵製使用)이 춘추시대(春秋時代;서기전770~서기전403)에 군기(軍機)와 농구(農具)가 철로 바꾸면서 농업도 크게 진보하여 농경민족(農耕民族)으로서의 기초를 확립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때부터 철제무기(鐵製武器)를 사용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기마민족의 기마전술(騎馬戰術)에 골치를 앓아온 이민족(異民族)들은 이를 수입(輸入)하게 된다. 가장 먼저 조()나라의 무령왕(武靈王)은 이 전술의 수득(修得)에 노력하여 한족(漢族)도 이 전술을 사용하게 됐다.
 
더욱이 한() 이후의 역대왕조(歷代王朝)는 이 기마전술(騎馬戰術)을 통하여 외국에까지 원정(遠征)을 할 뿐만 아니라 수 천 킬로미터 이상의 먼 거리에 있는 나라들도 원정(遠征)을 시도해 판도확대(版圖擴大)에 크게 기여(寄與)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신 한족(新漢族)이 된 수()이후의 중국인(中國人)에게는 남부의 농경민족(農耕民族)도 포함해서 유목기마민족(遊牧騎馬民族)으로서의 체질(體質)이 농후(濃厚)하게 되었다. 이는 기마민족이 대륙에 변화를 가져다 준 결과로서 기마민족의 공헌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중원의 각국은 계속되는 전국시대(기원전 403~서기전 221년까지)의 약 200년간을 지칭한다. 중국 국내는 구래(舊來)의 진(), (), ()과 신흥의 전제(田齊), (), (), ()7개국이 서로 하극상(下剋上)의 시대에 들어감과 동시에 약육강식(弱肉强食) 풍조가 점점 높아졌기 때문에 각 제후(諸侯)는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여기서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이란 많은 농경지를 늘려서 곡물의 생산을 높이고, 인구의 증대에 의한 병력증가와 우수한 지휘관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자국영토의 확대가 필요하게 되자 상대국을 정벌해서 영토를 확보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는 춘추전국시대부터 철기를 사용하게 되면서 한족의 거주지는 일층 넓어지고 중앙의 문화는 동서남북으로 신장해 갔다. 특히 양자강 이남지역까지 우리환족의 지배지를 확대해 갔다. (以上杉山徹宗,‘眞實中國四千年史’72面以下.貝塚茂樹,‘中國歷史.,.參照 引用)
 
()이 중국을 통일한 힘의 배경, 어디에 있었나
 
중국 제후국들이 난립한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중국을 통일한 것은 진왕(秦王;(;秦始皇)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초(), ()과 신흥의 전제(田齊), (), (), ()를 다 제압하고 서기전 221년 제()를 멸()하고 춘추이래의 난세(亂世)를 통일했다.
 
진왕(秦王;서기전259~서기전210)의 통일은 우리 기마민족의 기마전술을 익힌 데서 성공 할 수 있었다. 이 기마전술은 점차 전국시대에 확대되어 기마전술과 군마(軍馬)의 수입(輸入)과 증산(增産)에 힘써서 중원(中原)을 겨냥한 영토 확장에 국가마다 준비하게 됐다.
 
이 기마전술을 가장 선호(選好)하여 적절히 사용한 것이 진왕(秦王), , (;진시황(秦始皇)인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는 철기사용으로 기마민족(騎馬民族)의 기마전술(騎馬戰術)을 익힌 전사(戰士)로 하여금 포위(包圍)하게 하고 섬멸전(殲滅戰)을 펴서 중국을 통일했던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중국에는 철제(鐵製)무기(武器)와 기마전술(騎馬戰術)도 춘추시대(春秋時代) 이전에는 찾기 어렵고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부터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우리는 배달국시대(倍達國時代)부터 철기(鐵器)를 사용하였음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그런데 진()800년 만에 중국을 통일 한 것은 진()이 제압한 초(), ()과 신흥의 전제(田齊), (), (), ()보다도 강해서가 아니었다. 이에 대하여 당시상황을 살펴보면, 당시 난세 속에 미래 통일을 위한 여건을 갖추었기에 진()은 중국을 통일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7국 중에서는 가장 문화(文化)가 앞선 우수한 인재(人材)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인재(人材)들의 유입은, 첫째로 위()가 멸망한 후 많은 인재가 진()에 이주(移住)해 온 것과, 둘째는 우수한 군마(軍馬)와 이 군마(軍馬)를 잘 타는 유목민족(遊牧民族)을 대량으로 포용한 것이고, 셋째는 현재의 사천성(四川省) 지방인 파촉(巴蜀)의 땅을 얻은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 파촉(巴蜀)의 땅은 산에 둘러싸인 분지(盆地)이나, 물산(物産)은 풍부하기 때문에 중원(中原)이 전쟁이나 기근이 들어 살기 어려워지면 사람들은 사천(四川)으로 이주했다. 후의 삼국시대에 위()나 오()가 평야지대에 거처를 잡은 반면, 촉한(蜀漢)의 군사(軍師)인 제갈공명(諸葛孔明;181~234)은 작지만 사천(四川)을 택해 20년간 국가를 경영한 것은 유명하다.
 
