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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식의 대고구리

하남성 요택은 고구리에게 복속된 선비족의 고향

고구려 개국공신 부분노가 복속시킨 선비족의 고향을 찾아서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9-06-08 08:30:56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11년 임자년(B.C 9)에 유리명황이 선비족을 정벌해 복속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부분노(扶芬奴)에게 식읍을 상으로 주려했으나 극구 사양하는지라 황금 30근과 좋은 말 10필을 하사했다. 부분노는 추모제의 개국공신으로 대를 이어 충성을 다하고 있는 원로무장이었다. 그가 처음 주몽을 만난 것은 동부여의 대소 태자 때문이었다.
 
을해년(B.C 46) 대소가 힘이 세고 활을 잘 쏘는 부분노를 불러다가 신하로 삼고는 주몽과 한 번 겨뤄보라고 했다. 부분노는 주몽과 여러 번 맞붙어 보았으나 한 번도 이기지 못하자 아예 주몽을 신(神)이라 칭하며 신하가 되기를 청했다. 대소가 이를 듣고는 노해 부분노를 없애려고 했으나 오히려 부분노가 자객을 죽이고 자기 모친의 집으로 달아나버렸다.
 
적곡 출신인 부분노의 모친은 키가 9척에다가 체중이 3백 근으로 창술과 검술에 뛰어났으며 풍만하고 아름다워 사내들을 농락했다. 그녀를 스쳐지나간 지아비만도 수십 명이요 자식 또한 수십 명이었다. 아들 중 부분노와 부위염(尉厭)과 부어구(菸狗)가 주몽의 신하가 됐다. 이들의 괴력은 열 명이 먹어도 남을 돼지 한 마리를 하루에 먹어치우는 식욕에서 나왔다.
 
정축년(B.C 44)에 동부여에서 백웅(白熊)이 반란을 일으키자, 마침 주몽이 정벌을 가게 됐는데 부분노가 선봉이 되어 크게 이기니 백웅이 땅을 바치며 주몽의 신하가 되겠다고 했다. 이후 부분노는 주군으로 모시던 주몽이 오이·마리·협보와 함께 동부여를 떠날 때 동행해 개국공신이 되는 장수다.
 
▲ 2007년 방영된 MBC 드라마 주몽에서 부분노로 분한 박경환씨 [사진=MBC 드라마 주몽 캡쳐, 필자제공]
 
말갈이 쳐들어왔을 때 주몽이 활을 쏘아 말갈의 추장을 낙마시키자 부분노가 주변에 궁수들을 매복시켰다가 달아나는 말갈병사 8000명을 궤멸시켰다. 300여 명 밖에 안 되는 주몽의 군사들이 만 명이나 되는 말갈을 일당백으로 격파했던 것이다. 이듬해 전열을 재정비한 말갈의 잔당들이 낙랑과 힘을 합쳐 쳐들어오자 부분노가 수군을 이끈 한소와 함께 이를 대파했다.
 
임오년(B.C 39)에 북옥저 땅에 있는 말갈이 황하를 건너가 남쪽에다 대고 복수하겠다고 맹세했다. 주몽은 부분노에게 명해 하남에 궁수들을 매복시켰다가 물가에 기어오르는 적들을 쏘게 하니 모두가 물속으로 떨어졌다. 주몽이 살아있는 적들을 황하 가운데에서 대파했다. 주몽은 부분노를 대사마(大司馬)로 삼아 금척(金尺)과 소수장(小綏章)을 하사했다.
 
동명 6년 기축년(B.C 32)에 부분노는 행남(荇南)을 평정하고 호원(滸原)으로 나아가 주둔했는데 행인국을 행동·행서·행남의 3개 군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위치는 알 수가 없다. 10년 계사년(B.C 28) 11월 부분노의 동생 위염과 어구 등이 북옥저를 토벌해 1000여리 땅을 넓혔으며 그곳 백성 8만 명을 두눌원(杜訥原) 서쪽에 살게 하고 양맥곡(梁㹮谷)이라 명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지역들은 바로 동천제와 위장 관구검과의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부분노가 복속시킨 선비족의 고향은 어디인가
 
「고구리사초략」에 “광명 11년 임자년(B.C 9) 4월에 비리국 자몽왕 섭신이 반란을 일으켜 부분노가 치니 남쪽으로 도망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의 동년 기록과는 다르나 고구려가 선비족을 쳐서 항복을 받고 복속시켰다는 내용은 같다. 여기서의 자몽(紫蒙)은 선비족의 옛 고향이며 섭신은 선비족의 조상이었다. 과연 이곳은 어디일까.
 
