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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식의 대고구리

백제가 망하자 신라를 탐한 당나라

김춘추, 소정방의 야욕 간파하고 엄중 방비로 맞서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9-01-12 08:28:00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660718일 웅진성주 예식진의 반역행위로 의자왕이 붙잡혀 항복하자 후방에 머무르고 있던 신라왕 김춘추가 29일 사비성에 당도해서는 주연을 크게 베풀어 장수들과 병졸들의 노고를 위로했다. 김춘추와 소정방과 김유신 등은 대청마루 위에 앉고, 의자왕과 왕자들은 마루 아래 앉히고는 가끔씩 의자왕에게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신하들이 모두 목메어 울었다.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사비도성에 진영을 차리고는 신라를 침공할 것을 은밀히 추진하려고 했다. 이는 당나라 고종이 임지로 떠나는 소정방 대총관(총사령관)에게 백제를 멸한 다음 기회를 봐서 신라까지 빼앗으라는 밀지를 내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소정방의 의도를 알아차린 김유신이 신라왕에게 급히 보고하자 김춘추는 신하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이 때 다미공이 나서며 우리 병사들에게 백제군복을 입혀 당나라 진영을 치면 소정방은 반격에 나서면서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할 겁니다. 그때 불시에 기습해 당나라 군대를 격파하면 우리가 백제 강역을 전부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북쪽으로 고구려와 화친하고 서쪽으로 당나라에 맞서면서, 백제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군대를 양성하며 때를 보아 움직인다면 누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김유신이 이 의견은 취할 만하니 따르시길 바라옵니다라고 건의했으나, 김춘추는 당나라 군대가 우리를 위해 백제를 없애주었는데 도리어 그들과 싸운다면 앞으로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겠는가라고 말했다. 이에 김유신은 개의 꼬리를 잡으면 아무리 주인이라도 무는 법입니다. 지금 당나라는 우리 주인도 아니면서도 우리의 꼬리를 밟고 머리까지 깨뜨리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은혜를 생각하겠습니까라며 당나라를 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으나, 김춘추는 엄중히 방비만 할 것을 지시했다. 신라의 삼엄한 경계태세를 간파한 소정방은 자신들의 음모를 중지했다.
 
93일 소정방은 의자왕과 태자를 비롯한 왕자들, 대신과 장병 88명과 주민 12807명을 당나라 장안성으로 압송했다. 111일 소정방이 도착해 포로들을 바치니 당 고종이 꾸짖고는 모두 용서하면서, 소정방의 노고를 치하하며 어찌하여 뒤이어 신라를 치지 않았는가라고 물으니, 소정방은 신라는 왕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신하들은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며, 아랫사람들은 윗사람을 부형처럼 섬기고 있습니다. 비록 나라는 작지만 일을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답했다.
 
얼마 후 병사한 의자왕에게 금자광록대부위위경을 추증하고 옛 신하들의 조문을 허락했으며, 낙양 북쪽 망산(邙山)에 있는 손호와 진숙보의 무덤 옆에 장사지내고 비석을 세우게 했다. 손호는 삼국 오나라 손권의 손자로 마지막 왕이었으며, 진숙보는 남북조시대를 통일한 수나라에게 망한 진나라의 마지막 왕이었다. 둘 다 주색과 폭정으로 나라를 잃은 왕으로, 의자왕은 죽어서도 치욕을 당했던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중 조사팀은 무덤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조사했으나, 왕자 부여융의 묘지석만 발견했을 뿐 의자왕의 무덤은 끝내 찾지 못했다. 지난 2000년 부여시는 현지에서 채취한 흙을 한국으로 가져와 능산리 고분군에 의자왕과 부여융의 가묘를 조성하고 제사를 올려 1300년 넘게 이국을 떠돌던 백제의 마지막 국왕 부자의 원혼을 달랬다고 하는데, 조국의 부흥운동을 궤멸시켰던 부여융까지 모셨다는 것은 역사의 무지라 아니할 수 없다.
 