사천(四川) 땅은 티베트로부터의 루트를 통해 인도(印度)와도 교역을 행할 수 있기 때문에 교역상의 부()를 많이 축적했다. 그런데 전국시대의 칠웅(七雄)중 가장 문화가 앞서있던 위()가 가장 먼저 쇠()한 이유는, ()는 연()을 제외한 다른 5강국과 국경을 접()하여 자주 침략을 받아 피폐(疲弊)해진 때문이었다.
 
여기서 본국(本國)의 무위무책(無爲無策)에 실망(失望)한 많은 위()나라 사람들은 다른 고도(高度)의 문명국(文明國)에 가기보다는 이웃나라인 진국(()으로 망명했다. 당시 진()은 가장 후진국가로 말해지고 있어서 망명하는 사람의 입장으로서는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한편 진()에 있어서는 유능한 인재를 포용해 뒤진 문화를 만회할 기회였다. 또 진()은 북(), (西), () 3방면의 이민족(異民族)과 국경을 접하고 있기 때문에 영토의 확장과 함께 이()민족 병사를 키워 군마(軍馬)전술의 습득과 군마의 수입증산에 힘을 쓰고 있는 때였다.
 
당시 조()나라는 북방기마전술을 익혀서 군사대국이 되어있는데 조()는 진()과 라이벌 관계였으나 진()이 조()를 파하자 화북지방의 군사적 균형이 일거에 무너져서 진()은 바로 중국통일을 달성한 것이다. ()이 달성한 통일지역은 현재 중국본토(正州)와 거의 일치한다. (以上杉山徹宗, ‘眞實中國四千年史’ 76~78面 參照하고, 本文引用함을 밝힌다.)
 
중국, 일본은 모든 문물제도를 우리에게서 배웠다
 
중국과 일본은 고대부터 군사 분야의 무기 전술뿐만 아니라 모든 문물제도를 수입한 나라다. 그것은 역사를 보면 확실해 진다. ()나라는 어찌해서 대흉노(匈奴);예맥(銳麥)=(濊貊)()에서 연전연패를 하였는가? 그 비밀은 철()에 있었다. 우리 환족(桓族)은 배달국 시대부터 철을 사용하고 있었으나 중국에서는 서기전 500년경부터 철의 생산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청동기와 병용되는 시대가 계속되고 무기의 체계는 기마민족을 따를 수 없었다. ()시대에 있어서도 청동기를 병용(倂用)되는 시대가 계속돼 화살촉은 동()이었다.
 
한고조(漢高祖)시대에는 약간의 화살에 철재의 철족(鐵鏃)이 사용됐다고 생각되나 전술적으로는 종래와 같은 방법이었기 때문에 적의 수가 많으면 기마민족의 기마군단을 대적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무제(漢武帝) 시대에 와서 주철기술이 전수되면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오늘날 화북지방에 산마다 민둥산이 되고 있는데 그 최대의 이유가 한무제(漢武帝)에 의한 철제무기와 농구생산(農具生産)에 있었다. 철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나무가 필요로 했다. ()시대에는 산림 80%가 우거진 산과 들이었다. 철기를 사용하면서 산림이 훼손되었다.
 