자몽은 아래 「요지」에 ‘한나라 낙랑군 누방현 땅’이라는 기록이 있어 같은 낙랑군에 속하는 패수를 찾으면 그 위치를 알 수 있다. “「요지」 한의 낙랑군 루방현 땅, 후불열국이 동평부를 설치해 몽주 자몽현을 받아들였다. 요성을 황영현에 병입시켰고 발해가 자몽현을 다시 설치했다. 요나라가 그런 연유로 요양부에 속하게 했다. (「辽志」:汉乐浪郡镂方县地。后佛涅国置东平府,领蒙州紫蒙县。寻徙辽城并入黄岭县,渤海复置紫蒙县。辽因之,属辽阳府。)”
 
또한 「수경주」 14권에 “패수는 낙랑군 루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해(海)로 들어간다. 「설문」을 쓴 허신이 전하기를 패수는 루방에서 나와 동쪽으로 海로 들어간다. 일설에는 패수현에서 나온다. 「십삼주지」에서 말하기를 패수현은 낙랑의 동북쪽에 있고 루방현은 낙랑군의 동쪽에 있다. 그 현에서 나와 남쪽으로 루방을 지나간다.”는 문구가 있어 루방현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
 
▲ 수경주 권14 패수의 물길과 정확히 일치하는 하남성 격수 [사진=필자제공]
 
▲ 패수가 하남성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각종 지리지들 [사진=필자제공]
 
「한서지리지」에 낙랑군에 속하는 패수현은 「위서지형지」에서는 「한서지리지」의 예주의 하내군(豫州 河內郡)에 속하는 현들과 함께 회주의 무덕군(懷州 武德郡)에 「금사지리지」에도 회주(懷州)에 속한다고 기록돼 있다. 패수는 북부 하남성(하내군)에 속하는 현으로 지금의 제원시를 흐르는 격수다. 따라서 루방현은 격수 상류에 있는 왕옥산 앞 왕옥현 일대다.
 
이곳이 맞는지의 여부는 「요사지리지1」에 “요나라의 그 선조들을 거란이라고 부르는데 본 선비의 땅인 요택에 살았다.(「辽史地理志一」 辽国其先曰契丹,本鲜卑之地,居辽泽中)”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요택은 수양제가 고구려 침공 전에 군수물자 수송용 운하를 만들었다는 영제거(永濟渠)다.
▲ 심수의 물을 남쪽으로 황하에 다다르게 한 영제거 [사진=필자제공]
 
「수서 양제기」대업 4년(608년)에 “하북 여러 군의 남녀 백여만을 동원해 영제거를 뚫어 심수의 물을 끌어다가 남쪽으로 황하에 다다르게 했다. 북쪽이 탁군과 통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심수는 산서성 남부에서 나와 남류하다 하남성에서 급격히 동류해 황하로 들어가는 강이다. 이 물을 남쪽으로 끌어 황하와 연결시킨 것이 영제거이므로 요택은 하남성 제원시 일대일 수밖에 없다.
 
선비족은 단군조선의 남쪽과 고대 중국 사이에 살던 민족이었다. 흉노(匈奴)족 계열인 동호(東胡)의 북쪽 일파는 선비(鮮卑)로 남쪽 일파는 오환(烏桓)으로 알려져 있으나 모두 조선과 고구리에 예속되었던 민족이었다. 그러던 중 서진에서 8왕의 난이 일어나 북방 기마민족들이 용병으로 중국에 들어갔다가 아예 나라를 세우는데 이 시기가 바로 5호16국시대였다.
 
모용(慕容)부는 전연(前燕) 후연 서연 남연, 우문(宇文)부는 북주(北周), 흘복(乞伏)부는 서진(西秦), 독발(禿髮)부는 남량(南涼), 탁발(拓跋)부는 대(代) 땅에서 북위(北魏)를 세우게 된다. 서진 이후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의 양견(楊堅)은 우문부가 세운 북주의 외척이다. 당나라를 세운 이연(鮮卑)도 선비족 출신이다. 선비족은 한족의 문화에 동화되어갔으며 선비족의 옛 땅에서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출현하게 된다.
 
▲ [사진=필자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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