낙양 망산에서 동북쪽으로 15km 떨어진 맹진현 봉황대촌에 있는 진숙보의 묘 근처에 사는 한 주민은 “50년대 어느 해 비가 많이 내린 날, 멀쩡하던 밭이 둥근 모양으로 4~5m 밑으로 꺼졌는데, 꺼진 땅의 지름은 10m 정도였다. 그때 전문가들이 와서 발굴했는데, 높이 1m 정도의 석관이 나왔고 한국 왕의 묘라는 얘기가 있었다. 그 뒤로 묘지는 덮였고 밭으로 변했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 2000년 부여시에 조성된 천하의 역적 부여융(좌)과 의자왕(우) 묘소 [사진=필자 제공]
    
당이 설치하려했던 5개 도독부는 어디인가
 
<자치통감>에는 백제는 옛날에 5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37개의 군과 200개의 성, 76만호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가 망했다고 판단한 당나라는 백제의 모든 강역을 지배하기 위해 사비도성에는 백제도호부를 설치해 낭장 유인원을 주둔시켰으며, 지방에는 통치의 거점인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漣) 덕안(德安) 5개 지역에 도독부를 설치하고 그 밑에 주·현을 두려고 했다.
 
백제 북방의 요충지인 웅진도독에 왕문도를 임명했으며 나머지 도독과 주·현은 백제인 관리를 기용해 지배하려고 했으나, 유민들의 거센 저항과 부흥운동의 전개로 당나라의 도독부를 통한 백제 통치계획은 그야말로 탁상계획으로 그치게 되었다. 실제로 당시 당나라가 지배한 곳은 사비도성의 백제도호부와 그 북방에 설치한 웅진도독부뿐이었다.
 
5개의 도독부가 설치된 지역은 당연히 백제 땅이다. 추적이 어려운 마한과 금련 이외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곳이 있어 백제의 활동무대(강역)를 알 수 있다 하겠다.
 
웅진(熊津)은 백제의 도읍 사비성이 거의 확실한 산동성 곡부(曲阜)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북쪽에 있는 험준한 곳이어야 하며, 지명과 같이 강을 끼고 있는 나루터야 하므로 산동성 태안(泰安) 또는 제남(濟南)일 가능성이 크다.
 
덕안(德安)<삼국사기>에는 지명이 나오지만 위치미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춘추전국시대 초()와 오() 땅으로, 양주(揚州)의 예장(豫章)군에 속한 옛 문자로 부천원(傅淺原)이 덕안현이라는 설명이다. 오나라 손권이 예장군을 나눠 파양(鄱陽)군이라 했고, 당나라 때 포당장(蒲塘場)이라 했는데, 오대시대 927년에 덕안현이 되었다. 지금의 강서(江西)성 구강(九江)시에 속하는 현이다.
 
동명(東明)은 역사연혁에 의하면 전한 때 설치된 동혼(東昏)현을 왕망이 개명한 것으로 나온다. 현재 산동성 서남부 하택(荷澤)시에 속하는 현으로 <한서지리지>에 의하면 연주(兗州)의 진유군(陳留郡)에 속하는데, 지금의 하남성 개봉(開封)과 하택 일대이다.
 
▲ 도독부를 설치하려했던 웅진, 동명과 덕안 [사진=필자 제공]
 
그런데 과연 백제가 서쪽 깊숙한 황하남변 하남성 개봉까지 지배할 수 있었겠느냐는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으나
, <삼국사기>에 언급된 “6707, 당나라에 입조했던 사신 김흠순 등이 돌아와 향후 경계를 정하려는데, 지도를 잘 살펴 백제의 옛 땅을 모두 돌려주라고 했다. 황하(黃河)가 아직 마르지 않았고 태산(泰山)도 아직 닳지 않았거늘 3~4년 사이에 뺏고 빼앗으니, 신라 백성들이 모두 실망하면서, ‘신라와 백제는 여러 대에 걸친 철천지원수인데, 지금 백제의 형세를 보면 스스로 따로 한 나라를 세울 셈이다라는 기록을 보면 백제 영토는 황하와 태산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 중국과 동이족과의 동쪽 경계는 대체로 하남성과 산동성 사이에 있던 발해(대야택)라는 큰 내륙 호수였고, 상호간에 힘의 강약에 따라 경계선이 움직였던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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