때문에 화북일대(華北一帶)에는 모든 산은 민둥산이 되기까지 벌채(伐採)되었던 것이다. 그간 기후변화에 따라 이 지대는 습윤(濕潤)한 기후가 아니라 건조한 대지(大地)이기 때문에 일단 벌채(伐採)를 하면 재생은 불가능하게 되어 오늘날 까지도 민둥산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곳 화북일대(華北一帶)의 산()들은 그 이전의 청동기시대부터 벌채가 되어 왔기 때문에 돌들이 나타나는 민둥산이 되어 버렸다. 화북일대(華北一帶)로부터 몽강(蒙疆) 지경(地境)까지 가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은 민둥산위에 축성(築城)되었기 때문에 멀리까지 볼 수 있어서 이민족(異民族)의 침입을 즉시 알 수 있었다고 할 정도다.
 
이같이 우리는 철()사용에 있어서도 중국보다 수백 년이 앞서고 중국의 처음 왕조인 은()과 주()시대부터도 우리 환족(桓族)이 선진민족으로 중국을 정벌하고 지배했다. (), ()도 동이족이 세운 나라들이다.
 
(), ()시대도 우리환족(桓族)들이 그들을 정벌하자 그들은 호경(鎬京)으로부터 낙양(洛陽)에 천도(遷都)를 거듭했다. 우리를 두려워하며 우리에게서 모든 문물제도도 배웠던 것이다.
 
()의 정관(貞觀)중에 이연수가 편찬한 [북사(北史)]에서 동이(東夷)에서 수입한 것은 궁시(弓矢)뿐 아니라 기타문화(其他文化)도 수입한다고 기록됐다(北史, 94 末尾). 예컨대 주역철학(周易哲學)과 홍범구주(洪範九疇), 문화사상(文化思想)과 물질문명(物質文明) 양면에 걸쳐서 중국은 환족(桓族)의 문물제도를 배웠다. 이는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인류사상(人類史上) 우리민족이 철활자(鐵活字)를 발견한 것은 천하공감(天下共感)의 사실이다. 고대 중국인은 2천년 동안 우리의 고시(楛矢) 석족(石鏃)을 동주시대(東周時代)인 서기전 770년경부터 수입했다. 또 당고종(唐高宗)이 신라의 궁노술(弓弩術)을 배우려고 요청을 한 사실 등을 미루어 볼 때 중국은 문화사상(文化思想)뿐 아니라 물질문명(物質文明)도 우리에게서 수입한 것을 알 수 있다.
 
중국병가(中國兵家)의 시조 강태공(姜太公)의 군사철학(軍事哲學), 천자(天子), 천황(天皇), 황제(黃帝)의 문물제도도 모두 우리에게서 배웠다. 또한 일본이 천황을 칭하는 것도 우리에게서 그 사상을 수입한 것이다. 이러한 중국과 일본이 우리 역사를 폄하한다면 당치도 않은 일이다.(以上崔仁‘(韓國學講義)’ 44~54參照하고 本文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역사는 한 사람 한 가정에서 이뤄진다고 했다. 지난날의 역사를 바로 보고 우리 실재를 바로 알고 미래를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 역사는 이대로는 미래가 없다. 희망의 새해를 맞으며 유라시아 80%를 지배한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고 우리 역사의 지평을 넓혀가야 한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再考證 韓國思想新發見’.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 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百濟中國에 있었다’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東夷歷史 ’ ‘(右犂)歷史’ ‘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九犂系, 新羅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九犂系’ ‘-日本史’. 吳在成 編著, ‘지도로 보는 우리나라 역사(東夷疆域圖)’. 윤진영, 編集 三國史 苻都誌’. 김동락, ‘천부경과 문디 거시기’. 황순종, ‘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 고대사’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반재원, ‘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단군과 교웅-단군의 호적등본’.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李進熙, ‘好太王碑’ ‘石井進外3’. 智勝, ‘우리上古史-발로 확인한 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바이칼 민족과 홍익인간세상’.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歷史’. 石井進 外 3, ‘詳說日本史’ ‘文定昌’ ‘韓國史延長’ ‘古代日本史’. 秋山謙藏, ‘日本歷史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津田秀夫, ‘ひとりでべる日本史’. 杉山徹宗, ‘眞實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歷史.,. 李民樹, '朝鮮傳외 다수(多數)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을 인용(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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