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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식의 대고구리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한 대진국

대조영, 아버지 대중상 이은 대진국의 2대 황제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9-04-06 10:50:00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해 설인귀로 하여금 그 땅을 다스리게 했다. 이듬해 당 고종은 고구려 유민 약 4만호를 강회(江淮)의 남쪽과 여러 주의 척박한 땅으로 이주시켰다. 지금의 회수(淮水) 상류 호북성 일대로 보인다. 고구려의 힘을 분산시키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점은 고구려도 백제처럼 도성(평양)만 함락당하고 보장왕과 연남건 등 수뇌부만 당나라에게 포로로 잡혀 항복했을 뿐인데, 백제의 흑치상지나 복신처럼 대규모 부흥전쟁을 일으킨 인물이 없다는 사실이다. 현재 중국사서에는 고구려에서 부흥운동을 한 인물은 검모잠과 고연무 등이 기록되어 있으나, 그것도 신라의 지원 아래서 활동했다고 한다.
 
검모잠은 보장왕의 서자 안승(安勝)을 왕으로 세우고 부흥을 꾀했다. 당나라는 대장군 고간(高侃)을 동주(東州)도행군총관으로 삼아 토벌하게 하니, 안승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4천호를 데리고 도망쳤다. 신라는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했다가 이후 보덕왕으로 고쳐 봉했고 문무왕은 조카딸을 아내로 주었다. 683년 신문왕은 안승을 불러들여 소판 벼슬과 김씨 성을 하사하고 도성에 집을 주어 보덕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니 안승은 신라의 귀족이 되었다.
 
이듬해 고간이 안시성에서 고구려 군사를 격파했고, 67212월에는 고간이 백수산(白水山)에서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을 격파하니 신라에서 군사를 보내 구원했으나 고간이 이를 다시 물리치고 2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 KBS 드라마 대조영에서, 고구려 부흥을 외치고 거병한 검모잠. [사진=필자 제공]
 
이듬해 5, 연산(燕山)도총관 대장군 이근행이 호로하(瓠瀘河)에서 고구려 백성들을 쳐부수고 수천 명을 사로잡으니 남은 무리는 모두 신라로 달아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거대했던 고구려가 아무리 나라가 망했어도 그렇지 이토록 허약해질 수가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6772, 당나라는 항복한 보장왕을 조선왕으로 책봉해 요동으로 돌려보내 요동도독으로 삼아 남은 백성들을 수습하고 안정시키게 했다. 안동도호부를 신성(新城)으로 옮겨 통치하게 했고, 이때 이전부터 여러 주에 살고 있던 고구려 사람들을 모두 함께 돌아가게 했다. 보장왕은 요동에 도착해 반역을 도모하고자 몰래 말갈과 내통했다가 발각되었다.
 
681년 앙주(卬州)로 유배 갔던 보장왕이 이듬해 죽자, 당 고종은 그의 품계를 위위경으로 높여주고 시신을 도성으로 옮겨와 돌궐 왕 힐리의 무덤 왼편에 장사지내주고 비를 세웠다. 보장왕을 따르던 사람들을 하남과 농우(隴右)의 여러 주에 분산거주하게 하니, 가난한 자들은 안동성 부근의 옛날 성에 남았다가 일부는 신라로 도주하고 남은 사람들은 흩어져 말갈과 돌궐로 들어갔다. 이로써 고씨의 왕통이 마침내 끊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686년 당나라는 보장왕의 손자 보원(寶元)을 조선군왕으로 삼았다가 698년에 좌응양위대장군으로 승진시키고, 다시 충성국왕(忠誠國王)으로 봉해 안동의 옛 부들을 통치하게 했으나 부임하지는 않았다. 이듬해 보장왕의 아들 덕무(德武)안동도독으로 삼았는데, 후에 조금씩 스스로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이미 고구려를 통치하던 기구인 안동도호부가 없어졌든가 무의미해졌다는 말인데, 그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렇듯 현재 사학계의 학설은 고구려는 멸망 이후 본격적인 부흥전쟁도 없이 슬며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가 30년가량 고구려 유민들을 거느리고 유격전을 벌이던 대조영이 698년에서야 겨우 발해(渤海)를 세웠다고 나온다. 우리 민족사의 흐름에 30년이라는 공백기가 있었다는 말인데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이와는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 KBS 드라마 대조영에서, 왕이 아니라 유격대장 대조영의 아버지로 그려진 대중상 [사진=필자 제공]
 
