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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태경 인문책방

두 개의 서로 다른 역사적 선언들

데클러레이션에서 매니페스토까지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9-04-20 22:57:37

▲문화평론가 고태경
인권선언이라는 말을 할 때, ‘선언의 번역어가 된 것은 프랑스어 déclaration(영어 declaration)이다. 이 말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이 동등한 자격을 갖춘 인간이자 시민임을 오늘부로 선포한다는 것을 뜻한다.
 
개개인의 인간은 모두 다르며, 심지어 피부색에서부터 성별에 이르기까지 신체적 구조에서부터 감성과 지적 능력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차이를 갖는다. 하지만 이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권리를 갖는다는 차원에서는 모두가 동등하다는 것이 인권선언의 함의다. 이 인권선언은 현대 민주주의가 시작될 수 있는 기초이자 가장 근본적인 합의물이다.
 
선포이자 출발로서의 선언
 
권리는 규범이자 법적 장치의 성격을 띤다. 나는 일하며 먹고 살 만큼의 생계비를 확보할 권리를 가지며, 타인으로부터 괴롭힘 당하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 개개인의 인간들이 생물학적 특성이나 개개인의 성향에서 차이를 갖는다고 할 때, 이 차이들은 사회적 합의의 영역을 벗어난 것들이다. 내 피부색이 황인종인 것은 이 사회의 합의와는 무관하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제도들은 사회적 합의를 통해 탄생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기본 전제 속에 출현한다. 생각해 보자. 최저임금도, 선거제도도, 의무교육도, 노동3권도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전제가 없이는 도입되지 않았을 제도들이다.
 
그것은 사실상 가설적인 형태로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채무를 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동시에 우리 모두가 이 사회 전체에게 삶의 안전과 평온을 위해 요구할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선언이라는 말은 어제까지와는 달리 오늘부터 그러한 전제가 이 사회의 바탕에 있다고 가정함을 선포한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 선포를 통해 민주주의의 제도적 장치들이 파생되어 나온다.
 
균열이자 출현으로서의 선언
 
이러한 선언의 효과를 학문적으로는 보통 수행적’(performative) 효과라고 한다. 연극에서 연기(performance)를 하듯, 그런 권리가 처음부터 주어져 있었던 것 마냥 행동함으로써, 우리는 그 권리가 우리 삶의 토대이자 자연의 원리인 것처럼 여기는 사회를 만들게 된다. 이 수행적 효과가 시작된 것은 18세기 말이었고, 그것은 이후 민주주의 제도를 위한 바탕이자 출발점이 된다.
 
선언의 수행적 효과는 강력했고, 그 사고는 전 세계로 퍼져나기기 시작했다. 이제 새로운 역사적 시대가 시작된 셈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현대문명(modernity), 민주주의 등 다양한 단어로 명명했다.
 
그러나 이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는 인권이 역사적으로 선포된 지 몇 십 년이 지나지 않아 나타났다. 대체로 19세기 초중반에 이르면 시장경제의 불안정성이 가시화되고, 가난이 노동자들의 삶에서 지워지지 않는 각인처럼 고정되어 나타남이 드러난다. 이는 빈곤의 악순환을 만들어 내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였고, 1800년대 초반부터 이에 저항하는 사회운동들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1840년대에는 노동자들의 운동이 유럽에서 부흥했고, 그 흐름 속에 흥미로운 역사적 문헌이 탄생했다.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집필한 그 팸플랫의 명칭은 <공산주의 선언>이었는데, 한국어로 선언이라 번역되는 원어는 매니페스토(Manifesto)였다. 영어 manifestation의 함의는 나타남혹은 출현등이다. 이 문헌의 첫 문장은 이렇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빈곤 속에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생존권을 주장하며 공론장에 출현했듯이, 이 문헌은 자신들의 존재가 유령처럼 사회 한복판에 등장함을 역설한다. 18세기 말에 전 세계를 향해 선포된 인권선언은 민주주의의 가빈이 되는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냈지만, 수십 년의 시간이 경과한 뒤 그것이 상당수의 인구들(노동자)을 배제한 민주주의임을 드러내게 된다.
 
배제된 곳에 있던 이들이 공론장의 한복판으로 출현하는 것은 프랑스 인권선언으로부터 시작된 현대 민주주의의 약속을 완성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것은 공론장에서 비가시화되었던 이들의 출현을 알리는 것이었고, 이를 통해 미완의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행위였다.
 
비슷한 움직임들이 더 없었을까. 내 기억에는 20세기 초에는 선거권을 향한 여성들의 투쟁이 있었고, 1950년대에는 백인 우월주의에 저항한 미국 흑인인권운동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2002년 서울의 거리로 나와 이동권을 요구한 장애인들이 있었고, 최근에는 미투운동이 있다. 인권선언은 민주주의가 가능케 되는 사고의 패러다임을 우리에게 제공해주었다. 남은 일은 그것을 온전하게 실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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