“668
9월 평양성 함락 때 서압록하를 지키던 대중상(大仲象)은 변고를 듣고 무리를 이끌고 개원을 지나는데, 8000명이 소문을 듣고 따르겠다고 모여들어 동쪽으로 동모산에 이르러 자리를 잡았다. 국호를 후고구려(後高句麗)라고 칭하고 연호를 중광(重光)이라 했다. 이르는 곳마다 격문을 전하니 원근의 성들이 많이 귀속해왔다. 옛 땅을 회복함을 임무로 삼다가 중광 325월 붕어하니 묘호를 세조(世祖)라 하고 시호를 진국(震國)열황제라고 했다
 
태자 조영(祚榮)은 영주 계성(營州薊城)으로부터 무리를 이끌고 당도해 제위에 올랐다. 홀한성을 쌓아 도읍을 옮기고 군사 10만을 모집해 위세를 크게 떨쳤다. 당나라에 대항해 복수할 것을 스스로 맹세했고, 말갈장수 걸사비우와 거란장수 이진영과 병력을 연합해 당나라 장수 이해고를 천문령에서 크게 격파했다. (중략) 국호를 대진(大震)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으로 하여 고구려의 옛 땅 6000리를 차지했다. 천통 21년 봄 붕어하니 묘호를 태조(太祖)라 하고 시호를 성무(聖武)고황제라 했다
 
사학계에서는 위 기록들이 「환단고의 일부라는 이유로 위사(僞史)라고 하는데, 과연 그런지 중국사서와 비교해보도록 하겠다. 「구당서에 따르면 대조영은 처음 영주에 살았다. 대조영은 말갈의 걸사비우와 동쪽으로 달아나 험한 곳에 의지하며 방비를 튼튼하게 했다. 이해고는 걸사비우를 먼저 깨고 천문령을 넘어 대조영을 압박했다가 크게 패해 겨우 몸만 빠져나갔다. 조영은 백성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동모산을 근거지로 해서 성을 쌓았다. 말갈과 고구려의 유민들이 점차 그에게 모여들었다. 성력 원년에 스스로 나라를 세워 진국왕이 되었다고 나온다.
 
「구당서에는 발해왕의 성은 대씨(大氏)이고 고구려가 망한 뒤 백성을 이끌고 영주에서 동쪽으로 2000리 되는 동모산을 근거지로 했다. 696년 걸걸중상이 걸사비우와 함께 동쪽으로 요수를 건너 태백산의 동북쪽을 근거지로 했다. 측천무후가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으로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으로 봉했으나 받지 않았다. 이해고가 걸사비우를 공격해서 죽일 때 걸걸중상은 이미 죽고 아들 조영이 이해고를 물리쳤다. 스스로 진국(震國)왕이라 불렀으며, 영토가 사방 5000리였다고 언급된다.
 
▲ 대진국의 2세 황제가 아니라 발해의 초대 왕으로 묘사된 대조영 [사진=필자 제공]
 
위 두
「당서「태백일사기록을 잘 비교해보면 그 내용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 사서에서는 대중상 때 나라를 세운 반면에, 중국사서는 대중상에게 진국공을 봉했으나 받지 않았다고 표현했으며 대조영 때 되어서야 처음 국호를 진국이라 칭했다는 것이다. 또한 대중상과 대조영이 사용한 자체연호도 아예 기록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춘추필법에 의해 기록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668년 고구려가 망하자마자 대규모 부흥전쟁을 본격적으로 일으킨 인물은 바로 후고구려를 세운 대중상이었다. 백성들도 그를 고구려의 계승자로 알고 따랐기 때문에 다른 부흥운동은 그나마 신라의 지원을 받은 검모잠과 고연무뿐이었던 것이다. 비주류 검모잠에게 추대된 안승은 자신이 대중상 때문에 고구려의 왕이 될 가능성도 없어 보이고, 검모잠과 내분이 생기자 그를 죽이고 신라로 투항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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